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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시공간에 이르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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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시공간에 이르는 여정   © 지안 입구는 좁고 통로는 어둡다.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는 빛은 좀처럼 조도를 높이지 않는다. 시간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왼쪽 벽에서 희뿌연 빛이 기척을 보낸다. 광대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누워 있다. 거대한 돌, 혹은 얼음이 아주 느린 속도로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물이 되고, 물은 더욱 느리게 수증기로 피어올라 온 세상이 되었다가 다시 돌로 굳어진다. 장 쥘리엥 푸스(Jean-Julien Pous)의 비디오 작품이 환기시키는 완만한 우주적 순환의 ‘세례’를 거쳐 우리는 마침내 ‘사유의 방’에 들어선다. 오감이 깨어난다. 전신의 모공이 조금씩 열리고 내면의 공간이 무한대로 넓어진다. 깨어남과 고요함이 하나가 되는 시간, 부지불식간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지며 저 어둠과 밝음이 만나는 타원형 지평에 신비스러운 두 존재가 떠오른다. 그들 사이의 가까우면서도 먼 공간 속으로 사유의 여정이 시작된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반가사유상이 교환하는 신비의 미소가 거기 있다. 남산을 등지고 한강을 앞에 눕힌 용산 공원 숲속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이 건축가 최욱(Choi Wook 崔旭)과 브랜드 스토리 전문팀에 의뢰하여 야심차게 기획하여 2021년 11월 일반에 개방한 공간이 바로 이 방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우선 머리에 떠올리는 상징이 라면 이제 서울의 국립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사유의 방’과 그 안에서 만나는 두 구의 금동반가사유상을 가장 먼저 연상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77 × 53 ㎝)는 16세기 초의 그림이지만, 둘 다 높이 1m가 채 되지 않는 국보 78호, 83호 금동 조각상은 그보다 1000년 가까이 앞선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신라 불교 미술의 절정이다. 이 걸작들은 이름이 함축한 두 가지 특징을 지녔다. 첫째,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다른 불상들과 달리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앉음과 일어섬 사이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오른쪽 손을 들어서 검지와 중지의 끝을 가볍게 턱에 댄 자세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여 준다. 로댕의 보다 1300년 전부터 이 미륵보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불상도 오랜 세월이 지나 미술관에 들어오면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정한 사유는 나를 버리는 것인 동시에 나를 찾는 길이다. 이 두 반가상은 그 버림과 찾음의 사이의 미세한 진동을 신비로운 미소로 비추며 넓고 깊은 사유의 시공간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평화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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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꿈꾸다 1960년대 봄, 비무장지대 철책선에서 복무하던 나는 가끔 인적이 없는 근처 강가에 찾아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들곤 했다. 절벽 끝에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만발했고, 전쟁 전 마을이 있었던 강가의 장방형 담장을 따라 잡초가 무성했으며, 여기저기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피었다. 그때의 대학생 병사가 노년으로 깊숙이 들어선 지금도 남북은 여전히 갈라져 대치 중인데, 적막에 싸인 그 강가에는 여전히 철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것이다. ⓒ 박종우 한국 전쟁 발발 3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정전 협정에 따라 양측은 동서 약 240km에 걸쳐 한반도의 허리를 둘로 갈라 가상의 군사분계선(MDL)을 긋고, 그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범위에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 지대를 두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 비무장지대다. 총면적 약 907㎢인 이 지역의 남북 경계선에는 각기 높은 철책을 세우고 남북한 군대가 대치 중이다. 비무장으로 군사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지만, 지뢰로 덮인 이곳은 지구상 유일하게 냉전 체제의 위험한 유산이 상존하는 살벌한 대치 공간이다. 군사분계선에는 남북한군과 유엔군이 공동 경비하는 반경 400m 원형 지역, 오늘날에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저 유명한 판문점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비무장 지역 밖 남북으로 10여㎞ 떨어진 지역에 다시 통제선 철책을 세우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이 선이 바로 민통선이다. 역내(域內)에는 휴전 협정에 따라 남측의 대성동, 북측의 기정동 마을에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DMZ 일대는 포유류와 조류의 분포 면에서 국내 최대의 종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0월 초순에는 민통선 북쪽 철원평야에 수천 마리의 재두루미들이 시베리아의 추위를 피해 찾아와 들판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또한 11월 초순이면 우리 민족이 가장 상서롭게 여기는 새인 두루미가 찾아온다. 날개가 없는 나는 이 남북한 접경 지역에 내려앉는 수천 마리의 철새 떼를 그저 사진으로만 바라보며 아직은 기약 없는 통일을, 철책선 안이 평화로운 생태공원으로 변할 그날을 꿈처럼 그려본다.

침묵이 흐르는 대학가 원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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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흐르는 대학가 원룸촌 “원룸, 투룸, 자취방, 풀 옵션 방, 신축 원룸, 원룸 임대….” 대학가 골목 담벼락과 대로변 전신주, 가로수, 버스 정류장 쉘터에 붙여 놓은 전단들이 바람에 들썩거린다. 그러나 마스크를 쓴 채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대학가 주변에는 침묵만 가득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대학가 임대업계는 걱정이 많다.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대학촌에 학생들이 사라졌고, 덩달아 원룸을 찾는 수요가 줄거나 끊겼다. 중국 유학생들은 오래전에 돌아갔고, 기존에 방을 쓰던 지방 출신 학생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대면 수업이 재개되어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월세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과거에는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서 대개 하숙을 했다. 방만 빌려 쓸 뿐 혼자 끼니를 만들어 먹고 살림을 해야 하는 자취 생활에 비해 하숙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지내야 하는 학생들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는 따뜻한 밥과 푸짐한 반찬들을 끼니때마다 먹을 수 있었고, 인심 좋은 아주머니들은 빨래와 청소까지 해 주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런 보살핌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함께 사는 다른 하숙생들과 마치 형제자매처럼 친밀하게 지내곤 했다. 하숙집 생활에는 농경 사회 대가족 체제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들은 점차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대학과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가족처럼 함께 사는 하숙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과거의 가족적 공동생활보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더 우선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대학촌에 전 세대 원룸들로 구성된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로써 집주인과 학생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관계는 임대인과 세입자 관계로 바뀌었다. 여기에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대학가 원룸촌에서 젊음을 비워 버렸다. 남향의 작은 베란다와 최소한의 규모만 갖춘 주방, 좁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욕실, 붙박이장과 책상, 그리고 작은 침대 하나…. 젊은 날의 꿈과 고뇌와 열정으로 충만했던 원룸이 텅 빈 채 사나운 여름빛만 가득하다. 초가을 2학기가 시작되면 이 방에 희망을 품은 새 주인이 돌아올까?

산이 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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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젊어진다 산이 젊어진다 가끔 한밤중에 잠이 깰 때면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마음속의 산길을 오른다. 집들이 멀어지고 숲이 시작되는 비탈길. 숲길에서 숨을 고른다. 왼발, 오른발. 빛과 그늘의 교차. 빠른 심장 박동,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 정상의 큰 바위. 건듯 불고 지나가는 산바람과 함께 맛보는 해방감과 열린 풍경의 광대함을 상상한다. © Yang Su-yeol 무려 4000개가 넘는 산들이 솟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나 뒷산 혹은 앞산이 보인다. 특히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은 남산을 품에 안고 안산, 인왕산, 관악산, 불암산, 도봉산, 북한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한 시간 안에 도달하는 도심의 대자연, 특별한 준비 없이 간편한 차림으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산길은 안전하다. 범죄나 야생 동물의 공격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잘 정비되고 친절하게 안내된 등산로에는 대피소가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게 자연 경관과 도시 전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등산의 풍경도 변했다. 40~60대 중년들의 취미였던 산행에 온라인 커뮤니티, 취미 플랫폼을 매개로 20~30대 젊은 등산 마니아들이 나섰다. 젊은이들은 등산 패션에서도 그들 특유의 강한 개성을 자랑한다. 울긋불긋 비슷한 아웃도어 패션 대신 스타일리시한 레깅스, 산악 러닝화를 애용한다. 인스타그램에 자신만의 등산 모습을 올린다. 어떤 젊은이들은 취미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쓰레기 줍기 같은 ‘클린 하이킹’에도 나선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해외로 떠나지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되자 폐쇄적 환경에서 벗어나고 암울한 청년기의 고빗길을 넘기 위한 돌파구로 밀레니얼 세대는 산과 숲으로 간다. 금년 3월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객은 67만 명,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 증가했다고 한다. 비대면 여행 취미로 산의 풍경이 젊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간편한 차림으로 혼자 산정에 올라 광대한 세계와 대면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젊어진 산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나도 걷는다, 왼발 오른발…. 김화영(Kim Hwa-young 金華榮)/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억 속에 불을 밝힌 시골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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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에 불을 밝힌 시골 간이역 최근 서울에서 안동을 잇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제 안동 북쪽에 인접해 있는 내 고향 영주까지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60여 년 전인 1955년 초 어느 추운 겨울날, 열세 살 가난한 산골 소년이었던 나는 영주역에서 생애 최초로 혼자 기차를 탔다. 아침에 탄 완행열차는 낯선 이름의 많은 역들을 다 통과하고 나서 날이 어두워져 갈 무렵에야 종착역인 서울에 도착했다. 이제 그 머나먼 길을 한 시간 반 남짓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니 얼마나 큰 변화이며 발전인가! 그러나 이 새로운 교통 수단의 편리와 안락과 속도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의 한편에는 지난 긴 세월의 밑바닥에 침전된 삶의 느리고 정다운 풍경들이 그리움과 함께 가라앉아 있다. 소년의 첫 기차 여행은 두렵고 신기하고 가슴 설렜다. 옆자리에 앉은 어른이 무얼 하러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려고 서울 간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객차 안에는 좌석과 복도에 승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객실 안이 캄캄해졌다가 곧 다시 환해졌다. 기관차가 내뿜는 검은 연기와 그을음이 열린 차창으로 들어왔다. © 안홍범 작은 시골 역에서 기차가 멈춘다. 내게 삶은 계란을 나누어 주던 앞자리 아주머니는 침을 흘리며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보따리를 챙긴다. 객차에서 내린 아주머니와 함께 교복 입은 어린 학생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간이역…. 코스모스 같은 일년생 꽃들이 덧없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화단…. 이런 시골 역들의 풍경은 내 기차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이제 쾌속의 KTX 열차는 그 작은 역들을 모른 채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다. 아니 많은 시골 역들이 오래전 그 기능을 잃고 폐역으로 철거되었다. 또는 용도 폐기된 작은 간이역 역사를 카페, 간이 음식점, 작은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소환하고 관광 상품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한밤에 선잠이 깨면 나는 간혹 어린 소년이었던 나를 그 외딴 간이역의 어둠 속에 앉혀 본다. 그리고 흘러간 내 생애의 간이역 대합실들에 흐린 불을 켜 놓고 곽재구(郭在九) 시인이 노래한 를 그려 본다. “……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2020년, 얼굴에서 입과 코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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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얼굴에서 입과 코가 사라졌다 2020년, 커다란 천 조각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입과 코를 삭제하고 불안한 두 눈만 남겼다. 처음에는 악몽 속에서 보는 것 같던 풍경이 이제 당연한 일상으로 비치게 되었으니 불행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이 오히려 섬찟하다. 마스크라면 책에서 본 ‘철가면’이나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탈, 혹은 가면무도회가 머리에 떠오른다. 특별한 경우라 해도 대학 캠퍼스나 거리에서 시위하는 젊은이들의 마스크 쓴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황사, 매연 등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로 인한 특유의 심각한 대기오염 때문에 마스크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외출할 때는 나도 KF94 마스크를 자주 착용하곤 했다. 아마도 이런 예비적 습관이 한국적 방역 성공의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 Yonhap News 이제 마스크는 개인이 선택하는 자기 보호용 도구 차원을 넘어서 ‘공공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고, 개인의 권리인 동시에 국가가 그 공급을 책임져야 할 보급품이 되어 ‘공적 마스크’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훗날, 사람들은 마스크를 구하기 위하여 약국 입구에서 긴 줄을 서고 신분증을 제시하며 제한된 수의 마스크를 할당받던 2020년 봄을 아프게 기억할 것이다. 또한 마스크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이 되었다. 바이러스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코로나바이러스 특유의 무증상자나 초기 증상자로부터 건강한 사람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하면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마스크 문화는 빠르게 진화하여 ‘KF보건용 마스크’, 여름용 ‘KF-AD 비말 차단 마스크’로 구분되고 목에 걸 수 있는 보조 도구인 스트랩이 등장했는가 하면, 보건용 마스크보다 패션 마스크를 선호하는 소비자층도 생겼다. ‘룩 엣 마이 아이스’– 요즘‘눈에 힘주는 여성’들이 부쩍 많아졌다. 마스크에 가린 부분의 화장품 판매고는 급감한 반면에 아이라이너, 아이섀도, 마스카라 등이 잘 팔린다고 한다. 그런데 눈만이 아니라 해방된 입과 코가 제자리로 돌아와 환하게 웃는 우리 이웃 사람들의 온전한 얼굴은 언제나 볼 수 있을까?

내 마음의 고향 부석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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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고향 부석사 가는 길 부석사는 내 고향 영주의 아주 오래된 절이다. ‘부석’에 대한 창건 설화가 있는 이곳은 7세기에 지어졌다. 반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자식들, 특히 장손인 나의 행복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이 절에 다녔다. 사월 초파일엔 나도 따라갔다. 절은 멀었다. 자동차는 그림책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시절이었기에 그냥 걸어갔다. 십 리를 가면 부석 장터, 다시 인적 없는 골짜기 길 십 리. 정작 고된 길은 이제부터였다.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과 당간지주를 시작으로 양옆은 은행나무 가로수와 사과밭뿐인 오르막길이 수백 미터. 계단들 위 저 하늘 아래 천왕문, 다시 약간 방향을 틀어 종각루와 범종루, 또 돌계단들, 그리고 명필 이승만의 훤칠한 ‘부석사’ 현판이 걸린 안양루(安養樓)…. 여기까지가 무려 번뇌의 108계단이다. 누각 밑 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코앞에 마주 서는 소슬한 신라 시대 석등. 그 뒤로 추녀가 날아갈 듯 팔 벌린 무량수전. 할머니의 신자인 나는 늘 옆문으로 들어가 아미타여래께 삼배를 드리며 부처님 앉아 계신 무릎 밑 실꾸리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다는 전설 속 늪을 상상했다. 무량수전의 왼편 뒤에 거대한 바위 ‘부석’이 있다. 나는 이 절의 유래를 선묘의 애틋한 사랑에서 찾는 13세기 역사서 『삼국유사』보다 할머니가 들려준 전설 이야기를 더 그리워한다. “신라의 임금님이 백제, 고구려와 국경이 닿아 있던 이 지역에 큰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보위하고자 함에 국사 의상이 몇 날 며칠 태백준령을 헤매던 어느 날 큰 바위 하나를 검지로 퉁겨 하늘로 올려 보내니, 그 바위가 검은 구름이 되어 일곱 날을 떠다니며 큰비를 내리게 하더니 마침내 땅에 내려와 이곳에 절을 지으라 점지하였는데, 땅에 닿게 내려앉지는 않았기에 지금도 바위 밑에 실을 넣고 당겨 보면 실이 끊어지지 않으리라.” 나는 늘 선묘각 뒤편 삼층탑 옆에서 바라보이는 무량수전의 날아갈 듯 들린 추녀, 석등, 그리고 안양루 저 너머 둔주곡처럼 너울져 소멸하는 소백산 능선들, 그 위로 내리는 저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저녁 빛을 사랑한다. 탑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호젓하고 소박한 맞배지붕 집 조사당(祖師堂)이 나온다. 의상대사의 진영을 모신 이 건물 오른쪽 철제 울타리 속에 나무가 한 그루 자라는데 의상대사가 꽂아 놓은 지팡이에 싹이 터서 자랐다는 전설의 골담초다. 나는 그 장식 없이 간결한 조사당 기단에 걸터앉아, 인적 없는 밤이면 구름처럼 사뿐히 하늘 위로 떠올라 잠자는 어린아이들을 미소 지으며 굽어본다는 부석사 ‘뜬 바위’를 상상하며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콩나물시루에 물 흐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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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시루에 물 흐르는 소리 넓은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아이들이 서로들 멀리 떨어져 앉는다. COVID-19의 창궐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 부분적 개학을 맞게 된 교실의 모습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이와는 정반대여서 좁은 공간에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수업하는 ‘콩나물 교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과도하게 밀집된 학습 공간을 비유하는 이 표현이 우리에게는 익숙했다. 그 콩나물시루 같은 밀집된 공간의 체온으로 우리는 서로 마음을 다독였다. © Ahn Hong-beom 콩나물은 오래전부터 동북아 지역에서 다량 생산되는 대두를 발아시켜 식재료로 사용하는 한국인 특유의 채소다. 물에 불린 대두를 밑에 구멍 뚫린 질그릇에 담아 방안 한구석에 두고 일주일가량 하루에도 여러 번 물을 주면 노란 콩나물 머리 아래로 길게 자란 흰 뿌리들이 가난하던 시절 과밀 학급 교실처럼 질그릇 시루를 빼곡하게 채운다. 대두가 어두운 곳에서 발아를 거치는 동안 향이 좋아지고, 단백질 함유량은 약간 줄어드는 대신 섬유질이 증가하고 아미노산 화합물이 풍부해진다. 특히 콩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비타민 C가 생성되는데, 콩나물100g에 들어 있는 비타민 C의 함량은 같은 양의 사과보다 세 배나 높다. 콩나물 잔뿌리에 함유된 아스파라긴산은 알코올 해독에 효과가 있어 숙취 해소를 위한 해장국 재료로 많이 쓰인다. 이 나라 어디서나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콩나물은 데친 후 양념에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기도 하며, 함께 밥을 지어 콩나물밥을 만들어 먹는다. 거의 대부분의 식품을 자급자족하던 시대의 농촌에서 자란 나에게 어둑한 방 한구석에서 콩나물시루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어린 시절을 실어가는 시간의 발소리였다. 할머니가 하는 대로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콩나물시루에 덮인 베보자기를 걷어내고 시루 밑에 받아놓은 물을 쪽박에 담아 콩나물에 끼얹어 주곤 했다. 콩나물을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그 물 주기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시루에 물을 붓기가 무섭게 바로 빠져 버린다. 물이 이렇게 빨리 빠져서야 어떻게 콩나물이 자라겠는가! 그럼에도 콩나물은 쑥쑥 잘도 자랐다. “수행은 습관이다. 오랫동안 반복되는 말과 행동이 몸에 배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깨달음의 등불을 켜기 위해 빛을 모으는 과정과 같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잠깐 스쳐가는 물에 젖기만 하는 콩나물도 오래 반복되면 자라듯이, 평소 하는 말과 행동이 습관이 되면 결국 운명이 바뀐다." 천은사 주지 동은(東隱) 스님의 말씀이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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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돌잔치 외손녀의 돌잔치 사진이 휴대폰으로 전송되어 왔다. 작년 6월 초 싱그러운 초여름 날, 어느 호텔 식당의 별실. 사진에는 행복감이 넘쳤다. 간신히 달래서 씌워준 앙증맞은 조바위 모자가 답답했던지 훌렁 벗어던진 아기. 두 개의 작은 상에 차린 떡과 과일, 색색의 물건들. 그리고 푸짐하게 쌓인 실타래 위에 모란을 수놓은 주머니와 빨간 장식 띠. 아기가 돌잡이로 골프공을 건드리자 제 어미가 “뭐 이런 걸?” 하며 치웠다. 다시 쟁반을 내밀자 아기는 싱글벙글거리며 큼직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노래 부르며 신나는 인생을 살려나?” 둘러선 가족들이 웃으며 덕담을 했다.   © Yang Jun-seok 돌잔치란 유아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출생의례다. ‘돌’은 열두 달을 한 바퀴 돌았다는 뜻인데, 의식주와 의료 서비스 등 생존 조건이 미흡하던 옛날에는 돌을 못 넘기는 아기도 많았다. 그래서 1년을 용케 넘겼으니 부디 오래 살아남아 행복하라고 온 집안이 모여 잔칫상을 차리던 오랜 풍습이 지금까지 남았다. 상에 늘어놓은 물건들 중 무엇을 집는지 보고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행복을 비는 놀이가 이 축제의 절정인 ‘돌잡이’다. 돌잡이 상에는 흔히 무병장수의 의미로 실 꾸러미와 국수, 백설기와 수수팥떡, 그리고 부자가 되라고 돈이 놓였다. 남아의 앞에는 종이와 붓, 책과 먹, 활과 화살, 마패 등 학문과 무예, 그리고 출세와 관련된 물품들을 놓기 마련이었다. 여아의 앞에는 바늘과 가위와 인두, 실패와 옷감처럼 살림살이와 관련된 물품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남녀 구별이 없어졌다. 골프공, 마이크, 청진기, 판사봉, 심지어 컴퓨터용 마우스까지 등장했다. 의사의 청진기도, 법관의 판사봉도 아닌 마이크를 집어든 우리 손녀의 미래를 상상해 보던 나는 문득 30여 전, 이 아기의 엄마인 나의 딸은 무얼 집었는지 기억해 본다. 제 앞의 모든 물건들을 다 뛰어넘어 저 뒤쪽에 쌓인 떡을 집어 한입 가득 베어 물던 그 아이, 그래서 풍족히 먹을 복을 누리며 여러 아이들 엄마가 된 것일까?

한국인의 겨울을 알리는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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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겨울을 알리는 김장 @imagetoday 내 어린 시절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 몇 쪽이 가지 끝에 애처롭게 매달릴 무렵이면 온 집안이 월동 준비로 분주해졌다. 채소밭에서 속이 찬 배추를 뽑아다 마당에 쌓아 놓고, 반쪽 내어 노란 속이 보이는 배추를 큰 그릇에 담아 소금에 절였다. 김장의 축제가 시작되고, 온 집 안에 매콤한 양념 냄새가 가득했다. 김치는 한국인의 식탁을 대표하는 상징, 나아가 한국 문화의 아이콘이다. 채소를 겨울 동안 줄곧 신선한 상태로 저장해 먹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 낸 특유의 발효 식품이 김장이다. 유산균이 풍부한 김치는 익어가는 동안 여러 종류의 독특한 맛을 선사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 신선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소금물의 효소가 배추의 섬유질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발효하기 시작한다. 무채, 마늘, 파, 고춧가루, 젓갈, 오징어, 잣 등 갖가지 식물성과 동물성 재료가 한데 어울린 양념은 김치를 완전한 저장 식품으로 승격시킨다. 이렇게 준비한 김치를 독에 넣어 땅속에 파묻고는 추운 겨울 동안 꺼내 먹는다. 오늘날에는 집 안에 설치한 최첨단 김치냉장고에 보관하고 먹을 수 있어 편리하다. 김치의 종류는 지방에 따라, 각 가정의 전통에 따라 달라서 무려 200가지가 넘는다. 김치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배추는 19세기 말엽 중국에서 들여와 개량한 품종이다. 한편 김치 양념에 고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수출되기 시작했고, 2013년 12월 유네스코는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이제 가정에서 손수 김치를 담는 대신 합성수지 봉지에 담겨 진공 포장된 김치를 슈퍼마켓에서 사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배달받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김장철이 되면 마당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입을 딱 벌린 채 고모가 주시는 금방 담근 배추김치를 받아먹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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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 군것질 중에서도 나는 유난히 곶감을 좋아한다. 농촌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이 그 속에서 추억의 단맛을 되살려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도 저녁에 간혹 속이 출출해질 때면 문득 생각나는 것이 곶감이다. 감나무는 본래 극동 지역인 중국, 한국, 일본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내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6월이면 환하게 피었다가 나무 아래 자욱이 떨어지는 그 연한 베이지색 꽃잎들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반드러운 감나무 잎으로는 가을 햇곡식으로 만드는 맛난 떡을 쌌다. 감나무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그 탐스러운 열매다. 무르익은 홍시도 달고 부드러워 맛난 과일이지만, 역시 껍질을 깎아 말려 저장하는 곶감을 따르지는 못한다. 볕이 좋은 가을날, 온 집안 어른들이 들마루에 둘러 앉아 수북이 따다 쌓아 놓은 떫은 생감의 껍질을 얇고 예쁘게 깎는 일은 축제다. 그렇게 깎은 감은 마당의 시렁에 넓게 편 발 위에 줄 맞추어 널어 말린다. 윗부분이 물기가 마르고 색이 거무스레해지면 뒤집어서 또 말린다. 어느 정도 마르면 그 말랑말랑한 육질의 촉감이 절로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정성스레 말린 곶감은 항아리 속에 보관했다가, 호두를 안에 싸서 곶감쌈을 만들거나 수정과를 만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곶감 그대로 제사상에 올리고, 긴긴 겨울밤을 넘기는 야식으로 즐긴다. 단것이 귀했던 그 옛날, 발 위에 널린 것들 중 한두 개를 슬쩍하고 싶은 유혹과 그 빈자리의 두려움 사이에서 애태우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고향 마을 가을볕 속에 서성인다. 오늘날에는 기술이 발달하여 자동 기계로 감을 깎는다. 그러고는 플라스틱 집게 같은 건조 도구에 꼭지를 끼워 덕장에서 대량으로 건조시킨다. 이렇게 햇빛과 바람에 노출되어 60일 이상 말리면 고운 갈색 과육이 하얀 분에 감싸인 달콤하고 쫀득한 상품이 된다. 그 곶감 속에는 우리 모두가 어릴 적에 들었던 재미난 옛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옛적, 어느 깊은 밤,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어떤 집 뒤뜰을 서성이다가 방 안에서 어머니가 우는 아이 달래는 소리를 듣는다. “호랑이가 왔다. 울지 마라.” 그래도 아이가 계속 울자 어머니가 “아가, 여기 곶감 봐라, 울지 마라.” 하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친다. 호랑이는 곶감이 자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 여기고 겁이 나서 도망갔다. 호랑이가 사라진 오늘에도 곶감은 남아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치맥’의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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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맥’의 빛과 어둠 한국인의 술 소비량은 러시아와 함께 세계 최상위권이다. 각종 주류에는 궁합을 맞추는 안주가 따로 있다. 막걸리에는 빈대떡, 소주에는 삼겹살이 어울리듯 맥주에는 단연 프라이드 치킨.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맥주와 치킨의 환상적 궁합은 외국어 사전에까지 올랐다. 그 단어는 바로 영어의 치킨에서 온 ‘치’와 한국어의 맥주에서 온 ‘맥’의 조합인 ‘치맥’이다. 바삭한 튀김 겉옷을 가르면 촉촉한 속살에서 모락모락 따뜻하게 솟아나는 김, 고기살의 부드러움과 쫄깃함, 거기에 더하여 달달하면서도 알싸하게 쏘는 마늘향이 혀의 표면을 빠르게 쓸면서 기름에 튀긴 음식 특유의 느끼함을 분산시킨다. 이것이 한국 특유의 프라이드 치킨이다. 여기에 향이 강하지 않은 한국산 드라이 맥주의 시원함을 더하면 “치킨은 무조건 옳지만 치맥은 매우 옳다!”, “천국에는 분명 치맥이 있을 거야!”라는 네티즌들의 탄성이 터진다. 치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60년대까지 프라이드 치킨은커녕 프라이드 에그도 귀한 음식이었다. 치맥의 초기 모습은 1960년대 말 서울 명동에서 개업한 닭 요리점 ‘영양 센터’의 전기구이 통닭과 생맥주였지만, 당시에는 가격이 비쌌다. 그 무렵 미국에서 양계용 닭의 원종과 사료가 수입되면서 1970년대에는 닭의 서식지가 마당에서 양계장, 즉 공장식 밀집 축산 공간으로 이동한다. 한편 국산 쇼트닝 오일과 식용유가 대량 생산되고 밀 수입의 급증에 따라 밀가루 생산량이 증가하자, 이렇게 갖추어진 조건 속에서 1977년 신세계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 개업한 ‘림스치킨’이 국내 최초의 프랜차이즈 프라이드 치킨을 선보였다. 1984년엔 KFC가 종로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이처럼 치맥의 대중적 소비는 프랜차이즈 산업과 직결되어 있다. 오늘의 치맥이 가시화한 것은 2002년이다. 그해 대한민국이 4강에 오른 월드컵 축구 대회는 나라 전체를 축제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흥분한 사람들은 스크린이 있는 곳이면 광장, 음식점, 술집을 가리지 않고 맥주와 프라이드 치킨을 함께 시켜 놓은 채 축구를 관전했고 이것은 전국적 유행이 되었다. 이후에는 드라마 등 한류의 확산이 치맥 문화를 동아시아권 전체로 퍼뜨렸다. 그러나 한국인이 즐기는 마약과 같은 치맥에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닭고기 자체는 물론, 열을 가한 튀김 기름, 튀김옷의 과도한 열량, 높은 염분에 더하여 알콜, 그리고 맥주 특유의 식욕 촉진 효과로 인한 과식 유발은 비만, 통풍, 심혈관 질환, 간질환으로 연결될 위험이 크다. 그래도 이 나라 어디든 전화 한 통화면 30분 안에 비교적 저렴한 프라이드 치킨이 맥주와 함께 배달되고 서민들의 눈앞에 치맥의 ‘천국’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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