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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시간에 닳지 않는 홍대의 아이콘들
홍대 앞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급속한 상업화로 홍대 지역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홍대 앞 명소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홍대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홍대 앞 초입(홍익로3길)에 자리한 호미화방은 50년 역사를 자랑한다. 1987년부터는 창업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는 손자까지 힘을 보태고 있다. 호미화방의 로고는 1970년대 후반, 단골이었던 홍익대학교 대학원생이 ‘미술은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디자인해 주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일대는 법정동인 서교동보다 ‘홍대 앞’이라는 단어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곳이다. 1990년대 이후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이 지역이 각광받게 된 데에는 인디 뮤지션들의 역할이 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홍대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디 문화의 부흥과 더불어 골목 구석구석 들어선 카페와 클럽, 문화 공간들은 홍대 앞을 수십 년간 인디 문화와 젊은 감각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홍대 앞도 임대료 인상과 그에 따른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상권이 활성화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홍대 앞의 개성을 만들어 온 많은 예술가와 공간들이 주변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대형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섰다.
그래서 혹자에게 홍대 앞은 이제 상업적인 분위기만 풍기는 번화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홍대 앞 곳곳에는 여전히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을 지닌 공간들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지역 문화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홍대 앞 터줏대감 중 하나인 수(秀)노래방 전경. 1999년 오픈한 이곳은 기존 노래방들과는 다른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며 성장했다. 2005년 MBC가 방영한 인기 TV 드라마
에서 주인공 남녀가 노래를 부른 장소로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졌다.
예술인들의 사랑방
1990년대 이후 홍대 앞이 인디 문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전부터 형성된 이 지역 특유의 예술적인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미대생들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만들어 낸 독특한 문화가 인디 밴드와 클럽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75년 개업한 호미화방(Homi Art Shop)도 홍대 앞 미술 문화의 산증인으로 현재까지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영업하고 있다. 호미화방은 반세기 동안 다양하고 질 좋은 미술 재료를 공급하며 한국 미술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 2020년에는 서울미래유산(Seoul Future Heritage)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호미화방이 단순히 화방으로서의 가치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호미화방에 가면 인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다”라는 예술인들의 인식이 이곳을 홍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동력이었을 것이다.
신천지를 펼친 LP 바
1990년대 홍대 앞을 추억하는 뮤지션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블루스 하우스(Blues House)다. 홍대 앞에 인디 문화가 태동한 시기에 이곳도 문을 열었다. 블루스 하우스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련된 공간 구성과 음악 선곡으로 금세 홍대를 대표하는 바(bar)로 자리매김했다. 오로지 이곳에 가기 위해 홍대 앞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당시 주목받던 한 소설가의 장편소설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뮤지션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블루스 하우스. 그러나 지난 2016년 임대료 상승과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추억의 이름이 될 뻔만 이곳이 2020년 다시 문을 열며 역사는 현재진행형이 됐다. 오랫동안 영업한 서교동을 떠나, 망원동에 새로 둥지를 튼 것이다. 예전과 동일한 서체의 간판과 빼곡한 음반, 변함없는 분위기가 오랜 단골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세대를 반기고 있다.
ⓒ NAVER Blog Jinnie
음악 문화의 계승
최근 젊은 층들 사이에서 레트로 열풍이 거세다. 먹거리부터 패션, 음악 등 삶 전반에서 과거의 유행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레트로 바람을 타고 추억 속 제품들도 다시 각광받는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바이닐(vinyl), 레코드판도 그 바람을 타고 힙한 굿즈로 관심을 끈다.
올해로 개업 11주년을 맞은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도 홍대 앞 명소로 젊은이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연남동 골목의 작은 공간에서 2013년 문을 연 김밥레코즈는 오프라인 음반 매장을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음반을 직접 고르고 구매할 수 있는 드문 장소였다. 김밥레코즈의 탄생은 인디 뮤지션과 클럽으로 자생한 홍대 앞 음악 문화 계승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곳을 필두로 인근에 여러 레코드숍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관련 공연과 문화 행사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열리고 있는 마포 바이닐 페스타(Mapo Vinyl Festa)도 그중 하나다.
홍대 앞에 탄탄한 바이닐 문화가 형성되면서 김밥레코즈도 2년 전 동교동의 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했다. 김밥레코즈는 이곳에서 음반 판매뿐만 아니라, 해외 음반 수입, 소규모 레이블 공연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홍대 앞 음악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김밥레코즈는 2013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바이닐 레코드 매장으로, 국내외 뮤지션들의 공연도 기획해 진행한다. 10년 넘게 서울레코드페어(Seoul Record Fair)도 주최하고 있어 국내 바이닐 레코드 시장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논텍스트(NONTEXT), 사진 김동규(Kimdonggyu)
소극장 문화의 산실
소극장 산울림(Sanwoollim)은 올 초 타계한 원로 연출가 임영웅(林英雄)이 극단 산울림의 전용 극장으로 1985년 개관한 100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 고도를 기다리며 >를 한국에서 초연하며 이름을 알린 극단 산울림과 소극장 산울림은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올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 위기의 여자 >, 드니즈 살렘(Denise Chalem)의 <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 등의 공연은 그때까지 문화예술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중장년층 여성들을 극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에 이어진 소극장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이곳은 여전히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 무대를 지원하는 연극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랜드마크로 홍대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985년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은 고전 작품의 깊이 있는 해석,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무대를 보여 주며 홍대 앞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를 추가했다. 최근에는 건물 1~2층에 갤러리와 아트숍을 마련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대표적 약속 장소
1990~2000년대 인디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 홍대 앞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반면 최근의 홍대 앞은 주변의 상수동, 연남동, 망원동까지 훨씬 더 넓은 권역을 의미하게 됐다. 높아진 임대료 탓에 여러 상점과 공간들이 인근 지역으로 밀려난 탓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덕에 홍대 앞은 특정 대학가의 상권 자체를 지칭하기보다 더 넓은 지역과 그곳에서 공유되는 특유의 정서를 상징하는 말이 될 수 있었다.
리치몬드과자점(Richemont Patisserie)은 한때 홍대 앞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홍대 앞을 지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범홍대권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불린다. 1979년 문을 연 성산동 본점에 이어 1983년 홍대점을 오픈한 리치몬드과자점은 지난 2012년 임대료 상승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인기에 밀려 30년간 이어온 홍대점 영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4~5년 전 동네 빵집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성산동 본점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서울 3대 빵집’으로 불리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밤식빵과 슈크림빵으로 대표되는 변치 않는 메뉴에도 있지만, 서교동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홍대 앞의 추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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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힘
홍대 앞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다. 하지만 그 모든 특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당대의 문화를 선도한다는 점이다. 홍대 앞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화는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곤 했다. 이 점에서 홍대 앞은 일반적인 대학가와 뚜렷이 구별된다.
사진은 홍익문화공원(Hongik Cultural Park) 맞은편에 위치한 벽화 거리의 초입. 홍익대학교의 지하 캠퍼스 건설로 인해 홍익대 담장에 그려진 벽화들은 최근 사라졌지만, 나머지 한쪽인 주택가 담벼락의 벽화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이 벽화들은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형적인 주거 지역이었던 홍대 앞은 1955년 홍익대학교가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1961년 미술대학(Hongik Art College), 1972년 산업미술대학원(Graduate School of Industrial Art)이 건립되면서 학교 주변에 미대생들의 작업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작업실들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됨으로써 사적인 공간을 넘어 정형화되지 않은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문화예술 작품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발적 토론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기성 문화를 비판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곳은 갤러리로, 또 다른 곳은 카페로 변모하기도 했으며, 밤에는 클럽이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업실은 그 어떤 제약 없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홍대 앞 작업실 문화는 예술가, 기획자, 지식인들을 모여들게 만들었으며 대안 문화의 토대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1990년대 중후반 홍대 앞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홍대 앞을 구성하는 공간과 사람, 이들의 교류와 소통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맞물려 문화적 트렌드를 이끌게 되었다.
2007년 개관한 KT&G 상상마당 홍대(KT&G SangSang Madang Hongdae, 想像广場)는 영화관, 공연장, 갤러리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 활동 지원을, 일반인들에게는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한다. 홍대 앞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라이카시네마(Laika Cinema)는 2021년 문을 연 연희동 최초의 예술영화관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에릭 로메르 등 거장들의 대표작을 비롯해 대형 영화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작품성 높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거리의 예술화
1990년대 홍대 앞은 상반된 모습을 띠는 지역이었다. 대안 문화의 중심지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명 피카소 거리를 중심으로 소비문화가 확산됐다. 피카소 거리는 홍익대학교 정문 왼쪽에서 극동방송 건물 뒤편까지 이어지는 약 400미터 길이의 골목길을 말한다. 이곳은 당시 고급스러운 카페와 패션 브랜드 숍들이 즐비했던 압구정동(狎鷗亭洞) 로데오 거리에 빗대 피카소 거리로 불렸다. 카페와 유흥 업소들이 피카소 거리를 장악하면서 기존 홍대 앞의 문화적∙예술적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따라 홍대 앞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촉발됐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홍익대학교 미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거리미술전(Street Art Exhibition)이다.
1993년부터 시작된 거리미술전은 학교 밖을 벗어나 홍대 지역 곳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미술 행사이다.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바로 벽화 거리이다. 거리에 예술적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홍대 지역은 머물고 싶은 곳으로 변화했다. 또한 벽화 작업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모범 사례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지역 정체성을 쇄신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벽화 조성 작업이 확산되었다.
대안 문화 공간
국내 대안 공간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 속에서 1990년대 후반 태동되었다. 우선적으로 국제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는데, 미술 시장이 불황을 겪으면서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또한 다원화된 문화예술 환경 변화의 요인도 컸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활발히 등장했지만, 기존 공간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자생적으로 대안 공간이 형성되었고, 1999년 홍대 앞에 한국 최초의 대안 공간인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가 들어섰다. 젊은 작가들의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굴 및 지원하고, 국외 작가와의 교류와 연계를 모색하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이곳을 시작으로 여러 대안 공간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대안공간 루프의 탄생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1990년대 홍대 앞을 관통하는 대안 문화의 깊이와 저변을 확장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술 작품을 소수의 소유물로 바라보지 않고,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예술가들이 제안하는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이슈들을 관람객들과 공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예술의 경계와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2023년 대안공간 루프의 작가 공모전에 선정된 정찬민(Chanmin Jeong, 鄭讚珉)의 개인전 < 행동 부피(Mass Action) > 전시장 모습. 1999년 국내 최초의 대안 공간으로 출발한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는 매년 동시대 이슈를 독창적 시각으로 선보이는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선정해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 대안공간 루프
2018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연남장(Yeonnamjang, 延南㙊)은 연희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작업실이자 쇼케이스 공간이다. 콘텐츠에 따라 1층 카페 공간을 뮤지컬 무대, 전시장 등 다목적으로 활용한다.
최초의 아트 마켓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렸던 2002년 FIFA 월드컵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축제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홍대 앞에서도 지역 내 장소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즈음 서울시와 마포구가 홍대 앞 일정 구역을 ‘걷고싶은거리(Hongdae Culture Street, 弘大文化街)’로 지정했는데, 그 길 중심에 위치한 장소가 흔히 ‘홍대 놀이터’라 부르는 홍익대학교 건너편 어린이 공원이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기획자들이 주축이 되고, 문화예술 분야의 작가들이 모여 이 공간의 발전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2002년 5월 국내 최초의 수공예품 시장인 희망시장(Rainbow Art Market)이 열리게 되었다. 소수의 인원만 이용하던 놀이터가 아트 마켓의 거점이 됨으로써 해당 공간은 활성화될 수 있었다.
희망시장은 그동안 홍대 앞 여러 공간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벼룩시장을 정기적인 문화예술 행사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러한 아트 마켓을 좀처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고, 시장이 열리는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희망시장은 일상적인 장소가 창작과 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희망시장은 이후 아트 마켓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홍대 앞 놀이터가 아닌 실내 한 스튜디오로 장소를 옮겼지만, 예술의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하는 장으로서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살롱 문화 트렌드
2000년대 접어들어 홍대 지역에는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홍대 앞 카페 문화는 다른 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단순히 음료를 마시고 여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라 유사 분야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문화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살롱 문화가 이미 이 시기 홍대 앞에 형성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대개의 카페 내부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언제든지 즉흥 공연 무대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악기와 소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또한 문화예술 분야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리플릿들이 항시 놓여 있었고, 종종 소규모의 프리마켓이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홍대 앞 살롱 문화의 대표적인 공간은 2004년 문을 연 이리(Yri)카페이다. “음악, 미술, 글쓰기, 영화 등 우리는 가리지 않고 존중합니다”라는 모토를 내건 이리카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 전시와 낭독회, 공연,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살롱문화를 확장하고 있다. SNS 발달과 함께 다양한 취향이 세분화되는 현 시점에서 살롱 문화를 지향하는 공간의 힘을 홍대 앞 카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리카페(Yri Cafe)는 홍대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출발했으며 낭독회, 전시회, 연주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2004년 서교동에서 문을 열었고, 2009년 상수동 현재 위치로 이전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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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 문화의 산실
홍대 지역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꼽히는 게 출판 문화다. 이곳에는 대형 출판사를 비롯해 독립 출판사, 디자인 회사들이 밀집해 있으며 지역 사회와 출판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가 형성돼 있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발달한 출판 문화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홍대 앞에 독립 서점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2011년 문을 연 땡스북스는 동네 책방의 원조로 불리는 곳이다. 주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20~30대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다. 서점 주인이 디자이너 출신이어서 독특하고 세련된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땡스북스
미술과 음악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홍대 앞은 1990년대 말부터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광고, 디자인, 만화, 방송, 사진, 영화, 출판, 패션 등 문화 산업 직종들과 전문가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로써 홍대 앞은 복합 문화 지역으로서의 장소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홍대 지역에는 출판사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들이 직접 운영하는 북카페는 단순히 책을 판매하고 독서 공간을 제공하는 기존 북카페와 차별되는 운영 방식과 활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양상도 오늘날 홍대 앞 풍경을 이루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자생적 출판 문화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주출판도시(Paju Book City)는 200여 개의 중소 규모 출판 기업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출판 산업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관의 지원을 받아 조성한 계획적인 출판 산업 단지이다. 반면에 홍대 앞은 문화적 토대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출판 단지가 형성되었다.
홍대 앞은 파주출판도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출판 인력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한때 국내 출판업계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던 문학과지성사(Moonji Publishing Company)와 창비(Changbi Publishers) 사무실도 이곳에 있다. 1970년 창립된 문학과지성사는 1989년 서교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해 지금까지 홍대 앞을 지키고 있다. 1966년 문예지 『창작과비평(Changjak-gwa Bipyeong, Creation and Criticism)』을 발행하며 출판업을 시작한 창비도 파주출판도시에 본사를 두고, 홍대 앞에 서울 사옥(Changbi Seokyo Building)을 마련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중이다. 이 외에도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이 홍대 앞에 밀집해 있다.
1979년 시작된 글벗서점은 오랫동안 홍대 앞을 지켜온 터줏대감 중 하나다. 초기에는 예술 서적 위주로 판매했으나, 현재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취급한다. ⓒ 마포구청
홍대 앞 출판 문화가 파주와 다른 점 또 하나는 지역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와우북페스티벌(Seoul Wow Book Festival)을 들 수 있다. 출판 관계자, 예술가, 시민들이 모여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문화예술 경험을 함께 공유하는 행사이다. 2005년부터 매해 가을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출판사, 저자, 독자 및 지역 주민들을 한데 묶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은 폭넓은 독서 문화를 조성하고, 출판 산업과 문화예술 산업의 부흥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업을 주최하는 사단법인 와우컬처랩(Wow Culture Lab)은 홍대 앞의 수많은 출판사 및 문화예술 단체와 연계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국제 출판 문화 포럼, 지역 도서관 활성화 방안 연구, 직장인 문화예술 교육 등 사업 영역을 점차 다각화하는 중이다.
출판사 직영 북카페
출판사들이 직접 운영하는 홍대 앞 북카페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성지로 통한다. 단순히 자사가 출간한 책 홍보를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대표적인 예로 문학동네(Munhakdongne Publishing Group)의 카페 꼼마(COMMA)가 있다. 국내 굵직한 출판 그룹 중 하나인 문학동네는 2011년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 카페 꼼마 1호점을 연 데 이어 유동 인구가 많은 홍대입구 지하철역 앞에 2호점을 열었다. 현재 두 곳은 사라지고 없지만, 합정동과 동교동에서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문학동네는 이 외에 서울 다른 지역과 수도권에서도 북카페를 운영한다.
2010년대 들어 카페 문화가 정착하면서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북카페가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은 출판사들이다. 도서 판매뿐 아니라 각종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써 독서 문화를 폭넓게 확장시켰다. 사진은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카페 꼼마 합정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 오에 겐자부로가 카페 꼼마에서 독자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황석영(黃晳暎), 한강(韓江), 옌렌커(閻連科) 등 국내외 저명 작가들의 강연이 지속되고 있다. 이곳은 기업의 문화 행사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애용된다.
창비도 2012년부터 카페 창비를 운영 중이다. 이곳은 협업 형태로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2021년부터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브랜드 브라운핸즈(Brown Hands)와 함께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브라운핸즈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으며, 장인들이 만든 가구와 조명 제품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 젊은 층이 즐겨 찾는다.
그런가 하면 문학과지성사는 올해 6월 서교동 사옥 지하층에 문지(文知)살롱(Moonji Salon)을 새롭게 열었다. 이곳은 커피와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카페 공간과 북토크나 강연을 진행하는 이벤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우체국 느낌으로 꾸민 문지 포스트를 마련해 독자들이 작가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길 수 있도록 했다.
독립 서점 붐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 못지않게 홍대 지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독립 서점이다. 홍대 앞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이 아닌 작고 특색 있는 서점이 많다. 이들 공간에서는 대형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립 출판물을 전시하거나 판매한다. 대표적으로 유어마인드(YOUR-MIND)와 땡스북스(THANKSBOOKS)가 있다.
유어마인드는 국내 최초의 독립 출판물 전문 서점으로 알려졌다. 2009년부터 국내 소형 출판사의 독립 출판물과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아트북을 판매하고 있다. 이곳은 출판사도 겸하고 있으며, 매년 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을 개최한다. 초기에는 홍대 앞 작은 갤러리에서 진행했지만,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등 굵직한 전시 공간과 함께할 정도로 성장했다. 유어마인드는 2017년 기존 서교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전했는데, 주말에는 사람이 꽉 찰 정도로 연희동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2009년 출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은 독립 출판물, 아트북 제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축제다. 홍대 지역에 가장 먼저 생긴 독립 서점 유어마인드가 주관하는 행사로, 해외 팀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어 국내외 아트북의 최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 임효진, 언리미티드 에디션
홍대 앞에서 출발해 연희동으로 이전한 유어마인드 내부. 도서 판매뿐 아니라 출판도 병행하고 있으며,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제작한 팬시 상품들도 판매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2011년 오픈한 땡스북스는 주목할 만한 책들을 선별하여 판매하는 큐레이션 서점이다. 책과 관련된 디자인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도 함께 운영한다.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와 함께 개최하는 기획 전시는 인기가 높다. 모든 책을 망라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유어마인드가 소규모 독립 출판물을 유통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데 반해 땡스북스는 대형 출판사가 간행한 책들도 셀렉션에 포함해 책을 다루는 범위가 좀 더 넓다. 하지만 독립 출판물 페어를 개최하거나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여는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운영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지닌다.
최근 들어 홍대 앞뿐 아니라 인근 망원동, 연남동, 연희동 등지에 개성 있는 독립 서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가가77페이지(gaga77page), 서점 리스본(Bookshop Lisbon), 안도북스(AndoBooks), 책방 연희(Chaegbangyeonhui)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범홍대권에는 독립 서점이 굵직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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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인디 음악의 성지
한국 인디 음악은 홍대 지역의 라이브 클럽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홍대 앞에 하나둘 생겨난 라이브 클럽들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선보이는 한편 인디 밴드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또한 동시대 음악인들이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며 국내 음악 신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2023년 10월, 라이브 클럽데이(Live Club Day) 중 클럽 빵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4인조 밴드 다브다(Dabda). 라이브 클럽데이는 티켓 한 장으로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음악 축제이다. 라이브 클럽들과 여러 공연장들이 밀집해 있는 홍대 지역의 특성에서 비롯된 공연 형태이다. ⓒ 인썸니아(indieinsomnia)
“그 더운 여름날에 나완 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었지 / 뜨거운 햇살 어지러운 길바닥 아래 물을 뿌려대는 아이들”
남성 듀오 위퍼(Weeper)의 노래 < 그 더운 여름날에 1996 >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이 곡은 위퍼가 2001년 발매한 앨범 < 상실의 시대 >에 실려 있다. 노래의 배경은 이렇다. 1996년,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인 5월 25일. 위퍼의 리더 이지형(E Z Hyoung, 李知衡)이 ‘나완 다른 세상’이라 묘사한 곳은 홍대 앞 주차장 거리였다. 더 정확히는 그곳에 설치된 무대였다. 무대는 가죽 옷을 입고 체인을 걸치고 머리를 바짝 세운 ‘무뢰한’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음처럼 들렸을 수도 있는 날것의 소리를 ‘작렬’시켰다. 사람들은 그 음악을 펑크라 불렀고, 그날 행사에는 ‘스트리트 펑크쇼’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펑크는 한국에 없던 음악이었다. 1970년대 후반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나 더 클래시(The Clash)의 이름은 한국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 스트리트 펑크쇼 >는 그 무명의 음악이 홍대 앞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생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 이벤트였다. 지하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청년들은 땅 위로 올라와 불특정 일반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관객 중 한 명이었던 이지형도 그날의 경험을 < 그 더운 여름날에 1996 >이란 노래로 만들었다. 의미 있는 파도를 만들어 낸 이날의 행사를 기점으로 1996년은 한국 인디의 원년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라이브 클럽의 시대
< 스트리트 펑크쇼 >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긴 청년들은 당시 드럭(Drug)이라는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1994년 7월 문을 열었다. 처음엔 그저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흔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주기 추모 공연을 열면서부터 공간의 성격이 바뀌었다. 드럭에서는 주기적으로 공연이 열렸다. 공연을 보러 왔던 이들이 몇 달 뒤 무대에 서기도 했다. 5인조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Crying Nut)의 시작도 그랬다.
홍대 앞에는 라이브 클럽들이 속속 생겨났다. 롤링스톤즈[(현 롤링홀(Rolling Hall)], 마스터플랜, 블루데빌(Blue Devil), 스팽글(Spangle), 재머스(Jammers), 클럽 빵(BBang), 프리버드(Freebird) 등 라이브 클럽들이 홍대 앞을 중심으로 신촌을 거쳐 이화여대 후문까지 넓게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중후반 국내 인디의 시작은 곧 라이브 클럽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라이브 클럽들과 인디 신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미디어는 언니네 이발관(Sister’s Barbershop), 허벅지밴드(Herbuxy Band), 황신혜밴드(Hwang Shin Hye Band) 같은 인디 밴드들의 특이한 이름에 먼저 흥미를 보였고, 펑크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현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편 이 시기에 모던 록이라는 장르도 이식됐다. 기존과는 다른 음악을 즐기고 다른 정서를 지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 인디 1세대가 됐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들은 펑크, 모던 록, 힙합 등 각각의 색깔이 있었다. 전자음악에 특화된 곳도 있었다. 라이브 클럽에는 하우스 밴드처럼 해당 클럽 무대에 주로 서는 밴드들이 존재했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No Brain), 위퍼 등이 드럭의 스타였다면 언니네 이발관과 마이 앤트 메리(My Aunt Mary)는 주로 스팽글 무대에 올랐다. 클럽은 자신의 소속 밴드들과 컴필레이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드럭은 < Our Nation >(1996)이란 이름의 스플릿 앨범을 시리즈로 만들었고, 재머스는 < 록 닭의 울음소리 >(1997), 롤링 스톤즈는 < The Restoration >(1998)을 발표했다. 명백히 1990년대 인디 신은 클럽의 시대였다.
클럽 빵 앞에서 공연 목록을 훑어보고 있는 음악 팬들. 1994년 오픈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클럽 빵은 주로 포크 음악이나 모던 록 색채를 지닌 팀들이 무대에 선다. 뮤지션들의 컴필레이션 앨범도 자체 제작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 특별상을 받았다.
스타들의 등용문
2000년대는 레이블의 시대가 됐다. 컴필레이션 앨범의 제작 주체가 라이브 클럽이 아닌 레이블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라이브 클럽에서 하우스 밴드처럼 활동했던 밴드들은 이제 자신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줄 소속사가 필요해졌다. 이는 인디 신이 좀 더 체계적인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에 따라 레이블 역할까지 소화하는 클럽들이 생겨났다. 경영상의 어려움도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클럽과 새롭게 문을 여는 클럽이 생겨났다.
앞에서 언급한 1990년대의 클럽들 가운데 꾸준히 명맥을 잇고 있는 건 롤링홀과 클럽 빵 정도다. 빈자리는 스트레인지 프룻(Strange Fruit), 언플러그드, FF, 제비다방(Jebi Dabang) 같은 새로운 곳들이 대체했다. 신생 공간들이 과거의 라이브 클럽과 온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라이브 클럽이 해 온 등용문 역할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각 클럽은 여전히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자신들의 공간과 어울리는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운다. 얼마 전 클럽 빵에서는 슈게이징 밴드 잠(Zzzaam)이 오랜 공백 끝에 재결성 공연을 가졌다. 재결성 공연 장소로 클럽 빵을 택한 건 이들의 시작에 빵이 있었기 때문이다. 1인 인디 밴드 십센치(10CM)가 스타가 되기 전, 자주 섰던 무대도 빵이었다.
그런가 하면 스트레인지 프룻은 홍대 앞에서도 개성이 강한 음악인들이 선호하는 공연장이고, FF에선 여전히 뜨거운 록의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이제는 몇 만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잔나비(Jannabi)가 몇십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FF에서 공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플러그드는 인디 음악을 테마로 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로, 지하층은 공연장으로 운영된다. 1층 카페에서는 김사월(Kim Sawol, 金四月) 등 이곳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2012년 상수동에 문을 연 제비다방은 예술을 매개로 소통하는 문화 공간이다. 매주 주말에는 관객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가 진행된다. 홍대 앞을 사랑하는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전 세계 음악인들의 교류
현재 남아 있는 라이브 클럽들이 연합해 ‘라이브 클럽데이’를 부활시킨 건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2004년 시작한 ‘사운드데이’를 전신으로 하는 이 행사는 2011년 폐지됐다가 2015년 부활했다. 당시 클럽들이 어려워지면서 이 상황을 함께 헤쳐보자는 취지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이 음악 축제는 라이브 문화를 이끌고 분위기를 조성했다. 초기의 어려움과 달리 지금은 굳건히 자리를 잡아 표를 구하는 게 어려워졌을 정도다. 또 행사 때마다 교류해 온 아시아 지역의 음악인들과 함께 올해 아시안 팝 페스티벌을 연 건 라이브 클럽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음악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있다. 전 세계 어디에도 홍대 앞 같은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홍대 앞처럼 라이브 클럽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흔치 않다는 뜻이다.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홍대 앞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라이브 클럽데이(Live Club Day)가 열리고, 1년에 한 번 잔다리 페스타(Zandari Festa)라는 글로벌 쇼케이스가 개최된다. 홍대 지역의 중심인 서교동(西橋洞)의 옛 지명 ‘잔다리’를 가져다 이름 붙인 이 축제는 해외의 내로라하는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찾는다. 매해 가을 홍대 앞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장에 해외 음악 관계자들이 국내 인디 음악인의 공연을 보고 자신들이 기획하는 행사에 초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서기도 하고, SXSW, 리버풀 사운드시티(Liverpool Sound City) 등에 초대된다.
최근 “밴드 붐은 온다”는 말이 밈(meme)처럼 떠돌고 있다. 일종의 바람이 담긴 말이겠지만, 실제 다시 밴드의 시대가 온다면 그 현상의 절반 이상은 라이브 클럽 덕분일 것이다. 지금 밴드 붐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 그룹인 새소년(SE SO NEON), 실리카겔(Silica GEL), 잔나비, 혁오 등의 시작엔 한결같이 라이브 클럽이 있었다. 그리고 라이브 클럽은 한결같이 늘 홍대 앞에 있었다.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상수역 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의 중간 지점에는 클럽 거리가 형성돼 있다. 라이브 클럽을 비롯해 댄스 클럽과 코미디 클럽 등 각각의 색채가 뚜렷한 공간들이 한데 모여 있다.
2004년 오픈한 클럽 FF는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기, 라이브 공연과 디제잉 파티를 함께 즐길 수 있어 유명해진 곳이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같은 국내 최고의 밴드들이 20년 동안 한결같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인썸니아(indieins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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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동네가 응원하는 동네 잡지
정지연(Jung Ji-yeon, 鄭芝姸)은 올해로 창간 15주년을 맞은 월간지 『스트리트 H(Street H)』의 편집장이다. 홍대 지역의 문화를 다루는 이 잡지는 이곳의 변화무쌍한 풍경을 촘촘히 기록해 왔다. 그녀는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도 다양성, 대안적 삶, 예술성, 자생성 등으로 요약되는 ‘홍대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한다.
정지연(Jung Ji-yeon, 鄭芝姸)은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15년 넘게 일하다가 동네 잡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9년 홍대 앞 문화를 다루는 『스트리트 H』를 창간했다. 그녀는 홍대에 대해 “트렌드를 일으키고 그것을 확산시킬 수 있는 저력을 지닌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 상수동(上水洞)에 자리한 『스트리트 H』의 사무실에는 곳곳에 타블로이드판 잡지와 지역 관련 책자들이 잔뜩 쌓여 있다. 편집부의 오랜 역사가 보이는 듯하다. 정지연 편집장은 홍대 앞 다양한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월 업데이트한 지도,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함께 무가지(無價紙) 형태로 발행한다.
이 잡지는 지난 15년 동안 음악, 미술, 디자인, 출판, 식문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지역의 변화상을 발 빠르게 전하며, 특별한 홍보 없이도 동네 주민과 상점 주인들이 자발적으로 찾아 읽는 장수 매체로 자리 잡았다.
30여 년 전,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동네였던 홍대 앞은 2010년대부터 젠트리피케이션과 상업화의 물결에 휩쓸리며 성장과 쇠퇴를 거듭하고 있다. 이 과정을 오롯이 기록해 온 『스트리트 H』는 홍대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유행의 속도가 빠른 서울에서 동네 잡지를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스트리트 H』는 광고 기반의 상업 잡지가 아니다. 만약 클라이언트나 기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면, 지원이 사라지는 순간 쉽게 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창간 10주년을 넘기면서 지역과 관계가 한층 끈끈해진 이유도 있다. 주민들이 지역 내 소식을 먼저 알려주기도 하고, 동네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의견이 필요할 때는 『스트리트 H』가 나서서 마이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변화를 목격해 온 사람으로서 지난 시절을 복기해 본다면? 나는 2005년부터 2010년 사이를 ‘감성 문화기’라고 정의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행했던 인디밴드 열풍이 잦아들고, 통기타 들고 노래하는 어쿠스틱 뮤지션들이 다수 등장한 시기다. 원목 느낌을 살린 카페라든지 버스킹 공연 같은,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이야기하는 낭만적인 홍대 이미지가 이때 만들어졌다. 축제도 많이 열렸다. 이처럼 홍대 앞에 굵직한 문화적 흐름이 형성되던 2009년 6월, 『스트리트 H』가 창간되었다.
창간 계기는 무엇이었나? 2007년,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뉴욕에서 일 년 정도 머무르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L 매거진(L Magazine)』, 『타임아웃(Time Out)』 같은 로컬 잡지들을 자주 뒤적였는데, 거기 실린 정보들이 참 요긴했다. 문득 한국에서 ‘홍대’를 주제로 잡지를 만들면 어떨까 싶더라. 당시 홍대 앞은 다채로운 문화가 꿈틀거릴 때여서, 이를 콘텐츠로 다루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홍대 지역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큰 변화를 겪은 상권이다. 그 과정을 걱정스럽게 지켜봤을 것 같다. 그렇다. 2010년부터 슬슬 임대료가 올라가더니, 2013년에 관련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2016년쯤엔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그 여파로 홍대 지역이 예전의 동력을 잃은 면이 있다. 예술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댄스 클럽과 포장마차를 중심으로 유흥의 거리로 변모했다. 또한 작고 개성 있는 가게 대신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만큼 대중화되었다는 얘기다.
그 시기에 『스트리트 H』도 로컬 미디어들이 흔히 빠지는 딜레마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드는 잡지가 본의 아니게 젠트리피케이션에 일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연남동(延南洞) 특집’, ‘망원동(望遠洞) 특집’처럼 종종 특정 동네를 앞세운 특별판을 발행했다. 그러나 고민이 깊어지면서 지역을 섹션화하는 기사는 더는 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SNS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인데, 괜히 우리까지 나서서 부동산 업자들이 솔깃해할 콘텐츠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리트 H』는 홍대 지역의 역사와 이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 활동, 그리고 주요 거점들을 기록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로컬 콘텐츠 제작이 드물었던 시기에 첫발을 디뎠던 『스트리트 H』는 이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 잡지가 됐다.
취재 장소를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지역을 만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떤 공간이 지역에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이 확고한 자기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홍대 앞에는 예전에 방송국 PD였던 이가 주인인 카페도 있었고, 라디오 작가가 운영하는 서점도 있다. 이런 재미난 이력을 가진 공간이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간을 꾸려 가는 사례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로우북스(Low Books)는 국책(國策) 기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분이 경주(慶州)에 놀러 갔다가, 한 독립책방에서 영감을 받아 남동생과 함께 연 서점이다. 이곳은 북클럽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이런 곳은 얼마든지 소개할 수 있다. 반면, 타지역 사업을 위한 교두보나 일종의 테스트 베드처럼 보이는 공간은 취재를 피한다. 대형 프랜차이즈 업장도 마찬가지다.
인터뷰 코너를 오래 연재해 왔다. 지금까지 만난 166명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지난해 돌아가신 박서보(Park Seo-Bo, 朴栖甫) 화백이 종종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성산동(城山洞) 근처 작업실로 출퇴근하실 때였는데, 인터뷰 요청을 드려도 답이 없기에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뜸 전화를 하셔서는 “나 박서보인데, 지금 와” 하시는 거다. 내가 사진 기자 핑계를 대면서 내일 가면 안 되겠냐고 하니까 “아니, 내일 오면 나 하기 싫은데”라고 응수하셨다. 그래서 혼자 카메라 들고 찾아갔다. 인터뷰도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최근 박서보재단(PARKSEOBO FOUNDATION) 측에서 당시 인터뷰 사진을 자료로 소장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스트리트 H』는 이제 단순한 잡지를 넘어 공공 아카이브 성격을 띠게 된 것 같다. 잡지 일과 별도로 홍대 앞 아카이빙 소모임 ‘ZINC’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홍대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연도별∙항목별로 정리하는 모임인데,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자료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반면에 2005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의 자료는 제대로 정리된 게 거의 없다. 리서치 과정에서 특정 시기의 사건을 검색하다 보면, 내가 알고 싶었던 정보는 전부 『스트리트 H』에 있더라.
홍대 앞의 변화상을 꼼꼼하게 조사해 사진과 함께 구성한 자료이다. 이런 충실한 노력 덕분에 『스트리트 H』는 홍대 앞에 대한 정보를 가장 풍부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 아카이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정지연 제공
현재의 홍대 지역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흔히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데.“홍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한참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삶의 태도를 만들어 준 곳”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홍대 정신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 10년 넘게 홍대 앞을 지킨 카페 수카라(Sukkara)는 제철 채소나 토종 농산물로 만든 가정식 요리를 선보였던 곳이다.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카페 대표가 만든 농부시장 마르쉐@(Marche@)은 서교동(西橋洞)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다.
과거 홍대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일구었던 사람들의 정신적 자산과 인프라가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예전 같은 문화적 코어는 없을지 몰라도 새로운 실험과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대 주민이라고 들었다. 끝으로 동네 자랑을 한다면?나는 경의선(京義線) 숲길(Gyeongui Line Forest Park) 끝자락에 살고 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는데, 전철이 생기고 공원이 조성되면서 살기 편한 곳으로 바뀌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45분가량 슬렁슬렁 걸어가는 코스가 참 좋다. 2000년대 들어 사람들이 굉장히 중시하게 된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가 자연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흐름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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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다양성이 공존하는 홍대 문화의 생태계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대 앞은 일반적인 대학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 실험과 도전이 모색되었다. 그 과정에서 홍대 지역은 ‘홍대 문화’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며 외부적 환경 변화에 끊임없이 대응하고 있다.
홍대 앞은 과거 기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었다. 폐선된 철길은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철둑길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섰던 건물들은 ‘서교365’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건물들에는 개성 있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홍대 앞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독특한 대학 문화와 청년 문화가 있다. 이곳에서는 미술과 음악, 연극, 영화, 퍼포먼스 등 전방위적 예술 활동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또한 디자인, 만화, 출판, 광고, 패션, 디지털 콘텐츠 등 전문 업종도 밀집해 복합 문화 지역으로 성장해 왔다.
한마디로 홍대 지역은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들의 놀이터다. 거리 곳곳에 개성 있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지닌 대학생, 예술가, 클러버, 문화 기획자와 예술 경영인, 힙스터들이 활보한다. 이곳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홍대 앞 곳곳에서는 거리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버스킹 문화가 형성됐으며,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훗날 유명해진 아티스트들도 많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범홍대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서울 상수동(上水洞)에 소재한 홍익(弘益)대학교 주변의 번화가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연대(연세대학교) 앞’이나 ‘이대(이화여자대학교) 앞’ 등 여느 대학가처럼 처음에는 ‘홍대 앞’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는 순전히 홍익대학교를 기준으로 한 지명이다.
1984년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이 개통되면서는 ‘홍대 입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시가 서울 전역에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이 시기 홍대 앞에 걷고 싶은 거리 구간이 조성되고부터는 ‘홍대 거리’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이렇게 홍대 앞은 세월이 흐르면서 지칭하는 말도 다양해지고, 각 명칭이 포괄하는 장소도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최근에는 ‘홍대 지역’이라는 말도 쓰인다.
‘홍대’가 함의하는 지리적 범위의 확장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지하철이다. 2000년도 이후 지하철 6호선, 공항철도(Airport Railroad), 경의중앙선(Gyeongui-Jungang Line)이 차례로 개통하면서 홍대 지역은 홍대입구역(2호선, 공항철도, 경의중앙선)과 합정역(2호선, 6호선), 상수역(6호선)을 잇는 서울 최대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행정 구역으로 보면 기존 서교동, 상수동, 동교동에서 인근 연남동, 연희동, 합정동, 망원동, 성산동까지 폭넓게 아우르게 되었다.
홍대 앞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연세대학교 앞을 중심으로 하는 ‘신촌권’에 속했지만 이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며 성장했고, 현재는 ‘범홍대권’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진은 어울마당로 초입으로, 홍대 상권의 출발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근방에 밀집해 있다. 이곳에 관광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200미터 남짓 위쪽으로 걸어가면 홍익대학교 정문이 나온다.
옛 철길의 흔적
한강변에 위치한 서울화력발전소는 홍대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문화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발전소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일반적으로 당인리(唐人里) 화력발전소라 불리는 이곳은 1930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발전 시설로, 한 해 전 개통된 당인리선(Danginri Line)을 통해 석탄과 물자를 공급받았다. 발전소 연료가 석탄에서 가스로 대체되자 더 이상 철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80년 당인리선이 폐선되었다.
‘서교365’는 당인리선이 남긴 흔적이다. 기차가 운행되지 않으면서 폐선된 철길은 도로와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일부 구간에는 2~3층짜리 낮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부지가 협소하다 보니 2~5미터 폭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상이 연출되었다. 약 200미터가량 가늘고 길게 이어진 이 건물군이 서교365이다. 건물들이 서교동 365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어 이런 명칭이 붙었다.
서교365는 주변의 말쑥한 고층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허름한 건물들을 둘러싸고 철거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옛 자취를 소중히 여기는 인근 상인들과 건축가들의 노력으로 아직까지는 보존되고 있다. 개성 있는 식당과 선술집,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경관이 지닌 매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당인리선이 지나갔던 길은 무허가 건물들이 헐리고 고급 카페와 술집, 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상권으로 변모했고 홍대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홍대입구역 7번 출구부터 상수역 방향으로 약 2㎞가량 뻗어 있는 이 길의 현재 공식 도로명은 ‘어울마당로’이다. 지난해에 마포구청이 이 길을 관광 특화 거리로 재정비하면서 ‘레드 로드(red road)’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였다.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건축가 조민석(Minsuk Cho)이 이끄는 매스스터디스(Mass Studies)의 설계에 따라 현재 리모델링 중인데, 2026년 전시실과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경의선숲길은 일반적인 공원과 달리 도심을 가로지르며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6년 옛 철길에 조성되었으며, 서울의 대표적 산책로이자 휴식처로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마포구청
홍대 문화의 출발
인디와 대안, 언더그라운드로 요약되는 홍대 문화는 1955년 홍익대학교의 상수동 이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홍익대 미대의 존재는 1970-80년대 이 지역의 정체성을 결정 지은 원동력이다. 이 시기에 작업실, 미술 학원, 공방, 미술 전문 서점, 스튜디오, 갤러리 등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미술 학원은 미대생들의 작업실에서 시작하여 학원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6년경 홍익대에서 산울림 소극장까지 이어진 길 양쪽으로 입시 전문 대형 미술 학원 거리가 생겨났다. 무수히 들어선 미술 학원들은 홍대 앞 특유의 풍경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이후 홍익대 미대가 실기 시험을 폐지하면서 미술 학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홍대 지역이 사회적 관심을 받으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포스트 모던 양식의 고급 카페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던 거리에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테마 카페와 복합 갤러리가 등장하면서 자유롭고 세련된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들도 늘어났다. 홍대 정문에서 극동방송국과 주차장 거리에 이르는 길 주변에 카페 골목이 형성되면서 이 일대는 ‘피카소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소비 문화가 확산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1993년부터 홍익대 미대생들이 시작한 ‘거리 미술전(Street Art Exhibition)’은 홍대 문화의 정체성과 건강한 대학 문화를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대응이었다. 매년 담벼락 곳곳에 벽화 그리는 행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벽화 거리’가 조성되었다.
홍대 클럽 거리에는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이곳에서 일어난 인디 뮤직 신을 주도했던 라이브 클럽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클럽 FF도 그중 하나. ‘록 음악 맛집’으로 통하는 이곳은 크라잉넛(Crying Nut)이나 서울전자음악단(Seoul Electric Band) 같은 록 밴드들이 무대에 선다.
획일성에 대한 저항
홍대 지역에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라이브 클럽들이 생겨나며 지역 문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클럽 문화는 기존에 형성돼 있던 미술 문화와 새롭게 나타난 소비 문화가 결합하며 탄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에 생긴 카페 ‘발전소’다. 이곳은 음악 작업을 하던 가게 주인의 작업실에서 출발해 바(bar)로 발전했으며, 댄스 클럽의 원형이 되었다. 1994년에는 드럭(Drug)을 필두로 실험적, 도전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라이브 클럽들이 성행했다. 클럽은 대안적인 놀이 문화를 찾던 이들의 해방구였다. 2000년대부터는 클럽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들 클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축제들이 개최되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문화 지역으로 성장한 홍대 앞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서 문화 관광 지역으로 그 정체성이 전환되었다. 이로써 홍대 문화는 소수의 마니아들이 즐기던 문화에서 대중화, 관광 상품화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도 나타났다. 임대료 상승으로 폐관 위기에 처한 소극장이나 철거 위기에 놓인 공연장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한국실험예술제, 와우북페스티벌 등 다양한 분야의 언더그라운드 축제들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많은 문화 공간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홍대 문화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에도 홍대 문화는 상업적 획일화에 저항하며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문화적 저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 생산자들이 끊임없이 홍대 문화 생태계를 다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로 인해 ‘홍대다움’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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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도시를 숨 쉬게 하는 공원
서울숲은 성수동에 또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2005년 개장한 이곳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조성한 국내 최초의 공원이다. 35만 평 부지에 문화예술공원, 체험학습원, 생태숲, 습지생태원 등 네 가지 특색 있는 테마로 구성되었으며, 지역의 생태 및 지리적 특성이 잘 반영되어 도심 속 대표적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조성된 서울숲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 모양이다.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문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도심 속 여유로운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 서울연구원(The Seoul Institute)
서울숲은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조성되어 있다. 서울숲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쪽 꼭짓점이 꼬부라진 삼각형 모양이다. 모서리를 따라 흐르는 녹지띠가 주변을 감싼 도로의 소음과 오염 물질을 막아주겠다는 듯 높게 서 있다. 그 삼각 녹지의 내부는 밀도가 각기 다른 숲이 채운다. 도심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간선도로, 강과 바투 붙은 지리적 특성에서 엿볼 수 있듯 서울숲 부지는 과거부터 활용도가 높은 땅이었다.
도시형 공원
서울숲이 자리한 부지는 조선(1392~1910) 시대에는 왕실의 사냥터였다. 1908년에는 국내 최초로 정수장이 설치되어 주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했다. 이후 골프장, 경마장, 체육공원 등 여러 용도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1990년대 들어 이곳을 주거 및 업무 지역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공원이 부족한 서울 동북부 지역의 시민들에게 도심 속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계획이 실행되었다. 2003년, 서울숲 조성을 위한 설계 공모가 시작됐고, 2005년 6월 마침내 35만 평 규모의 서울숲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서울숲의 봄 풍경. 지천에 피어 있는 튤립들이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 서울시
서울숲은 일반적 형태의 근린공원을 넘어 뉴욕 센트럴파크나 런던 하이드파크처럼 서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도시 숲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서울숲 설계 공모에 당선된 동심원(同心圓)조경기술사사무소(Dongsimwon Landscape Design & Constructions)는 이곳이 자연의 영역을 넘어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그 결과 문화예술공원, 자연생태숲,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등 네 개 테마 공간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수변공원이 조성됐다.
휴식의 공간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숲에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서울숲역 4번 출구로 빠져나와 색색의 컨테이너로 구성된 공간 플랫폼 언더스탠드 에비뉴(Understand Avenue) 사이로 들어서면, 서울숲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 경마장이었던 이곳은 방문객들이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초입 광장에는 경마장을 기념하는 군마상이 있는데, 역동적인 말의 모습이 뒤편의 활력 넘치는 바닥분수와 잘 어우러진다. 공원 깊숙한 곳에 물놀이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이 바닥분수는 입구와 가까워서인지 여름철 어린아이들의 물놀이 공간으로 사랑받는다. 날이 더워지면 분수 주위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는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면 물놀이객을 위한 간이 탈의실이 설치되기도 한다. 반면 바닥분수 뒤편으로 뻗은 거울연못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거움을 준다. 수심이 얕은 이 연못에는 주변 나무들이 수면에 비쳐 깊은 산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목마른 새들이 잠시 내려앉아 물을 마시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서울숲 초입에 위치한 거울연못은 수심 3㎝의 얕은 연못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을 비롯해 주변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 서울연구원
나무의 행렬이 흐트러지고 일직선이었던 길이 부드럽게 휘어지기 시작하면 넓은 녹지가 나타난다. 가족마당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풍나무, 메타세쿼이아 등 키 큰 수목들이 길을 따라 하늘로 쭉쭉 뻗은 산책로에 둘러싸여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잔디밭은 도시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포장해 온 음식을 펼쳐놓고 먹는가 하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낮잠을 즐기고, 자전거를 타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 시간을 보낸다. 밤이면 미니 스크린을 펼쳐놓고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다. 서울숲에서 강아지들이 가장 많이 뛰노는 공간이기도 하다. 재즈 페스티벌 같은 큰 축제도 주로 이곳에서 열린다.
거울연못 대각선 방향에 자리한 야외 무대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이곳은 탁 트인 분지 형태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어 문화예술 행사들이 자주 진행된다. ⓒ 윤준환(Yoon Joon-hwan, 尹晙歡)
보존을 위한 노력
자연생태숲은 서울숲의 가장 깊숙한 안쪽 공간에 자리한다.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는 서울 근교의 울창한 숲을 본떠 비슷한 수종을 심고 밀도를 조정해 야생의 자연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서울숲 규모가 꽤 크다 보니 입구 부근만 둘러보고 돌아가기 일쑤인데, 자연생태숲에 와본 이들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져 있는 데 감탄하며 거듭 방문하곤 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바로 꽃사슴 방사장이다. 긴 철조망 너머의 보호 구역에는 꽃사슴 십여 마리가 자유롭게 뛰놀며 살고 있다. 꽃사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들은 서울숲의 공중을 가로질러 한강 고수부지로 연결되는 전망 보행교에 오른다. 사슴은 물론 오랜 시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원시림처럼 울창해진 숲을 볼 수 있다. 주변으로는 벚꽃이 많이 심겨 있어 꽃이 피는 봄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은 서울숲에서 가장 높은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의 진가는 가을에 확인할 수 있다. 가득 자란 억새들이 미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계절의 고즈넉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삼각형 모양 부지의 또 다른 모퉁이에는 기존 유수지를 활용해 만든 습지생태원이 있다. 이 유수지는 과거 홍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맡았다. 폭우가 내려 한강이 범람하면 유수지가 그 빗물을 흡수해 큰 수해를 방지하며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수지 시설 중 몇몇 기둥을 남겨두었는데, 여름이면 기둥을 타고 오른 덩굴이 장관을 연출한다. 습지생태원은 기존 유수지의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목재 관찰 데크를 놓아 새와 습지 식물을 관찰하게 해놓았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의 생태 학습을 위한 체험학습원은 폐쇄된 정수장 시설을 개조해 조성되었다. 특히 침전조 구조물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한 갤러리 정원은 매우 아름다워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벽체와 더불어 보존된 U형 수로에 흙을 채우고 덩굴 식물을 심은 덕분인데, 여름이면 잎이 피어나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다.
서울숲의 여름 풍경. ⓒ 서울시
시민 참여 공원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숲과 공원은 분명히 다르다. 숲이 그대로의 자연이라면, 공원은 자연은 물론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 녹지다.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주변의 문화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는 공원은 도시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서울숲은 그러한 면에서 주목할 지점이 많은 공원이다.
서울숲은 시민들이 계획, 조성, 관리 및 운영 전 과정에 참여한 국내 최초의 공원이다. 계획 과정에서는 워크숍 및 공청회 등을 통해 전문가들과 각계각층의 의견을 반영했으며, 조성 과정에서는 시민들이 기금을 모으고 수만 그루의 나무들을 직접 심었다. 그 중심에는 2003년 출범한 서울그린트러스트(Seoul Green Trust)가 있다. 이곳은 시민 참여를 바탕으로 서울시 생활권 녹지를 확대 및 보존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만드는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서울그린트러스트는 개장 당시부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서울숲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2016년부터 2021년까지는 서울숲을 수탁 운영하기도 했다.
이 기관이 서울숲에서 벌인 다양한 활동은 시민 참여를 통한 공원 관리의 지속 가능성 확보, 주민 참여 프로그램의 내용과 취지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2020 아시아도시경관상 본상을 받았다. 민간 공원 경영의 첫 모델로 그 성과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서울숲의 영향력은 공원 내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원이 위치해 있는 성수동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공공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공원을 만들기 위해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한편 소셜벤처가 밀집해 있는 인근의 특징을 고려해 체인지 메이커들이 서울숲을 즐겁게 향유할 기회도 마련했다. 서울숲은 수제화 제작 등 경공업이 몰려 있어 낙후 지대로 불리던 성수동의 표정을 변화시키며, ‘성수동에 가고 싶은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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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의미와 이유가 있는 변화
김재원(Kim Jae-won, 金才媛) 대표는 브랜드 설계와 컨설팅을 업으로 하는 기획 집단 아틀리에 에크리튜(Atelier Écriture)를 이끌고 있다. 2014년 성수동에 복합문화공간 자그마치(Zagmachi)를 열었으며, 이후 10년간 개성 넘치는 공간들을 운영하거나 기획하면서 이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카페 자그마치(Zagmachi)는 기존 인쇄 공장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서 내부를 리모델링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강연이나 전시, 팝업 이벤트를 진행해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했다. 아틀리에 에크리튜 제공
적막한 공장 지대였던 성수동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모했다. 골목골목 줄 서는 맛집과 카페가 즐비하고,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를 비롯해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대형 패션 편집숍들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한정된 기간 열렸다가 사라지는 기발한 콘셉트의 팝업 스토어들은 행인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김재원 대표는 공간 콘텐츠를 통해 성수동의 표정을 바꿔 온 기획자이다. 그 시작은 황량한 거리에 문화의 온기를 불어넣은 복합문화공간 자그마치였다. 이후 F&B 공간 오르에르(Orer, 2016)로 성수동 카페 투어족을 불러 모았다. 물건의 선택과 진열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소품 편집숍 W×D×H(2017)와 오르에르 아카이브(Orer Archive, 2018)는 카페밖엔 갈 데가 없었던 초기 성수동에서 귀한 콘텐츠였다.
어른들을 위한 과자점 오드 투 스위트(Ode to Sweet, 2019), 그리고 공간 플랫폼 LCDC 서울(2021)은 성수동의 리테일 신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다. 2022년에는 기존 오르에르 자리에 문구점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를 새롭게 선보였다. 창작자들을 위한 도구를 제안하는 이 공간은 성수동에서 꼭 들러 봐야 할 앵커 매장으로 오늘도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김재원 대표가 이른바 ‘성수동 개척자’로 통하는 이유다. 그녀가 작업한 공간들을 보면 그러한 평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틀리에 에크리튜의 김재원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개성 있는 콘텐츠로 성수동의 리테일 신을 풍부하게 만들어 왔으며, 그러한 이유로 ‘성수동 개척자’라 불린다.
성수동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다. 변화를 느끼는가?
과거에는 모든 게 지금과 달랐다. 성수동에는 인쇄소가 즐비해 종이를 싣고 다니는 지게차가 자주 지나다녔고, 자동차 정비소들도 많아 슈퍼카가 거리를 채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 처음 이곳에 자그마치를 열었을 때 직원들이 밥 먹을 만한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백반집에 장부를 써 두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 보니, 그 가게들이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더라.
지나간 시간을 가장 실감할 때는 이웃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다. 포인트오브뷰 옆에 있었던 미용실이 없어진 지는 오래고, 오르에르에서 낼 케이크를 위해 반죽기를 제작했던 맞은편 기계 공장도 얼마 전 자취를 감췄다.
성수동이 왜 이렇게 뜨거워진 걸까?
성수동만의 매력이 있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준공업 지대다. 산업은 쇠퇴했어도 건물 마감재로 사용된 붉은 벽돌이라든지 시원한 파사드처럼 공장 지대 특유의 독특한 감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존 용도와 다른 콘텐츠로 공간이 운영되어도 이러한 스케일과 감도는 다른 동네에서 느끼기 어렵다.
지정학적 이점도 있다. 성수동은 강남과 접근성이 좋다. 또한 건국대학교, 세종대학교, 한양대학교 등 인근에 대학을 3개나 끼고 있다는 점에서 젊은 문화가 유입되기 좋은 편이다.
‘성수동 개척자’로 불리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첫 깃발을 꽂았다는 점에서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그마치를 냈던 성수이로(聖水二路)와 오르에르가 위치했던 연무장(演武場)길이 점차 유명해졌고, LCDC 서울이 문을 열고 나서는 동(東) 연무장길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우표, 티켓, 전단지, 청구서 등 일시적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종이 아이템들을 벽면에 장식한 카페 이페메라 내부. 고전적 디자인과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잔잔한 감흥을 선사한다. 아틀리에 에크리튜 제공
성수동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런던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스트 런던이 개발되는 걸 목격했다. 낙후된 지역에 아티스트들이 들어와서 다양한 문화가 자생하던 시점이었는데,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동네가 확 살아났다. 서울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점, 개발이 안 됐다는 점에서 나는 성수동이 이스트 런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건국대학교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가르칠 때도 예술디자인대학 학생들이 멀리 서쪽의 홍대까지 가서 노는 게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성수동에는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이 없었다. 당시 국내에 스페셜티 커피가 퍼지고 있었는데 그 커피를 맛보려면 홍대나 이태원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자그마치를 열게 되었다.
자그마치에 대해 성수동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평이 많았다.
인쇄소를 개조해 만들었는데, H빔 등 기존 설비를 그대로 살리거나 버려져 있던 물품들을 소품으로 활용해 지역색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디자인했다. 당시만 해도 100평이 넘는 큰 규모의 카페는 서울 시내에 거의 없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아티스트나 디자이너 같은 트렌드를 리딩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손님들 중 재미있는 분을 강사로 모시는 ‘손님의 발견’이나 아마추어 과자 아티스트들의 장터였던 ‘과자전’ 같은 이색적인 기획도 많이 했다.
오르에르를 오픈할 무렵에는 성수동이 이전보다 활기를 띠게 된 것 같다.
그 시기에 대림창고, 어니언 등 성수동의 유명한 카페들이 거의 동시에 오픈했다. 경쟁자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시너지가 생겼다. 성수동에 가면 뭔가 특별한 공간들이 있다는 입소문에 버스를 대절해서 카페 투어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오르에르에서 사용하는 접시나 커트러리, 기물 같은 걸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라이스프타일 숍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점이다.
주택과 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오르에르는 가정집 정원을 연상시키는 고즈넉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유명해진 공간이다. 2022년 문을 닫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남았다. 아틀리에 에크리튜 제공
현재 포인트오브뷰의 전신을 그때 구상한 것인가?
오르에르에 나뭇가지나 돌멩이를 주워다 장식한 적이 있는데, 그걸 사가겠다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나서 난감했다. 그때 사람들이 물건이 아닌 안목을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큐레이션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르에르 아카이브를 열었고, 문구를 워낙 좋아해서 포인트오브뷰를 시작했다.
복합문화공간에서 F&B, 라이스프타일 숍으로 이어지는 공간 기획은 성수동의 변화와 성장에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
개성 있는 브랜드가 계속 살아남아야 동네의 생명력이 유지된다. 성수동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The Sims)처럼 이곳에 재미있는 걸 계속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막연히 ‘그냥 해볼까?’는 없었다. 그때그때 의미와 이유가 있었고, 모두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흐름도 잘 탔다. 마침 인스타그램이 생기면서 잘 기획된 스몰 브랜드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도 갖춰졌다.
작업한 공간들이 모두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브랜드에도 문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테리어나 공간에 흐르는 음악, 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는 이런 말투를 썼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디테일을 치밀하게 정립한다. 나는 이렇게 정립해 놓은 캐릭터를 상황에 맞게 계속해서 만져 간다. 브랜드나 공간도 돌처럼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생물처럼 움직인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피봇팅을 잘해야 진짜 ‘완성도’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다 보면 기획의 실마리가 생긴다.
앞으로 또 어떤 공간을 내고 싶은가?
새로운 브랜드 론칭보다는 포인트오브뷰의 다른 버전을 시도해 보고 싶다. 기존 콘셉트는 유지하면서 공예에 가까운 물건들만 모아둔다든지 혹은 종이나 도자기만 큐레이션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문구점 포인트오브뷰 내부 모습. 김 대표는 ‘문구는 이야기를 가공하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라는 생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각종 문구류와 오브제를 섬세하게 큐레이션했다.
성수동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코스를 추천해 달라.
성수동 일대를 산책하듯이 천천히 돌아보길 권한다. 지금 성수동에는 엄청나게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기획이 잘된 팝업 스토어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체험 요소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 리스트를 뽑아 두고 하나씩 둘러보면 좋겠다.
그리고 사이사이 성수동의 랜드마크를 하나씩 둘러보면 어떨까? 포인트오브뷰, 메쉬커피, 아시아 음식점 플레이버타운, 수제 맥주 양조장 서울브루어리, 패션 브랜드 아더에러의 플래그십 스토어, LCDC 서울 같은…. 비교적 오랫동안 운영되어 온 곳들과 금방 사라지는 팝업 스토어를 고루 둘러보는 게 지금의 성수동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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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국내 소셜벤처의 산실
2010년대 중반부터 소셜벤처와 관련된 기관, 단체들이 성수동에 모이면서 이 지역에는 민간 주도를 통한 소셜벤처 밸리가 형성되었다. 국내 소셜벤처의 명실상부한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성수동은 과거 준공업 지대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롭고 활기차게 변신 중이다.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가 운영하는 헤이그라운드 전경. ‘커뮤니티 오피스’를 표방하는 이곳은 성수동에 소셜벤처 클러스터가 형성되는 데 한몫했다. 루트임팩트 제공
“전세 사기 예방은?”
“기후 위기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성수동 한복판에 자리한 코워킹 오피스 헤이그라운드(Heyground) 1층 로비 게시판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이 건물에 입주해 있는 소셜벤처의 체인지 메이커들(Changemakers)이 적어 놓은 것들이다. ‘체인지 메이커’는 사회∙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의 관심사는 건강한 삶, 공평한 교육 기회, 기후 변화, 지속 가능한 도시, 양질의 일자리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저녁 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혁신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밤에도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 헤이그라운드를 ‘성수동의 등대’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클러스터의 시작
현재 성수동에는 소셜벤처 창업과 육성, 성장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관과 단체들이 한데 모여 있다. 2002년 설립되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소셜벤처 창업 집단으로 알려진 크레비스(Crevisse)를 비롯해 2008년 창립된 국내 최초의 임팩트 투자사 소풍벤처스(Sopoong Ventures)가 성수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액셀러레이터 기업 임팩트스퀘어(Impact Square) 등 굵직한 기업들도 이곳에 자리한다.
성수동에 소셜벤처 클러스터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2010년대 중반으로, 그 중심에는 ‘커뮤니티 오피스’를 표방하는 헤이그라운드가 있다. 이곳은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Root Impact)가 운영한다. 사회 곳곳의 체인지 메이커들을 발굴하고 이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다. 루트임팩트의 허재형(Johan Jaehyong Heo) 대표는 2022년 ‘오바마 아시아 태평양 리더(Leaders Asia-Pacific)’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바마 재단은 “육성 프로그램에서 제도 개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회적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헤이그라운드는 커뮤니티 오피스라는 공간의 목적을 고려해 인테리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각 층을 계단형 라운지로 연결한 것도 입주자들의 원활한 커뮤니티를 위해서다. 사진은 헤이그라운드 1호점에 입주한 체인지 메이커들이 6층과 7층을 연결하는 라운지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루트임팩트 제공
루트임팩트는 2017년, 성수동에서 가장 번화한 연무장길 근처에 헤이그라운드 1호점을 마련했다. 2년 후에는 서울숲 인근에 2호점을 추가로 열었다. 여러 업체들이 들어와 내부 시설을 함께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유 오피스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기존 공유 오피스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우선 헤이그라운드는 공간을 완성한 뒤 입주 업체를 모집하는 일반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구상 단계부터 입주 예정인 단체들을 모아 공간을 함께 설계했다. 국내 소셜벤처 업계를 이끌어 가는 20여 개의 기업들이 이 과정에 참여했다. 한편 이곳에 들어오고 싶은 기업은 심층 인터뷰와 내부 심사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루트임팩트가 코워킹 오피스를 마련한 이유는 사회적 가치 실현에 도전하는 소셜벤처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각자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 경험이 공유되고 시너지가 창출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트임팩트는 이러한 공간을 만들 장소로 서울 시내 몇 개 지역을 검토했으며 적정한 토지 가격, 접근성, 지역적 특성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성수동을 낙점했다.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성수동의 분위기가 활기차고 개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도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네트워크 형성
헤이그라운드가 성수동에 자리를 잡을 즈음 때맞춰 소셜벤처의 성장을 지원하고 투자하는 이들이 이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더해 정부와 지자체까지 가세하면서 성수동은 준공업단지라는 과거의 역사를 뒤로하고 소셜벤처 밸리로 새롭게 변모하게 되었다.
성수동 관할 성동구청은 2017년부터 매년 사회 혁신을 꿈꾸는 소셜벤처 기업의 성과를 공유하고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엑스포를 개최한다. 지난해 서울숲 일대에서 열린 ‘서울숲 소셜벤처 엑스포’는 청소∙환경, 교육∙돌봄, 제조∙유통, 문화∙예술, 인쇄∙출판 분야의 160여 개 소셜벤처가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이 행사에서는 특히 장애인 이동권 개선을 주제로 한 기업의 사례 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이와 관련해 방문객들은 전시 체험존에서 휠체어 동력 보조 장치,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전용 내비게이션,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장애인 택시 등 소셜벤처 기업들의 아이디어가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성동구청은 2018년 성수동에 소셜벤처 허브센터를 세우고, 이곳을 거점으로 각종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편 서울시는 2020년 기존의 ‘성수 IT 종합센터’를 ‘서울창업허브 성수’로 개칭하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소셜벤처를 지원 중이다. 입주 기업에 사무 공간 제공 및 맞춤형 액셀러레이팅, 사업화 등 기본적인 지원과 함께 다양한 네트워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소셜벤처가 성수동으로 집결한 데는 네트워크 안에 속하고 싶은 심리도 영향을 끼쳤다. 네트워크에 속해 있을 때 정보 교류와 협력을 통해 더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헤이그라운드를 위시해 KT&G가 운영하는 상상플래닛(KT&G SangSang Planet) 같은 플랫폼도 성수동 소셜벤처 밸리 형성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KT&G 상상플래닛은 소셜벤처의 성장과 교류를 돕는 플랫폼으로, 업무 공간 제공뿐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이들을 지원한다. 사진은 입주 기업 구성원들의 심신 건강을 위해 운영하는 웰니스 프로그램. ⓒ KT&G 상상플래닛
체인지 메이커들은 이런 플랫폼들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이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며, 그 덕분에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쳐낼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예컨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 제대로 공부하기 힘든 아이들을 위해 학습용 콘텐츠를 만드는 글로벌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Enuma)는 헤이그라운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소셜벤처와 교류해 정보를 얻고 우리만의 정체성도 만들 수 있었다. 소셜벤처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헤이그라운드의 지지와 지원 덕분이다.”
돌봄 서비스 플랫폼 사업을 펼치는 예비사회적기업 째깍악어(Tictoccroc)도 “4명으로 시작해 구성원 70여 명으로 성장하기까지 우리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헤이그라운드가 물과 영양분을 줬다”고 말했다.
미래를 위한 과제
한국에서 소셜 임팩트 생태계가 태동한 시기는 2000년대이고, 본격적인 성장은 201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 성장을 견인한 주인공들은 헤이그라운드를 비롯해 성수동 소셜벤처 밸리를 형성하고 있는 단체와 기관들이다. 특히 성수동 소셜벤처 밸리는 민간 주도로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또한 문화와 예술, 스타트업이 결합해 지역이 변화한 사례는 많지만, 소셜벤처를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고민해 왔다는 점은 성수동만의 특별함이다. 2014년쯤 성수동엔 약 40개 정도의 비영리 단체와 사회적기업이 있었지만, 소셜 임팩트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2016년 153개였던 관련 기업과 단체가 2022년에는 525개로 많이 늘어났다.
코워킹 오피스들은 대개 공간 구조부터 가구에 이르기까지 입주자들의 창의적인 협업을 돕는 장치들을 세심하게 마련한다. 사진은 2016년 서울특별시건축상(Seoul Architecture Awards) 우수상을 받은 코워킹 플랫폼 카우앤독(CoW and DoG).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되 개방형 공간으로도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 진효숙(Chin Hyo-sook, 陳孝淑)
그러나 이제 초기 성장기인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도 많다. 지난해 9월 성수동 일대에서 벌어진
는 컬처 테크놀로지, 아트, 음악, 게임, 패션 등 다양한 주제로 열린 축제이다. 이 행사의 키노트 스피치 세션에서는 지난 10년간 빠르게 변화해 온 성수동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미래에 대한 우려 또한 거론되었다. 성수동이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를 기반으로 스타트업의 성지로 거듭나긴 했지만, 이곳 역시 큰 지가 상승폭을 기록하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또한 임대료 상승과 상업화는 이곳에 둥지를 튼 소셜벤처들이 꿈꾸는 지속 가능성과 상충된다.
그런 맥락에서 소셜벤처의 생태계를 넘어 소셜벤처 커뮤니티를 이루는 2.0 단계를 고민할 시점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지속 가능한 지역 커뮤니티 개발은 성수동의 소셜벤처들이 다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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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팝업 스토어의 성지
오프라인 상점들이 불황을 겪고 침체에 빠졌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성수동은 오히려 도약할 수 있었다. 팝업 스토어 덕분이다. 이곳에서는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팝업 스토어가 끊이지 않는다. 패션, 미술, 음악, 라이프스타일 등 콘텐츠도 다양하다. 이제 팝업 스토어는 성수동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2023년 성수동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 중 하나인 버버리의 성수 로즈(Seongsu Rose) 전경.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리의 첫 컬렉션으로 구성된 이 팝업 스토어는 외관과 내부를 장미 문양으로 화려하게 꾸며 큰 볼거리를 제공했다. ⓒ 버버리코리아
성수동은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인파로 거리가 빼곡하다. 그중 상당수는 팝업 스토어에 방문하려는 사람들이다. 입장을 위해 길게 늘어선 행렬이 성수동 곳곳에서 자주 목격된다.
팝업 스토어는 웹페이지의 팝업 창처럼 단기간 운영됐다가 사라지는 오프라인 매장을 말한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6개월까지도 운영된다. 서울 시내 유명 상권들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 번화가에서 흔히 열리는데, 유독 성수동의 팝업 스토어가 주목받는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성수동 팝업 스토어 목록이 활발히 공유된다. 게시물 댓글에선 친구를 태그하며 “이번엔 여기 가자!”고 제안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성수동의 매력
수많은 브랜드들이 팝업 스토어를 열기 위해 성수동을 찾는 건 이곳이 현재 서울에서 가장 주목받는 상권이기 때문이다. 우선 지리적 특성이 남다른데, 서울숲과 뚝섬 한강공원을 끼고 있어 자연 친화적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핫플레이스와 큰 차이점이다. 또한 서울 어디로든 이동하기 쉽고, 외곽으로 빠져나가기도 좋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상업 시설과 고급 아파트들도 분포해 있다. 수요층까지 뒷받침되는 셈이다. 또 강남대로나 청담동(淸潭洞), 압구정동(狎鷗亭洞) 등 강남권에 비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다.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도 흡인 요인이다. 성수동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 레미콘 생산 시설이 있었던 공업 지역이었다. 철공소, 인쇄소, 자동차 정비 공장을 비롯해 구두 공장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곳들이 파산했고 동네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 이 지역의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저렴한 임대료, 공업 지역의 색다른 분위기에 끌린 젊은 사업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다. 이들은 공장과 창고를 개조해 카페와 식당, 편집숍 등을 만들었고 특색 있는 매장이 늘어나면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성수동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성수동으로 모이면서 유통업계도 이곳을 주목하게 됐다. 온라인 쇼핑몰만 운영했던 브랜드들도 성수동에 팝업 스토어를 열어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수동에는 공장과 창고로 사용되던 넓은 평수의 건물들이 많기 때문에 스케일이 큰 팝업 스토어를 구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휴양지 리조트 콘셉트로 운영된 음료 브랜드 클룹(CLOOP)의 제로소다 팝업 스토어. 투어 미션을 완료한 참가자들에게 어메니티 키트를 증정하는 한편 인력거를 타고 성수동 반경 1km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다.
공간 플랫폼들
팝업 스토어는 성수동이 막강한 신흥 상권으로 부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성수동에선 통상 일주일 동안 팝업 스토어 50여 개가 열린다. 인기 있는 대관 장소는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쉽고 면적이 넓은 곳이다. 그중 성수동과 건대입구역 사이에 위치한 커먼그라운드(COMMON GROUND)는 200개의 컨테이너로 구성되어 독특한 외양을 자랑한다. 2015년 국내 최초의 팝업 쇼핑몰을 표방하며 오픈한 이곳에서는 K-팝 아티스트들의 팬 사인회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최근 들어 특색 있는 팝업 스토어 연출을 위해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진은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가 2023년 8월부터 약 한 달 동안 커먼그라운드에서 운영한 팝업 스토어.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 스티키몬스터랩(Sticky Monster Lab)과 협업했다. ⓒ The Absolut Group
연무장길에 자리한 에스팩토리는 1970년대 지어진 섬유 공장, 체육관, 기숙사, 자동차 정비소 네 개 건물을 리모델링해 2016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아트페어나 콘서트, 콘퍼런스 등 규모가 큰 행사가 주로 개최된다.
이 외에도 대림창고, 마크69, 쎈느 같은 카페를 겸한 복합문화공간들이 팝업 스토어 장소로 자주 애용된다. 최근에는 팝업 스토어 전용 공간을 대여해 주는 임대업이 등장했으며, 패션 기업 무신사의 스퀘어 성수(SQUARE Seongsu)처럼 기업이 직접 공간 플랫폼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단순한 공간 매개를 넘어 팝업 스토어의 콘텐츠 기획, 마케팅, 운영 등 프로세스 전반에 걸친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도 나타났다. 프로젝트 렌트(Project Rent)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업계에 의하면 인기가 좋은 장소들은 내년까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경험
그동안 성수동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의 면면을 살펴보면 뷰티, 패션을 비롯해 F & B, 라이프스타일, 자동차, 미술, K-팝, 영화, 캐릭터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또한 국내 브랜드만 성수동을 찾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도 팝업 스토어나 쇼룸 형식으로 성수동에 닻을 내린다. 지난해 가을, 패션 브랜드 버버리가 글로벌 프로젝트 ‘버버리 스트리트(Burberry Streets)’의 일환으로 성수동에서 약 한 달 동안 성수 로즈(Seongsu Rose), 성수 보틀(Seongsu Bottle), 성수 슈(Seongsu Shoe) 세 개의 팝업 스토어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진행했다. 이 기간에 성수동 연무장길에서는 몽환적인 보라색과 노란색 장미가 그려진 화려한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뷰티 브랜드 이니스프리가 2024년 4월부터 5월까지 성수동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 ‘이니스프리 디아일 성수’에서 진행한 팝업 스토어. 젊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를 모집한다는 재미있는 콘셉트로 이목을 끌었다.
디즈니 플러스(Disney+)가 자사 오리지널 시리즈 < 삼식이 삼촌(Uncle Samsik) > 공개를 앞두고 2024년 5월 연무장길에서 진행한 팝업 스토어 전경. 빵집과 사무실 등 작품 속 배경을 그대로 구현했다.
최근 성수동에서 진행되는 팝업 스토어들은 단순히 제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방문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을 제공하거나 화려한 비주얼 아트를 선보이는 등 다채로운 경험을 유도한다. 이에 독창적인 기획력, 전문적인 마케팅은 이제 팝업 스토어 성공에 필수적인 역량이 되었다.
일례로 주류 브랜드 선양(鮮洋)은 지난해 겨울, 보트를 타고 체험존으로 입장하는 ‘플롭 선양(Plop Sunyang)’을 운영해 매우 큰 인기를 끌었고, 올해 4월에는 입장할 때 주어진 칩을 활용해 게임을 즐기는 카지노 콘셉트의 ‘선양 카지노’를 운영했다. 하이트진로 역시 올해 4월 실내형 테마파크 형식으로 ‘진로골드 판타지아(Jinro Gold Fantasia)’를 개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팝업 스토어의 부작용
팝업 스토어는 성수동의 부동산 시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팝업 스토어의 공간 임대 방식과 비용은 일반적인 상가 임대와 확연히 다르다. 대여 기간과 면적, 입지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형 건물의 경우 일주일 대관료 시세가 1~3억 원에 달하기도 한다. 팝업 스토어의 비용 상승에 법적인 제약이 없다 보니 부르는 대로 값을 받을 수 있고, 월세보다 수익이 높아 임차인들도 팝업 스토어를 선호하는 추세다.
팝업 스토어의 성행으로 성수동 임대료가 치솟자, 일각에서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아 온 가게들이 밀려나면 상권 전체가 침체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 인기를 끌던 성수동 갈비 골목이 최근에 사라졌다. 수십 곳에 달하던 골목 내 식당들이 폐업하거나 이전하면서 두세 곳으로 줄었는데, 임대료 상승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돼 원주민이 밀려 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성수동도 피하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 전문가들은 성수동 상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오래 유지될 것으로 전망한다. 언제 어느 때 방문하더라도 각양각색의 팝업 스토어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고, 새롭고 생동감 넘치는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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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수제화, 오래된 로컬 콘텐츠
성수동은 국내 최대의 수제화 산업 집적지로서 1980~90년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 환경의 변화로 인해 차츰 사양길로 접어드는 추세다. 이에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펼치며 수제화 산업의 부활을 꾀하고 있으며, 가업을 이은 디자이너들과 기술자들이 젊은 감각을 내세우며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 관역 내에는 이 지역이 전국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임을 상징하는 다양한 표식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최태원(Choi Tae-won, 崔兌源)
성수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뚝섬역 방향으로 600미터 남짓 수제화 거리가 이어진다. 지금은 유명 패션 브랜드나 코스메틱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성수동의 랜드마크가 되었지만, 본래 이 지역을 상징하던 것은 수제화였다.
성수동 수제화 산업의 역사는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 굵직한 제화업체 중 하나였던 금강제화(Kumkang, 金剛製靴) 본사가 인근 금호동(金湖洞)으로 이전했고, 1970년대 초에는 에스콰이아(Esquire)가 성수동에 공장을 세웠다. 이들 기업의 하청 업체들이 자연스레 하나둘 성수동으로 옮겨 오면서 이 지역은 국내 최대 규모의 수제화 산업 집적지가 되었다. 이후 전국의 구두 장인들이 몰려들면서 1980~90년대에는 수제화의 메카로 자리 잡으며 번성했다.
성수역 지하철 역사에는 이 지역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 ‘헤리티지 SS’가 조성되어 있다. 성수동을 관할하는 성동구(城東區)가 2021년 마련한 이곳은 국내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비롯해 작업 지시서, 구두 모형 등도 볼 수 있다.
성수동의 터줏대감들
현재 성수동 수제화 산업은 예전 같지 않다. 노후한 시설과 제한적 판로, 치솟는 임대료 등 제반 여건이 매우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가죽과 부자재 매장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고, 구두 가게들도 임대료가 더 저렴한 후미진 골목으로 밀려났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성수동 수제화가 다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초부터다. 서울시는 명장과 우수 숙련인을 선정해 수제화의 가치를 널리 알렸고, 성동구는 성수역 교각 아래 수제화 공동 판매장 FromSS를 마련해 지역 내 소상공인들을 지원했다. 수제화 업체 대표들은 서울성수수제화타운(SSST)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만들고 공동 판매장을 열어 유통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모두 지역 특화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성수동에는 40년 이상 경력을 지닌 명장들이 여럿 있다. 이들은 수제화 허브센터의 공방에서 교육생들을 가르치는 멘토로 활약한다. 그중 서울시 구두 명장 1호로 선정된 유홍식(劉洪植) 장인은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의 구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아빠는 구두장이’를 운영 중인 박광한(朴光漢) 장인도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다. 전태수(全泰洙) 명장은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미국 순방 때 영부인 김정숙(金正淑) 여사가 신었던 버선 모양의 구두로 화제를 일으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가 방한했을 때 신었던 꽃신도 그의 작품이다.
성수동에는 수십 년 동안 수제화를 만들어 온 솜씨 좋은 장인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한 명인 전태수(全泰洙) 명장은 성수동 수제화 산업의 산증인으로 50년 넘게 구두를 만들어 왔다. 그는 신발 제작뿐 아니라 디자인 연구와 소재 개발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 서울시
성수동 연무장길을 걷다 보면 큼지막한 빨간 하이힐 모형이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이있는데, 이곳이 전태수 명장의 JS슈즈디자인연구소(JS Shoes Design Lab)이다. 매장 안에는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하는 화려하고 섬세한 구두들이 진열되어 있다. 한쪽에 놓인 꽃신은 2022년 tvN이 방영한 드라마
에서 배우 김혜수(Hye Soo Kim, 金憓秀)가 신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당시 한복에 어울리는 굽이 높은 스타일로 몇 켤레 만들어 달라는 주문에 제작했다. 이곳을 지나 몇 분 걷다 보면 남성용 구두 가게 더젠틀박(The Gentle Park)이 나온다. 이곳의 구두는 어퍼에 그러데이션을 주며 염색하는 파티나(Patina) 공법으로 유명하다.
뚝섬역 근처 찰스보툼(CHARLSE VOTUM)도 오래된 수제화 브랜드이다. 김철(金撤) 대표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에서 20년 넘게 일한 남성용 구두 전문가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뒀다. 유럽 감성에 성수동 장인들의 기술을 더한 제품으로 살롱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2층 단독 주택을 개조해 만든 숍의 짙은 녹색문을 열고 들어가면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고객들을 반긴다.
수제화는 신발과 재료의 종류가 가지각색이다 보니 사용되는 도구 또한 매우 다양하다. 사진은 성수동의 오래된 수제화 브랜드 중 하나인 찰스 보툼 매장 내부로, 작업 단계마다 필요한 각종 도구가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다. ⓒ 최태원
2세들의 등장
최근에는 가업을 승계한 2세들이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성수역 3번 출구 인근 건물 2층에 위치한 피노아친퀘(Finoacinque) 쇼룸에서는 곡선 형태의 실루엣을 강조한 구두를 만날 수 있다. 편안한 착화감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이곳의 구두는 굽 높이가 5㎝를 넘지 않는다. 이곳은 김한준(金漢俊) 기술자와 이서정(李敍正)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6년 전 문을 열었다. 김한준 공동 대표는 수제화 제작 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으로부터 도제식으로 구두 제작과 관련한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들이 제작한 구두는 국내를 넘어 글로벌 고객들에게도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2월 파리 패션위크의 트라노이(Tranoi) 수주회에 참가해 5,000유로 이상 상담 성과를 얻었다. 뉴욕과 파리, 밀라노 등 셀렉트숍 바이어들과 생산 수량을 상담 중이다. 김한준 대표는 “패턴 제작, 바느질, 창 부착, 최종 검수에 이르기까지 제조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기 위해 모든 패키지에 장인들 이름을 적고 있다”고 말했다. 장인 정신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수제화 품질에 자신이 있어서다.
구두 디자인을 전공한 백인희 대표가 운영하는 베티아노 내부. 가업을 이은 젊은 디자이너와 테크니션들이 성수동 수제화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최태원
연무장길에 위치한 베티아노(VETIANO)도 외국인 고객들이 찾는 곳이다. 대학에서 구두 디자인을 전공한 백인희(白仁熙) 대표는 40년 이상 구두를 만들어 온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아 가업을 이었다. 매장 내부에는 플랫 슈즈부터 스니커즈류, 굽 있는 트렌디한 구두까지 다양한 종류의 신발이 진열돼 있다. 백 대표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는 수십 년 경력이 있는 전문 기술자들이 구두를 만든다. 덕분에 신발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할 수 있고, 더욱 세심한 고객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아버지 공장과 연계하여 일관성 있는 품질을 보장한다는 얘기다.
2세들의 젊은 감각을 비롯해 성수동 수제화 산업을 위한 다각적 노력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어 낸 제품들이 고객들에게 큰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Features
2024 SUMMER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붉은 벽돌
성수동은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꼽히는 지역이다. 그 기저에는 건축 재료인 붉은 벽돌이 있다. 과거 경공업 중심지였던 성수동에는 1970~90년대 지어진 붉은 벽돌 공장과 주택들이 다수 남아있다. 지역적, 역사적 특성을 지닌 붉은 벽돌 건축물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확산하면서 성수동은 특색 있는 도시 경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패브리커(Fabrikr)는 대상에 내재한 맥락과 물성을 파악해 이를 자신들의 조형적 언어로 표현하는 아티스트 그룹이다.이들이 공간 디자인을 맡은 카페 어니언 성수 역시 마찬가지. 건물에 남겨진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살려 주변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도록 했다. ⓒ 허동욱(Heo Dong-wuk, 許東旭)
벽돌은 가장 오래된 건축 재료 중 하나로, 개항 이후 급격하게 수요가 증가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나 날씨 변화에 잘 견디고 생산, 운송, 시공이 간편한 구조재였기 때문이다. 철근콘크리트가 등장하면서는 콘크리트 구조 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덧붙여 외장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벽돌은 기본적으로 표준화된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쌓기 방법이나 모르타르 배합, 시공 방식에 따라 마감재로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현재 서울에서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성수동을 걷다 보면, 붉은 벽돌을 입은 건축물들이 이곳의 고유한 풍경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 풍경이 단시간에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직감하게 된다.
고유한 정취의 보존
성수동은 붉은 벽돌 건축물이 전체 건축물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성수동에 유독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많은 이유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이곳은 근대기부터 공업 지역으로 조성되었고, 1962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되면서는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었다. 1966년 시행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거치면서 현재의 격자형 가로(街路)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경공업 지역으로 발전하면서 많은 영세 업체들이 붉은 벽돌로 공장과 창고를 지었고, 1980~90년대에는 주거 지역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붉은 벽돌로 된 소규모 주택들이 양산되었다. 붉은 벽돌 건축물들이 성수동의 시각적 구심점을 이루게 된 것은 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성수동은 또 다른 분기점을 맞는다.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성수동의 제조업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창고가 방치되는 일이 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진 공장과 창고들을 최소한으로 리모델링해 사진작가의 스튜디오나 디자이너들의 쇼룸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간들이 화제가 되면서 성수동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도 달라졌다. ‘힙’한 문화예술 지역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관 주도의 변화도 일어났다. 준공업 지역들은 대부분 기존 건축물들을 철거하고 신축을 통해 도시 재생을 계획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과거의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획일화된 도시 풍경을 만들어 내기 쉽다. 성수동은 과거의 산업 유산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여타 지역과 차별된다.
성수 WAVE는 JYA 건축사사무소(JYA-RCHITECTS)가 오래된 다가구 주택을 개조해 상업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곡면을 구현하는 시공 방식을 통해 이웃 주민들의 불편함은 최소화하면서도 상가 입주자들에게는 개방감을 제공했다.ⓒ 황효철(Hwang Hyochel, 黃曉哲)
성수동을 관할하는 성동구청은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고유한 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의지로 2017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붉은 벽돌 건축물 보전 및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는 역사∙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붉은 벽돌 건축물의 보전 및 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 건축물 입면의 경관적, 재료적 특성 보존을 통해 지역의 고유한 정취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도시 재생 방식을 택한 것이다.
보전과 증축
성수동 카페 거리에 위치한 대림창고는 성수동이 핫플레이스로 부상하게 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1970년대 정미소 용도로 지어졌으며, 정미소가 문을 닫은 이후에는 오랫동안 창고로 사용되었다. 2000년대 후반 한 사진작가가 이 건물을 촬영 스튜디오로 활용하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대형 패션쇼와 록 공연, 전시회 등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카페와 갤러리를 겸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된다. 2016년 오픈한 카페 어니언 성수 역시 50여 년 동안 슈퍼마켓, 식당, 가정집, 정비소, 공장 등으로 변형되어 온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살리며 리모델링되었다.
수십 년 동안 정미소와 창고로 사용되었던 대림창고는 외관은 그대로 둔 채 내부만 리모델링해 현재 갤러리 카페로 운영된다. 성수동을 대표하는 도시 재생공간으로서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2021년 오픈한 공간 플랫폼 LCDC 서울은 자동차 정비소였던 500평의 건물을 재탄생시킨 사례다. 이곳은 레노베이션과 증축이 함께 이루어졌는데, 기존 건물의 벽돌 외벽을 그대로 남기면서도, 새로운 콘크리트 벽을 엇갈리게 설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면서도 겹쳐 보이도록 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기존 건물의 질서를 어떻게 남겨놓을 것인가?’에 대해 ‘박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지난해 완공된 서울도시제조허브(Seoul Urban Manufacturing Hub), 일명 ‘성수 사일로 (Seongsu Silo)’는 2018년 공개 공모 당시 붉은 벽돌 입면을 포함한 기존 건물 일부를 존치하되 증축하는 설계 지침을 따라 설계됐다. 성수동 일대의 붉은 벽돌 건축물을 보전하고 지원하는 정책 아래 진행된 공모였던 것이다. 기존 공장은 콘크리트 골조 사이를 벽돌로 채워 만든 라멘조(ramen-structure) 건물이었다. 건축가는 이를 새로운 유형의 공장으로 설계하면서 담아야 할 공간 요소를 전면의 독립된 실린더 형태로 표현했다. 이곳의 공간 중 슈즈 사일로는 전면은 유리, 후면은 벽돌로 계획해 개방성과 독립성을 모두 확보했다. 또한 건물 외부와 내부 바닥에 동일한 벽돌 재료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심리적 경계를 낮췄다.
전면은 유리, 후면은 벽돌을 사용해 개방성과 독립성을 동시에 확보한 슈즈 사일로.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SoA)는 기존 공장을 리모델링해 상품 제작, 기획, 유통, 마케팅, 소비가 하나의 공간에서 통합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하는 한편 붉은 벽돌을 사용함으로써 성수동의 경관적 특질을 반영했다.ⓒ SoA, 사진 신경섭(Kyungsub Shin, 申璟燮)
가능성에 대한 탐구
성수동에서는 현재 신축 공간에도 붉은 벽돌을 활용하고 있다. 2021년 오픈한 생각공장은 성수동에 자리 잡은 수많은 지식산업센터들 중 하나로 연면적 2만여 평 규모로 지어졌다. 애초에 옛 성수동 공장 단지의 건축적 맥락을 이어가려는 생각으로 붉은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업무동 저층부와 상가동 전체를 붉은 벽돌로 마감했는데, 이는 업무 공간과 상업 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용도의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새것과 헌것 사이의 연결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벽돌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건물 내부에도 2층 높이의 벽면을 붉은 벽돌과 유리벽돌로 채워 과거에서 미래로의 전환을 내포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지식산업센터 생각공장은 두 개의 오피스동과 하나의 상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설계를 맡은 디자인 전문 그룹 디엠피(dmp)는 중심부에 위치한 상가동 성수낙낙(Seongsu NakNak)을 붉은 벽돌로 전면 마감하는 한편 다른 두 빌딩의 저층부에도 붉은 벽돌을 사용해 세 건물에 연속성을 부여했다. 사진은 성수낙낙 내부 모습.ⓒ 윤준환(Yoon Joon-hwan, 尹晙歡)
이처럼 각기 다른 방식과 전략으로 붉은 벽돌을 활용하여 지어지는 주요한 상업 공간, 오피스 공간, 공공 공간들은 성수동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물리적 매개로서 성공적인 도시 재생에 기여하고 있다.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장소의 고유한 풍경 언어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데이비드 레더배로우(David Leatherbarrow)와 모센 모스타파비(Mohsen Mostafavi)가 공저 『표면으로 읽는 건축(Surface Architecture)』에서 지적했듯이 역사에 대한 향수로 과거의 형태를 모방하여 디자인하는 것은 다양한 재료와 시공 방식이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저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건축 재료로서의 구법과 그 가능성을 계속해서 탐구해 나갈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성수동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단순히 표피적인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지속 가능한 도시 재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