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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In Love with Korea 2024 AUTUMN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In Love with Korea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In Love with Korea 2024 SPRING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In Love with Korea 2023 WINT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미국인 메건 문(Megan Moon)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메건 문Megan Moon’을 통해 수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쌍둥이의 엄마이자 유튜버인 메건 모어(Megan Moore) 씨는 2012년 한국에 왔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미국에서 살다가 한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의 삶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그녀는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계속 머물게 되었다. 메건 씨가 거실에 있는 넓은 감청색 소파에 앉아 있다. 거실 창가에는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잔디밭이 보인다. 파주에 있는 그녀의 집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녀가 미국 남부에서 자랄 때의 환경도 이와 비슷했는데, 사슴이 가끔 정원에 들르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과 작년에 태어난 쌍둥이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패턴 도안가이다. 이들의 삶은 메건 씨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유된다. 수십만 명 구독자들은 그들의 일상을 통해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미국 문화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한국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열중했다. 이제 메건 씨는 문화적으로 자신이 “미국과 한국 그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 창구인 유튜브 메건 씨는 한국어 소리에 반해 한국어 공부에 푹 빠졌고, 이제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그녀의 유튜브 영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법의 구조가 정말로 어떻게 사물을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에 올릴 콘텐츠의 기획과 촬영, 편집 등에는 시간도 많이 투입되고 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조율할 것도 많다. 그래서 전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90만 명의 구독자를 달성하여 유료 광고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브이로그 형태로 제작하며,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좋아하는 곳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한국이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음식이다. 한국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한국 문화 경험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메건 씨의 경우 처음에는 뜨거운 찌개나 국을 먹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식을 때까지 10분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이제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냥 바로 먹어요. 적응되었고, 아주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지난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식당의 음식들이 모두 너무 차가웠어요. 혼자‘온기가 어디로 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요리할 때 재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식재료의 어떤 부분들이 그냥 버려지기 일쑤다. 예를 들면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다. “고구마 줄기는 아주 맛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마늘종도요. 미국에서 운전하고 있을 때였어요. 길가에 쑥이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인은 그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요리하죠.” 그녀의 유튜브 콘텐츠 중에서도 도전과 개인의 목표, 그리고 가족생활을 보여주는 콘텐츠에 구독자 코멘트가 더 많이 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길을 걷다 외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영상을 보고 한국에 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 오는 게 꿈이었지만 겁이 났어요’라고 말해요.”라고 메건 씨는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사람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자 한다. “잘 안된 일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옷을 파는 일 같은 거죠. 하지만 ‘좋아. 그건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이었어. 다른 걸로 해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인생은 너무 짧아요. 시도해 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깊은 인상들 그녀는 아이들이 어느 하나에 본인의 역할을 국한하지 않는다. 아내이자 부모, 고양이의 보호자이자 유튜브 운영자,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꼼꼼히 챙긴다. 메건 씨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다시 음식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음식점에 간 적이 있어요. 음식도 맛있고 반찬도 무료여서 대학 다니는 동안 자주 갔었죠”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국어를 들었는데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레스토랑 직원들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메건 씨는 2012년에 영어 강사로 2년간 일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한국을 이제 ‘고향’이라고 부르는 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시작이었다. 메건 씨는 처음으로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인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웠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에서 온 저에게는 이상했어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한 종류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녀가 적응해야 했던 또 다른 경험은 사람과 쉽게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커뮤니티 특유의 여유로움 덕분에 서로 쉽게 친해지고 지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집중적인 생활 방식과 회사 생활의 비중이 높아 사람들과의 교제가 쉽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 체류를 기약 없이 연장하기로 했다. “한국이 고향 같은 느낌을 받아서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아주 친절하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죠.” 엄마가 되기 딸 루나와 아들 루빈이 태어난 이후 메건 씨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두 아이는 하루 종일 저를 필요로 하죠. 밥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제 도움이 필요해요. 주의와 자극도 필요하고요. 또 아이들이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해요. 작은 일 하나하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아서 만화나 영상 등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의 주요 목표는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성장 마인드를 갖기 바란다고 말할 수 있죠. 그렇게만 되면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말이죠.” 유튜브 운영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와중에 메건 씨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잊지 않는다. 그 시간엔 주로 운동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정서적으로 충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2021년에 비키니 모델 대회에 나가기 위해 도전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렸고, 이것이 KBS 다큐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혼합된 유산과 정체성 그녀는 아이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며 클 수 있도록 노력한다. “Q&A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업로드된 영상은 13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영상에서 메건 씨는 자신이 “흑인이지만 아주 밝은 피부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부모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인, 흑인, 인디언 원주민이 혼합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흑인이다. 그녀가 크면서 흑인이지만 밝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피부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개성과 행동 등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딱지’도 붙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살아가려고 해요. 너는 한국인이야. 너는 미국인이야. 너는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어.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추석 명절도 축하하는 것처럼요.”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른 환경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매우 추진력이 강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한 태도가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치어리더를 하게 되었는데 축구장을 여러 번 도는 훈련을 해야 했다. 한 바퀴가 2.5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녀는 반복적인 그 훈련이 싫었고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안 돼, 그만둘 수 없어. 그걸 하면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어요.” 그 후 메건 씨의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매번 달리기를 완주했다. “그 일은 제게 아주 중요했어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아빠가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만둬’라고 말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삶에 대한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특히 유별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실 저는 버스 운전 면허증을 따고 싶어요. 젊은 외국인 여자가 한국에서 버스 운전하는 것,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In Love with Korea 2023 AUTUMN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프랑스인 도미니크 에어케(Dominique Herqué) 씨에게 한국은 꿈을 이뤄가는 나라다. 땅을 살리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그 결실들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와인을 제조하며 산다. 그는 한국인 아내 신이현(Shin Ihyeon) 씨와 함께 프랑스 알자스를 닮은 한국의 ‘작은 알자스’에서 꾸리는 이 삶이 참 좋다고 말한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씨는 오랜 세월 엔지니어로 일하다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농업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알자스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아내와 한국으로 들어온 후 충청북도 충주에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작은알자스’를 만들었다. 도미니크 에어케 씨가 있는 작은 알자스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다. 마당에선 풍경(風磬 작은 종)이 쉼 없이 울려대고, 밭에선 새와 닭과 거위가 수시로 울어댄다. 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다. 자연 속의 소리는 소음보다는 음악에 가깝다. 숲과 같은 포도밭 귀마저 즐거운 ‘작은 알자스’는 수안보온천(水安堡溫泉)으로 유명한 충북 충주시(忠州市) 수안보(水安堡)면에 있다. 뒤론 산이 있고 앞은 탁 트여 있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미니크 에어케 부부가 ‘첫눈에 반했던’ 이 땅은 프랑스 알자스와 비슷한 데가 많다. 알자스(Alsace)는 도미니크 씨의 고향이다. 프랑스 최북단에 자리한 와인 생산지로, 산 밑 언덕배기에 포도밭이 많다. 흙도 까맣고 볕도 깊다. 그가 지금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그는 자주 고향을 느끼며 산다. “2017년에 여기로 왔어요. 한국에서 농사도 짓고 와인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1년간 전국을 둘러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이 땅을 만났어요.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죠.” 도미니크 씨는 아내와 가꾸는 약 4,000㎡의 농토를 ‘숲과 같은 포도밭’이라 부른다. 이들의 밭엔 10여 종의 포도나무와 30종 안팎의 사과나무가 있다. 다양한 와인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품종의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이 밭에 심은 건 포도나무와 사과나무만이 아니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무화과, 보리수, 키위, 라벤더…. 부부는 제초제나 살균제 같은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퇴비’가 되어줄 100여 종의 식물을 주위에 빼곡하게 심어 놨다. 닭과 거위가, 벌과 지렁이, 온갖 미생물이, 서로를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그와 아내는 어떻게 하면 와인을 더 맛있게 만들까보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더 많이 고민한다. 좋은 와인은 잘 지은 농사에서 오고, 좋은 과일은 비옥한 땅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는 익숙한 프랑스식 농사법을 따른다. “한국인들이 절기(節氣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에 맞춰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는 행성달력(행성의 움직임에 맞춰 농사를 짓는 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우주의 모든 행성은 매일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식물의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열매에 좋은 날, 뿌리에 좋은 날, 잎에 좋은 날, 꽃에 좋은 날이 따로 있어요. 오랜 세월 축적한 삶의 지혜를 기꺼이 따르고 있죠.” 와인 한 병에 담긴 자연 오크통에서 숙성하고 있는 레돔 내추럴 레드 와인 그들은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맛있는 과일을 얻기 위해 농약이나 퇴비를 쓰지 않고 건강하게 땅을 일구며 다양한 과수나무와 거위, 닭, 지렁이를 키워 땅속 미물까지 함께 돌본다. 그렇다고 달력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씨엔 농부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그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검토하며 농사짓는다. 예컨대 풀을 깎아놓았는데 며칠 후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갓 나온 싹이 모두 얼어버리고, 풀을 안 깎았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벌레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간의 실패가 그에게 알려준 소중한 경험들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하지만, 도미니크 씨는 단 한 해도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믿고 있다. “땅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 처음 한두 해는 참 힘들었어요. 거리의 낙엽들을 차에 꽉꽉 채워 오고, 동네 깻단을 죄다 모아와 밭에 뿌렸어요. 해마다 왕겨 5톤씩을 밭에 집어넣었고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 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어요.” 사과로 만드는 내추럴 시드르는 작은알자스의 대표 상품으로, 레돔이라는 이름은 도미니크의 애칭을 따 이름 붙였다.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사과를 발효시켜 만드는 시드르(Cidre, 영어로는 사이더 Cider), 포도로 빚은 로제와 산머루를 섞어 빚은 레드와인이다. 첨가제는 물론 효모도 넣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추럴 와인’이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 대신 ‘그 해의 모든 것’이 담긴다. 나무들을 키운 햇볕과 바람, 농부의 땀과 고민까지 와인 한 병에 고스란히 실린다. 발효 시간까지 합하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의 와인을 마시는 일은 그가 만난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다. “와인 브랜드가 레돔(LESDOM)이에요. ‘Le’는 불어로 복수를 뜻하고 ‘Dom’은 저의 애칭입니다. ‘도미니크 가(家)’란 뜻이에요. 이젠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도미니크의 아내 신이현 씨는 소설가다. 1994년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도미니크 씨가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다. 당시 도미니크 씨는 파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고, 신이현 씨는 프랑스에서 1년쯤 살아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이 모두 아는 베트남 부부가 집들이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도미니크 씨와 신이현 씨는 만나자마자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고. 파리에서 1년만 살아보려던 신이현 씨의 계획은 변경됐다. 2003년 결혼식을 올린 뒤 파리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씨가 캄보디아 회사로 가게 되면서 6년간 캄보디아 생활을 했고, 이후 그가 한국의 대기업으로 파견되면서 아내의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 살아보게 됐다. 한국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숙성 중인 레드 와인을 점검 테이스팅 하는 도미니크 씨. 그는 누구나 떠올리는 정형화된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일이 자란 땅의 성격과 맛을 와인 한 병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 한국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자신이 맡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땐 일에 허덕이느라 삶을 돌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론 매우 고마운 시기예요. 농부가 되는 꿈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알자스에서 평생 포도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포도밭을 나눠주시면서, 어릴 때부터 저는 포도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포도밭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 수확기 때마다 농사일을 거들곤 했죠. 언젠가부터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더라고요. 한국에서 그 그리움이 꿈으로 이어졌네요.” 농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미니크는 다시 파리로 갔다. 프랑스농업대학(Centre National d'Enseignement Agricole par Correspondance)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와인 양조장에서 1년간 일을 배웠다. 이제 농부가 될 차례였다. 처음에 그는 프랑스에서 포도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남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고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곳도 찾아냈지만, 이번엔 아내가 망설였다. 프랑스에선 파리 외의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타국살이를 두려워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한국엔 제대로 된 시드르 생산지가 없으니, 우리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요. 그때 저는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어요.” 2016년 한국으로 다시 왔고, 이듬해 지금의 땅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낸 지난 6년이 그저 꿈만 같다. 한여름 포도밭의 풀을 깎을 때도, 한겨울 포도나무 가지를 칠 때도, 그는 더위나 추위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낀다. 프로그래머로서 한국에 살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 매일 새롭게 그에게 찾아온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 나라를 그는 농사를 통해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꿈을 이루게 해준 아주 고마운 나라다. “지금의 ‘작은 알자스’는 지난해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양조를 위해 지은 건데, 짓다 보니 애초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어요. 공간이 커진 만큼 쓰임새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안에서 생태적 농사법이며 자연적 와인 제조법도 나누고, 술이며 농사와 관련된 작품 전시도 해보고 싶어요. 내성적인 저보다는 아내가 그 일을 맡게 되겠지만, 이 공간이 그렇게 쓰일 걸 생각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농부’ 도미니크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해가 뜨자마자 밭으로 가서, 온갖 생물들과 안부를 나눈다. 볕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에서 쉬고, 볕의 기세가 누그러지면 다시 밭으로 나가 해가 온전히 질 때까지 밭을 가꾼다. 요즘 그가 힘쓰는 일은 포도나무 가지가 처지지 않고 올라가도록 줄로 잡아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 대 초반의 포도나무인 셈이라 손이 아주 많이 간다. 꽤 힘들 텐데도 그는 자주 웃음 짓는다. 자연을 그대로 담는 그의 와인들처럼, 그의 미소에 그의 행복이 오롯이 실려 있다.  

“새로운 삶 준 한국, 제2의 고향이죠”

In Love with Korea 2023 SUMMER

“새로운 삶 준 한국, 제2의 고향이죠” 스롱 피아비(Sruong Pheavy)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당구 선수로 손꼽힌다. 한국에 온 지 10년 차, 한 남자의 아내를 넘어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그녀는 노력으로 가득 채운 시간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캄보디아를 떠나와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스롱 피아비 씨는 남편의 권유로 당구를 시작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3쿠션 프로 당구 선수가 되었다. 그녀는 당구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삶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3월 11일 경기도 일산 JTBC스튜디오에서 열린 ‘SK렌터카 PBA-LPBA 월드챔피언십 2023’ LPBA 결승전에서 스롱 피아비 선수가 월드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높은 벽으로만 여겼던 김가영(Kim Ga-young 金佳映) 선수를 제치고 거머쥔 트로피였기에 그녀에게는 더욱 의미가 남달랐던 경기였다. 세트스코어 4-3으로 승리를 확정 지은 이번 경기를 두고, 당구 팬들은 길이길이 남을 명승부라며 극찬을 이어갔다. 월드챔피언십 우승자 되다 “이번 월드챔피언십 우승은 그랜드슬램이라는 데 의미가 있어요. 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정말 믿을 수 없었죠. 승리의 여운이 계속 남아 경기가 끝난 후에도 혼자 펑펑 울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어요.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제 삶의 순간들, 그 마지막에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제가 있었죠.‘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번 승리가 정말 감사했습니다.” 월드챔피언십에 최종 우승자로 이름을 올린 피아비 선수는 “큰 승리가 사람에게 주는 자신감은 다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동안 여러 승리를 손에 쥐어봤지만, 챔피언십 승리가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예선부터 정말 힘들게 올라갔어요. 올라갈수록 몸도 마음도 부담도 커졌어요. 긴장감이 엄습할 때는 잘 때 가슴이 아파 잠을 못 이룰 정도였죠. 자고 일어난 후에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한두 시간 혼자 깊게 숨을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해야 했어요. 워낙 긴장하다 보니 몸도 제 몸 같지 않더라고요. 원래 아무리 긴장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당구는 미세한 손의 방향으로 승부가 나는 게임인 만큼, 긴장으로 인한 손 떨림은 경기에서 큰 위기였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그녀의 매니저도 “결승전을 치를 때 보니, 김가영 선수는 워낙 경험이 많아 전혀 떨지 않더라. 반면 스롱 피아비 선수는 손이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당구는 자세가 결승을 판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긴장해서 손을 덜덜 떨고 있으니 마음이 어땠겠어요. 덜덜 떠는 스스로를 보면서 저는 더 긴장되고, 긴장하니 손은 더 떨리고…. 악순환이었죠.” 하지만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꼭 부여잡고 경기에 임한 결과 그녀는 월드챔피언십 우승 소식을 고국의 부모님께 전할 수 있었다. 처음 접한 당구로 인생의 새 길 열다 지난 3월 열린 ‘SK렌터카 PBA-LPBA 월드 챔피언십 2023’여자부에서 우승을 한 스롱 피아비 선수가 트로피를 들고 세러머니를 하고 있다. ⓒ 박용선(朴龍先) 이번 월드챔피언십 경기에 이르기까지 스롱 피아비 선수는 수많은 경기를 거쳐 왔다. 2010년 한국에 온 후 2011년에 당구를 배우기 시작해 여자 당구 3쿠션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었다. 이후 2017년 프로로 데뷔한 그녀는 데뷔 10개월 만에 국내 1위라는 랭킹을 차지했다. 무섭도록 빠른 그녀의 성장에 국내 당구계는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라는 국적 때문인지 이미 업계에서는 그녀의 존재감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빠르게 순위권을 탈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서 온 제가 낯선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저도 제 삶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당구를 만나면서 모든 게 달라졌죠. 뭔가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자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들고 싶었어요. 당구를 시작한 후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던 이유죠.” 어마어마한 연습량 때문에 집에 돌아온 후에는 팔이 아파 밥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편 김만식(金晚植) 씨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런 노력이 있어야 당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약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의 권유로 시작한 당구인 만큼 남편은 저를 정신적으로 강하게 키웠어요. 제게 당구를 알려준 스승은 따로 있지만, 남편은 제 멘탈코치인 셈이었죠. 사실 결혼 후 남편과 다른 일로 싸운 적은 없는데 오로지 당구 때문에 싸웠어요. 제 시합을 보고 난 후 ‘왜 그렇게 쳤냐’,‘더 얇게 쳐야지’, ‘그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저 선수 잘하는 것 좀 봐라’라며 어찌나 혹독하게 몰아붙이던지요. 그럴 땐 저도 화나서 ‘그렇게 잘하면 당신이 쳐봐라’라고 말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말하는지 아니까 귀담아들으려고 했죠. 남편은 제게 정말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녀가 처음 당구장에 갔던 순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당구가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싶어 당시의 기분을 물었지만,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그냥 당구장이었어요.” 남편을 따라 처음 간 당구장에서 딱히 인상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그저 당구를 치는 남편을 조금 지루하게 기다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처음 당구장에 온 아내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제가 가만히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 게 미안했는지 와서 한번 쳐보라고 하더라고요. 알려 준 대로 쳤을 뿐인데 남편은 제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나 봐요. 그날 집에 오더니 ‘당구선수 할래?’라고 묻더라고요. 하지만 전 싫다고 했어요. 당구선수 해 봤자 돈만 쓰지 정작 돈은 못 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양국에 필요한 사람 되고파 처음 접한 스포츠와 언어 장벽, 고강도 연습 등으로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에도 그녀가 큐를 놓지 않은 이유는 캄보디아의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 박용선(朴龍先) 남편은 피아비 씨를 부단히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큐를 잡기 시작했다. 남편이 사 준 3만 원짜리 큐를 들고 그때부터 당구장에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구를 시작하긴 했는데 말이 안 통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스승님이랑 여러 대화를 자유롭게 하고 싶은데 한국말이 부족하니 서로 그림을 그려가며 소통했어요. 몇 년 후에는 저도 한국말이 좀 늘기 시작했고, 좀 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죠.” 처음에는 억지로 시작한 당구였지만, 나중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대하며 훈련에 임했다. 그러자 그녀의 실력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스롱 피아비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남편이 요즘 저를 보면 ‘미안했다’라고 말해요.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고요. 물론 저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캄보디아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겨냈어요. 한국에 오고 나서 제 고향인 캄보디아가 얼마나 가난한지 더 크게 체감했거든요.” 피아비 씨의 집 한 켠에는 캄보디아 아이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한국에서 꿈을 이룬 자신처럼, 캄보디아의 아이들이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적은 것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컴퓨터도 할 줄 몰랐는데, 남편이 알려줘서 컴퓨터를 시작했어요. 인터넷에 접속한 후 캄보디아의 실상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 와서 보니 내 나라가 이렇게 가난하구나 싶어 펑펑 울었어요. 그런 저에게 남편이 말했죠. ‘당구선수로 성공해서 유명해지면 돈도 많이 벌어서 캄보디아 아이들 도울 수 있어’라고요. 그동안 제 가족만 돕는다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가족을 넘어 캄보디아의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그 말이 제게 큰 위안을 주었어요. 그 이후로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피아비 선수는 우승으로 받은 상금을 차곡차곡 저축해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내고 있다. 구충제와 학용품 등을 고향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시작으로 고향 땅에 학교를 짓는 게 그의 꿈이다. 팬들의 응원 덕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그녀는 “힘들 때 팬들의 한마디와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어젯밤에도 팬들의 댓글을 읽으며 울었다. 내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도와 여기까지 왔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한국과 캄보디아, 양국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으로 캄보디아에 스포츠센터를 건립하고 싶다는 스롱 피아비 선수. 당구로서는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룬 만큼, 이제 더 큰 가치를 찾아 나아가고 싶다는 그녀는 캄보디아의 스포츠 인프라를 개선해 고향 땅의 아이들이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도록 돕고 싶다고 전했다.  

계획에 없던 삶의 여정

In Love with Korea 2023 SPRING

계획에 없던 삶의 여정 과학과 디자인, 여행과 스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마리 부스(Marie Boes)는 서울시 명예시민뿐만 아니라 많은 자격증을 획득하고 상을 받았으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예상치 못한 길을 걸어왔다. 마리 부스는 벨기에의 조용한 도시 이르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녀가 한국에 처음 방문한 건 2014년 석사 과정의 일환으로 중국에서 여름 코스를 마친 다음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한국이 떠올라 되돌아온 후 줄곧 한국에서 생활 중이다. 2016년 마리 부스가 한국에서 살기 위해 왔을 때, 그녀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벨기에에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이후 블로그는 두 개의 사업으로 진화했는데, 미디어 콘텐츠 제작사와 SEO(Search Engine Optimization: 검색 엔진 최적화) 마케팅 회사가 그것이다. 벨기에의 조용한 도시 이프르(Ypres)에서 태어나고 자란 29세의 마리 부스는 이제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보통 가족이 읽을 수 있는 블로그를 시작해요. 그렇게 저도 글쓰기를 시작했죠. 그리고 특정 지역의 지원을 받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저는 그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려 지역을 홍보했고요. 이런 일을 하고 나니 ‘와, 멋지다. 나는 겨우 23살이지만, 여행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글쓰기도 좋아하니 이것으로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전환들 한국 생활도 계획에 없었다. 2014년 석사과정의 일환으로 중국에서 여름 프로그램을 마친 후, 젊은 여성이 혼자 여행하기에 한국이 안전한 곳이라 믿고 방문하게 되었다. “어떤 기대도 없었어요. 여행 책 『론리플래닛』을 들고 온 게 다였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이킹을 많이 했어요. 해변으로도 가고, 서울도 가고, 부산, 경주, 속초도 혼자 갔어요.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1년 반 동안 일을 했고 이후 벨기에로 돌아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가야겠어. 그곳에서 정말 즐겁게 지냈지’라는 생각이 들어 한 달 계획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아직도 여기에 있네요.” 처음에는 여행 블로그 ‘Be Marie’를 운영하는 것 외에 영어도 가르치고, 스키 강사도 하고, 영화 촬영장 스태프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그녀는 또 다른 웹사이트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웹사이트를 방문할 수 있게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면서 웹 사이트 개발과 SEO(검색 엔진 최적화)를 독학했다. 블로그가 성장하고 점점 더 많은 트래픽을 끌어들이면서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고 그녀에게 웹사이트 작업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회사 중 하나인 나무마케팅이 탄생했다. 그러나 마리 부스는 미디어 혹은 정보기술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영국의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Nottingham Trent University)에서 산업 공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모든 걸 하고 싶었어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산업 공학은 그녀가 좋아하는 과학도, 디자인도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몇 개의 의료 관련 웹사이트 작업을 하고 있는 나무 마케팅을 운영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산업 공학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채로운 커리어 디자인은 마리 부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그녀는 벨기에와 이탈리아에서 산업 디자인 코스를 수료했으며, 자전거 용품과 슬라이딩 루프를 디자인한 경험이 있다. 심지어 패션 브랜드를 공동으로 론칭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해 관광업이 멈추게 되자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산상회에 지원했다. 아산상회는 북한에서 온 청년과 국내외 청년들이 함께 창업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6개월짜리 글로벌 팀 창업 프로그램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북한에서 온 한 여성과 함께 아이스토리(IStory)를 설립했다. 아이스토리는 사회적 기업 패션 브랜드로 팔꿈치에 패치를 단 티셔츠를 생산했다. 이 디자인은 남한에 정착한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개념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은 더 이상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마리 부스는 “저는 그 일이 매우 자랑스러워요. 『뉴욕 타임스』 에도 우리 기사가 나왔어요! 정말 멋졌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일로 담요, 가방, 티셔츠 등을 디자인하는데 궁궐과 사원의 목조 건물을 장식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단청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은 한국의 전통 문양에 대한 애정과 박물관에서 원하는 굿즈를 찾지 못해 직접 만들게 된 것이다.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진 않지만, 매달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 주문을 받는다. 아산상회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그녀는 북한에서 온 대학생 이지안 씨와 한국의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미국에서 돌아온 민경환 씨도 만났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목적이 있었다. 한국을 세상에 홍보하는 것이다. 이후 그들은 ‘한국 어때요(How Is Korea)’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고 영어 가르치기, 여행할 만한 곳, 음식, K-팝, 안전에 대한 조언, 택시, 카카오톡 사용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영상 콘텐츠를 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팬데믹 기간 동안 한국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전에 벨기에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K-팝과 K-드라마가 벨기에에서도 인기가 정말 많아요. 한국이 문화적으로 확실히 유명해졌다고 느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사업에 이르기까지 여행으로 와서 한국에 정착한 그녀는 웹사이트 제작, 사회적 기업 패션 브랜드 창업, 한국을 홍보하는 유튜브 채널 개설, 서울시 명예시민 등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이어가며 이곳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 마리 부스는 두 개의 회사를 운영하지만 풀 타임으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없다. 그녀는 두명의 파트너와 함께 일주일에 두 번 사무실에서 일하고, 다른 모든 일은 프로젝트 단위로 프리랜서와 일한다. 그녀는 대부분 서울 이태원에 있는 집에서 일한다. 이런 모습이 태평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매우 체계적이라고 말한다. “항상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쯤 일을 시작해요. 아침은 저에게 가장 생산적인 시간, 즉 최고의 ‘집중 시간’이에요. 이때 웹사이트 콘텐츠, 제안서, 또는 보고서를 쓰죠. 제가 최고로 집중을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오후에는 긴장을 풀고 친구를 만나거나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기 전에 근처 남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한국의 카페 문화를 사랑한다. 원하는 카페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기간 중 거의 일을 할 수 없었을 때 그녀는 뷰티 관련 수출 회사 마케팅팀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한국 회사의 위계질서와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경험했다. 한국과 한국 사람을 좋아해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는 사회적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정말 여러 면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썼어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한국인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한국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하니까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삶이 더 쉬워졌다.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친구들 대부분이 외국인이고, 대부분의 작업이 영어로 이루어진다. 사업주로서 젊고 외국인이며,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저는 무엇을 하든 남자보다 3~4배는 더 잘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그것이 결국 저를 더 나은 사업가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좋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이제 탄탄한 실적을 갖고 있다. 서울법률그룹과 같은 고객과 일하고 있으니 그것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2019년에는 한국관광공사와 서울관광공사로부터 블로그 상을 받았고, 2021년에 서울시 명예시민으로도 선정됐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 주기 마리 부스의 모든 교육과 경험은 그녀의 세월과 비례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겨우 29세인 그녀는 실제로 동년배들과 비교했을 때도 아주 다른 삶의 단계에 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아주 느릴 뿐 아니라 수줍음을 많이 타고 부적응자라고 말한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적응하는 게 항상 어려웠어요. 누구보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고요. 짧은 머리를 하고 농구를 했어요. 남자애 같았죠.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삶에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스스로 많은 장애물을 극복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대중 강연과 다른 젊은 여성들을 멘토링 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이와 관련된 몇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화여대 이과 여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젊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에게 정해진 길을 꼭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다. “반응이 아주 좋았고 저도 많은 것을 얻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선택한 길을 보면 하나의 길을 따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모든 게 잘 되었고요.” 하지만 그녀가 벨기에에서 안정적인 사무직을 갖지 못한 것을 걱정하는 할머니가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는 “이 사진이 할머니가 제가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음을 믿도록 도와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궁궐이나 박물관에서 자신이 원하는 굿즈를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단청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패턴화한 가방, 담요, 티셔츠 등의 굿즈를 직접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마리 부스는 한국이 낯선 외국인들에게 다양한 여행 정보와 한국의 매력을 소개하는 웹사이트 ‘Be Marie(bemariekorea.com)’에서 한국의 전통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굿즈도 판매하고 있다. ⓒ Be Korea Shop

‘단과 조엘’과 함께해요

In Love with Korea 2022 WINTER

‘단과 조엘’과 함께해요 그들은 자신의 주 매체인 유튜브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인인 다니엘 브라이트와 조엘 베넷은 잠시 시간을 내어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 식사를 하거나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국에서 온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 ‘단앤조엘’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새로 업로드 할 영상 촬영을 준비하던 중에도 지나가는 이웃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거나 안부를 묻는다. 그들은 이런 평범한 일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니엘 브라이트와 조엘 베넷은 서울 마포구 연남동 골목길에 있는 한 카페 야외에 앉아 영상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햇볕 좋은 가을날의 늦은 오후였다. 이들은 런던에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주최하는 한류 행사를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곧 런던으로 떠날 예정인데, 지난 5년간의 한국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을 때 나이 든 신사가 영어로 수다를 떨기 위해 멈추어 섰고,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동 카트를 타고 지나갈 때는 손을 흔들었다. 베넷은 “한국에 살며 사랑하는 순간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에요”라고 말한다.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이런 순간들은 아주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디어의 전부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 채널 ‘단과 조엘’을 운영하고 있고, 그들의 영상은 누구나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는 단순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2017년 한국에 왔을 당시, 처음에는 스테레오 타입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돌아다니면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외국인 두 명이 한국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을 찍는 식이었다. “이런 형태의 촬영을 계속하다 보니, 한 발짝 물러서서 한국을 좀 더 깊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 덕분이었고,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기 원하는지를 신에게 물어보며 보냈던 시간이었어요”라고 베넷이 회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상 스타일과 방향이 바뀌는 계기가 된 두 개의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어느 날 브라이트는 조엘이 영상을 찍는 동안 야외 테이블에서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상호작용이 시작되었죠. 브라이트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데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가능했어요”라고 베넷이 말했다. 또 다른 하나는 광장시장이 문을 닫을 때쯤 그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한 남성이 소주 몇 병을 앞에 두고 가판대에 앉아 있는 걸 봤을 때였다. “그 남자가 조금 슬프고 외로워 보였어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죠”라고 브라이트가 말했다. 베넷이 영상을 찍는 동안 브라이트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더 이상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저와 그 사람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라고 브라이트가 말했다. 이 순간이 특별한 막간의 시간이었음을 그들은 나중에 깨달았다. 이후 영상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베넷이 말하듯 ‘순간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기보다 순간을 포착하면서’부터였다. 두 사람은 폐지를 주워 간신히 살아가는 한 여자 노인이나 서울역에 살고 있는 노숙인 남성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주목하게 되었고, 이를 영상으로 찍게 되었는데 브라이트가 이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브라이트는 노숙인을 보면 항상 멈춰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베넷이 말했다. 브라이트는 영상에 달린 “아, 그건 너희들이 외국인이어서야”, “콘텐츠가 필요해서 하는 거잖아”라고 달린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콘텐츠가 맞긴 하죠. 마치 내가 이 의자에 앉은 건 이 의자에 앉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죠”라고 생각에 젖어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콘텐츠가 너무 도발적이거나 격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말하지는 않아요. 저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그 노숙인이 서울역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게 그의 정체성은 아니었어요.” 시청자들은 단과 조엘 영상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종종 그들의 따뜻함, 깊이, 그리고 영상미에 대한 댓글을 남긴다. 둘의 삶을 수렴하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둘 다 알고 있던 조시 캐롯이라는 친구를 통해 만났는데, 그 친구는 ‘Korean Englishman’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의 영상에 출연했었고, 이후 둘은 뭔가 다른 것을 해보기 위해 자신들의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이 일이 그들을 한국으로 향하게 했다. 영상에서 나타나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는 이들의 스킬과 관점 때문이다. 베넷은 런던 커뮤니케이션 대학에서 영화와 영상을 공부했다. 2010년 졸업 후 그는 마케팅 목적으로 민족지학적 영상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예를 들어 이를 닦는 모습을 찍는 것 같은 일상적인 영상들이었죠. 그래도 다양한 인구 통계적 성격을 띠었어요. 빈민가에서 부유한 지역까지, 유럽, 아프리카, 중국 등…. 이 일을 통해 무언가를 그저 표면적으로 보지 않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브라이트는 2019년 같은 학교에서 온라인으로 포토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전에는 SOAS 런던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언어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2년 동안 KOTRA 런던 무역관에서 일했다. 북 웨일스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동안 그는 한국에 대해 꽤 잘 알게 되었다. 그가 다닌 교회 목사의 부인이 한국인이었고, 2012년 교환 학생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반면 베넷은 2002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몰랐다. 비보잉에 한창 관심이 있던 그는 막연하게 한국에 많은 스트리트 댄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를 통해 2011년 포항에서 4주간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이고 재미만을 추구하는 영상을 촬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튜브는 전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통로다. 한국인이라는 것? 카메라는 ‘우리 친구들(Woori Mates)’ 시리즈를 위해 한국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향하기도 했다. 이때 대화를 나누는 형식은 같았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내가 과연 한국인이 될 수 있을까?’였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 이주자들은 수십 년간 자신들이 이주한 나라에서 잘 북 웨일스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정체성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걸 듣는 건 신선했다. 베넷에게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영국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저는 런던 근처 베드포드라는 다문화 사회에서 자랐어요. 제 친구들 대부분은 혼혈이었고요” 작년에 그가 비자 문제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진짜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브라이트가 ‘너는 네가 한국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가 그곳을 떠났을 때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현재 필리핀에서 자란 한국인 여성과 약혼한 상태고 ‘제3문화’ 아이들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그들 콘텐츠의 한 부분이다. 이 주제에 대한 브라이트의 견해는 한글로 쓴 그의 책 제목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에 요약된 듯하다. 이 제목은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는 “마포구는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정착한 곳이고 현재 제가 사는 곳, 유튜브를 만들기 시작한 곳, 저희 아이가 태어난 곳입니다.”라고 말한다. 브라이트의 아내는 한국인으로 두 사람은 런던에서 만났다. 부부에게는 아누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 “저는 아이가 ‘오, 나는 진짜 영국인이야’, 혹은 ‘오 나는 진짜 한국인이야’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저는 정체성 문제가 그에게 너무 큰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죠. 저는 정체성이란 본인이 자신에 대해 느끼고 본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카메라를 자신들에게 돌릴 때면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권 사람들의 데이트와 결혼, 한국에서 영국인 아버지로 살기, 타투, 기독교 신앙, 그리고 음식과 같이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이슈들에 대해 토론한다. 가끔 한국어를 하기도 하고 또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두 언어의 외국인 악센트와 사투리가 재미를 더한다. 브라이트와 베넷은 유튜브를 통해 종종 진솔한 이야기를 꺼낸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나,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이나 노숙자와의 식사 등을 담기도 한다. 화려한 영상이나 주제도 좋지만, 이야기에 힘을 싣는 건 결국 사람이라고 말한다. ⓒ DanandJoel 음식으로 연결되다 음식은 ‘단과 조엘’ 유튜브 콘텐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영상에 등장하고 때로는 중심 주제가 되기도 하며, 가끔은 배경이 된다. “어릴 때부터 저는 정말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라고 베넷이 말했다. 어느 시점에 그는 고기 먹는 것을 중단했고, 버거 식당에서 열린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야채 버거를 주문했을 때 놀림 받았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다 한국으로 왔어요. 그리고 바비큐를 처음 먹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근데 음식보다도 한국인들이 음식을 먹는 방법, 함께 먹는 모습이 더 특별했어요. 테이블 주위에 함께 둘러앉아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같이 먹는 식문화 같은 것들은 저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지요.”라고 말했다. 브라이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저는 음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에서 자랐어요. 거의 모든 식사가 있기 전에 우리는 ‘오늘 메뉴가 뭐야? 오늘은 뭘 먹지?’라고 했을 정도였죠. 모든 식사에 아주 열정적이었고 너무 중요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저는 음식이 정말 중요한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의 음식 문화를 정말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아내는 그의 음식 사랑을 함께 나누고, 두 사람은 음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음식은 아주 소중하고 제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라고 브라이트는 말한다. 음식을 두고 같이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아주 단순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이다. 단과 조엘의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는 31만 명(2022년 11월 기준)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널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건가요?”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베넷은 “아뇨!”라고 말한다. “저도 동의해요”라고 브라이트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프리랜서 작가 일과 영화 일을 통해 수입을 보충한다. 브라이트는 토끼 소주의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프로듀서로 파트타임 일을 하기도 하고 베넷은 개인 유튜브도 운영한다. 5년 동안 256개의 영상을 만든 지금, 두 사람은 이제 변화의 단계에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유튜버보다는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이용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한다. 이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중단할 때가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채널 구독자들은 용기를 주면서 중단하지 말라고 댓글을 단다. 지금으로서는 적어도 한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계속 나눌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월스트리트에서 서울의 골목길로

In Love with Korea 2022 AUTUMN

월스트리트에서 서울의 골목길로 12년 전 인수합병 거래를 위해 한국에 온 마크 테토 씨는 한옥이 자신의 삶을 바꿀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게 정말 즐거워요. 저는 예술 학교에 다니지도, 예술이나 예술사, 예술 비평을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마크 테토 씨는 한옥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더 깊은 지식과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여전히 한국의 예술가들을 만나며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배우고 있다. 마크 테토 씨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완벽하게 성공한 뉴욕커일지도 모른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와튼 경영 대학원 MBA를 취득하고 월스트리트 모건 스탠리에서 투자은행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왜 맨해튼에서의 생활과 아파트를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일을 찾고 서울의 높은 지역 골목길 꼭대기에 위치한 한옥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테토 씨는 2010년 삼성전자에 새로 조직된 글로벌 인수합병 팀에 신입으로 채용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하나의 모험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국 문화와 음식을 좋아했어요. 그게 충분히 위안이 되었죠.”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강남에서 일하며 살게 되었고 음식과 밤 문화, 그리고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서울의 문화를 즐겼다. 몇 년 후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 달리 그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주는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제 테토 씨는 한국말과 글쓰기를 놀라울 정도로 유창하게 하면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국적인 것들에 대해 전문가다. 2018년에 그는 경복궁 명예 수문장이 되었고 1년 후에는 서울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북촌에 있는 자신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옥은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지식과 관심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세 개의 목표, 새로운 길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토 씨는 한국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모르지만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노력하기로 했다. 직업적으로 전문성을 키우며 좋은 성과를 내고, 한국어를 배우고, 다양한 직업군의 한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었다. “어쩐지 이 세 가지를 잘하면 더 흥미로운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5년이 지난 후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회사를 바꾸고, 집을 바꾸고, 갑자기 TV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먼저, 테토 씨는 TCK 투자회사로 옮겼고 이제 그는 이 회사의 공동 CEO이다. 이 회사는 그와 비슷한 전망을 하고 있던 오하드 토포르(Ohad Topor) 씨가 처음 만들었는데 서울을 기반으로 글로벌 재정 관련 일을 한다. 글로벌 투자와 함께 테토 씨는 벤처캐피털 영역에서도 활동한다. 두 번째로, 그는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새집이라고 하기보다 오래된 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난 흥미로운 사람 중 한 명인 박나니 씨는 한옥에 대해 책도 냈고, 그에게 북촌의 한옥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즉흥적으로 그녀를 따라 이곳에 왔어요. 저는 이사를 할 계획이 없었는데 그녀가 이 집을 보여줬고, 이제 저는 여기 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새로운 지하실을 포함해서 개조된 집은 “삶이 평행으로 펼쳐지는 집”이라는 의미의 ‘평행재(平幸齋)’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테토 씨는 JTBC 프로그램 에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들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때때로 토론이 전통적인 것과 관련되면 그는 자신의 집에 대해 말하게 돼 곤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테토 씨는 한국 문화에 꽤 박식한 외국인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테토 씨는 필요에 의해서 한국의 전통 가구와 예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가구나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가구들이 자신의 한옥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에서 살 작정이면 제대로 집을 꾸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간에 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조선시대와 그 당시 사람들 집에 어떤 가구가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감정사에서 수집가로 거실 탁자를 알아보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해 테토 씨는 예술 감정사, 수집가, 작가, 그리고 강사로 변화했다. 결국 그는 전통 격자문에서 영감을 받아 팔각형 모양의 탁자를 스스로 만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반닫이는 여기에, 도자기는 저기에 놓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집안의 다른 가구들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그래서 박물관을 다니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조선백자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고려청자, 그리고 신라 토기까지 이어졌어요. 이전 시대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앞으로도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죠. 달 항아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의 현대 예술가들 이름이 뜨는 거예요. 구본창(Koo Bohn-chang, 具本昌)과 강익중(Kang Ik- Joong, 姜益中) 같은. 백자 달 항아리 패턴이 한국의 현대 예술에도 등장함을 알게 되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고려시대 백자 하나가 부엌의 조리대 위에 놓여 있고 커피는 허명욱(Huh Myoung-wook, 許明旭) 작가의 다채로운 옻칠 구리 컵에 제공된다. 거실에는 구본창 작가의 영묘한 청화백자 사진을 담은 병풍이 있다. 신라 토기 하나는 조선시대 목재 궤를 장식하고 있고 그 위에는 현대의 단색화 그림이 걸려 있다. 벽장에서 테토 씨는 자연스럽게 고대의 나무 도시락통과 통일신라시대 와당을 꺼내와 보여준다. 아래층에 있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옷장의 슬라이드 문을 열면 조선의 책가도에서 영감을 얻어 구성한 선반과 받침대가 나타난다. 여기에 그의 옷들이 수집품처럼 걸려 있다. 손님방의 침대를 마주 보는 벽에는 한지에 프린트한 김희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정원으로 난 격자문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방이 확장되고 외부가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테토 씨의 수집품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혼합되어 있고 모든 것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모든 현대 작품들은 그가 잡지를 위해 예술가들을 인터뷰할 때 만났던 사람들이 만들었다.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작품이 훨씬 더 의미가 있게 됩니다. 작품은 그저 하나의 오브제가 아니고 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거죠.”라고 그는 설명하면서 지승민 도예가가 만든 그릇을 예로 들었다. “이 접시들은 그냥 접시가 아니에요. 제가 작가를 알아요. 그가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만났죠. 저를 결혼식에 초대했고요. 그래서 이제 이 물건들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한국적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그가 사는 한옥 ‘평행재(平幸齋)’에는 집에 꼭 어울리는 고가구와 도자기, 작품부터 직접 제작한 가구, 소품 등으로 가득하다. 한국에서의 삶 제2장 지난 4년 동안 테토 씨는 50여 명의 예술가를 만났다. 이로 인해 그는 한국의 예술에 대해 소중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배운 내용을 강의할 기회가 생겼다. 외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의 예술에 대한 강의를 처음 요청받았을 때 그는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라고 자문했다. 자신이 진행한 인터뷰와 자신의 집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의 전통 예술과 현대 예술을 관통하는 세 가지 특징이 보였다. 여백의 미, 자연의 미, 그리고 정이 그것이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는 조금 다르게 보는 것 같아요. 제가 공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한국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대단하게 보인다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의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게 정말 즐거워요. 저는 예술 학교에 다니지도, 예술이나 예술사, 예술 비평을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테토 씨는 이제 스스로 ‘한국에서의 삶 제2장’이라 부르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5년 동안 한옥에 살고 난 지금의 마크는 아주 다릅니다.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많은 걸 배우고 저 자신도 변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는 독지 활동을 통해 사회 환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는 ‘박물관의 젊은 친구들’에 가입해 함께 모금 활동을 펼쳐 일본으로부터 두 점의 귀한 불교 유물을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미국의 수집가로부터 신라시대 수막새 21점을 구입했고 이 또한 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외에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발레단 지원 활동도 한다. 대문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작은 정원은 그가 직접 꾸미고 가꾼 꽃과 나무가 계절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새로운 시각 올해 테토 씨는 5월 중순에 열린 ‘2022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대사로 활동해 주길 요청받았다. 그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위해 몇 가지 이벤트를 주관하고 사회적 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뉴욕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몇 개가 있지만 그는 거의 가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박물관과 한옥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테토 씨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77,000여 명이다. 그리고 여기에 남겨진 코멘트를 보면 그가 한국의 예술과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주변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의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그는 이웃 동네 느낌을 즐긴다. 한국 문화에 관해 쓴 글에서 그는 이 골목길들이 서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곳에서 도시의 진정한 삶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입구에 걸려 있는 조선왕조의 한 관료(테토 씨는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아직 조사 중이다)가 테토 씨가 신발을 벗는 동안 지켜본다. 많은 한국인이 뉴욕을 동경하지만 테토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한국에서 아주 흥미롭고 다채로운 삶을 찾았어요. 제가 미국에 있다면 대체로 매일 직장에서 일하고 귀가하는 식이었을 거예요. 그게 다였겠죠.” 그리고 아마도 월마트에서 구입한 가구에 앉아 그곳에서 구입한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있을 거라고 그는 혼잣말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현관에서 마주하는 평행재(平幸齋)의 수호신이라 부르는 초상화는 20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윤정(Cho Yoon-jung 趙允貞)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기회가 이끄는 대로

In Love with Korea 2022 SUMMER

기회가 이끄는 대로 한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짧게 머무르는 정류장과도 같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이 일을 지속하고 있고, 원래 하고 싶었던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 좋아하는 일을 시도해 보는 걸 주저하지 않기에 다른 영역에도 손을 대본다. 네오팝 작가이자 영어 교수, 그리고 보디빌더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내는 크리스토퍼 매슬론(Christopher Maslon)은 좋아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파란 셔츠와 넥타이를 맨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누가 봐도 여느 영어 교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프라이프 넥타이가 생기를 더하면서 교수 이상의 무언가가 기대된다. 소셜 미디어에서 그를 찾아보면 그의 페이스북은 온통 예술과 관련되어 있고 반면에 인스타그램은 보디빌딩 사진으로 가득하고 가끔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계정이 혹시 해킹당한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저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아요. 각각 다른 일은 다른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걸 좋아해요”라고 매슬론 씨는 말한다. 교수라는 직업 외에도 그는 예술가이고 보디빌더이기도 하다. 코스프레를 사이드잡으로 하면서 가끔 모델이나 공연, 혹은 빅토리아 고딕 예술과 패션 관련 일을 한다. 그의 삶의 태도는 기회가 주어지면 이를 좇아가고, 그것이 낯선 영역이라면 배우면서 해보는 식이다. “제게 주어진 일이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면 저는 완전히 그 일에 몸을 던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뛰어든 건 아니다. 기회를 잡아라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거주하고 있을 당시 한국인 이웃이 보낸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매슬론 씨는 이를 무시했다. 메일은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매슬론 씨는 메일을 받고 바로 삭제했는데 며칠 간 메일이 신경 쓰였다. 컴퓨터공학 교수였던 그 이웃에게 메일에 대해 묻자“당신이 적임자예요!”라고 말했다. 당황한 매슬론 씨는 이를 부인했지만, 곧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공짜 비행기표가 제공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말이다. “2002년 3월 31일에 한국에 왔어요. 이날을 저의 ‘한국 생일’이라고 불러요. 그게 20년 전이고, 이후 돌아가지 않았죠.” 그때는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해였다. 매슬론 씨는 축구팬은 아니었지만 월드컵 열기에 사로잡혔다. 한번은 저녁 식사에 참석해 한 중년 네델란드인 옆에 앉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고 그가 한국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에 있었던 게 너무 좋았어요. 마법에 걸린 것 같았죠. 저 자신이 역사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슬론 씨는 한국인의 근면성을 존경하게 되었고 한국 음식과 사극드라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왕과 양반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교회에서 알게 된 언어학 학생 권선애 씨와 사랑에 빠졌다. 3년 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기억을 되살리며 매슬론 씨는 웃었는데, 오하이오의 집주인이었던 한국인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첫 여성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마!” 매슬론 씨 부부의 딸 엘리자베스는 2006년에 태어났다. 생각지 않게 매슬론 씨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동아기술고등학교에서 아홉 달을 가르치기로 계약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찾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는 뭔가 설명하고, 나누고, 묘사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가르치는 일은 제게 너무나 잘 맞아요.” 3년 후에 그는 대전보건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영어뿐만 아니라 예술사, 그리고 디자인과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TESOL 석사학위도 받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 매슬론 씨에게 가르치는 일은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를 싫어한 걸 차치하더라도 자신은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살 때인 어느 날 혼자 놀게 되었을 때 그는 크레용이 담긴 박스를 찾아내 벽 전면에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검정과 보라색으로 칠한 나무와 동물들 그림이었다. 매슬론 씨의 주 작업은 실크스크린 판화인데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처음 본 앤디 워홀의 아이콘 작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내 머리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판화 작업에 매료되고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와 캠벨 수프 깡통 만들 때 사용한 작업 과정을 배우는 데에 몰두했어요.” 자신이 삶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오하이오의 콜럼버스미술디자인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실크스크린 예술에 몰입했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 직지심체요절 』을 포함해 한국이 유서 깊은 인쇄술 전통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뻤다. 다행이도 그는 가르치는 일 외에 남은 시간을 예술 작업에 쓸 수 있었고 곧 외국인 예술가 집단인 대전국제미술가모임(DJAC)에 합류하게 되었다. “Lucky Numbers”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Telephone Series #1 (3)”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네오팝 정체성 2015년 DJAC 봄 전시회에 출품한 1940년대 미국 냉장고를 보여주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품이 한 갤러리 대표의 눈에 띄었고 이 만남은 그의 예술 커리어에 돌파구가 되었다. 갤러리 대표는 매슬론 씨를 한국판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음각인쇄잉크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판화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죠. 니르바나에 온 것 같았어요. 저에게 두 달 간 체류가 제공되었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날개를 펴고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었죠.” 두 달 동안 그는 6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네오팝 예술가로 정체화했으며 플라스틱 판화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란 제목이 붙은 시리즈는 레이디 가가의 동명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고 2019년 대전의 갤러리 이안에서 단독 전시회에 발표했다. 이 시리즈의 작품 중 네 점은 현재 미국 나사(NASA)의 필립 메츠거 물리학박사 연구실에 걸려있다. 두 사람은 해안모래채취그룹 회원으로 온라인에서 만났다. 그의 작품에서 좀 더 깊은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슬론 씨는 “제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세탁기, 건조기, 전화기, 타자기, 축음기, 그리고 동물 또는 식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보디빌딩을 축소 인화한 사진도 있다. “저의 네오팝 판화들은 수집품 같은 거예요. 현대와 빈티지 이미지를 섞어 놓은 흥미로운 합성체죠.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느낌이나 복합적인 느낌을 표현합니다. 흐릿한 집합체이거나 종종 불분명한 이미지들을 겹쳐놓은 것들이죠.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기 어렵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저는 개별적인 대상물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흠모하고 경건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줍니다. 사람들이 공부하고 감탄하도록요. 저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표시하는 것, 개별성을 갖는 것, 어떤 것이 정체화되어 적절한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무엇과 관계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크리스토퍼 매슬론은 일과 예술 외에도 보디빌딩을 즐긴다. 그는 운동을 통해 변화된 몸이 자신감은 물론 여러 가지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 Christopher Maslon 보디빌딩 & 고딕 상상력 그가 좋아하는 두 가지, 즉 가르치는 일과 예술 외에도 매슬론 씨에게 보디빌딩은 그가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이다. 2004년에 그는 몸이 너무 약해진 걸 깨달았다. 영어를 가르쳤던 고등학교의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고 3년 동안 개인 트레이너와 거래를 했다. 한 시간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한 시간 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보디빌딩 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이걸 할 거야”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일 년 후에 그 쇼의 무대에 섰고 자신의 체급에서 3등을 했다. 2014년에는 서울 머슬마니아 대회 남성 클래식 부문에서 3등을 했다. 대부분의 영어 교수들 이력에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 몸이 너무 말라서 해변에서 셔츠를 벗기 싫어했던 소년이었던 매슬론 씨는 “보디빌딩은 제 몸을 바꿨을 뿐 아니라 저의 자신감도 바꿔놨어요. 제 삶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라고 말한다. 보디빌딩과 자신의 페이스북 사진들은 ‘놀라운 기회들’로 연결되었다. 한 모델 에이전시가 전설의 영화배우 이순재 씨가 광고한 영어 앱 ‘산타 토익’을 텔레비전에 광고하기 위해 근육질의 외국인을 찾고 있다가 그에게 연락을 했다. 또 영화 에서는 미국 과학자 역을 맡아서 3초 정도 등장하기도 했다. 때때로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기도 하는데 슈퍼 히어로나 빅토리아 시대 복장을 하는 걸 즐긴다. 빅토리아 시대와 고딕 문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1960년대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였던 와 매사추세츠 몬손에서 거의 200년 된 집에서 성장했던 그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대전에 거주하는 알라 포노마레바(Alla Ponomareva) 씨와 함께 작업한 판타지 사진 프로젝트 이후 매슬론 씨는 요즘 소품을 많이 만들고 있다. 뼈대, 해골, 고딕 시대 관, 티파니 스타일 등잔 등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거라면 그는 뭐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의 완벽한 매슬론 씨가 말을 할 때면 표정에서 마치 축제가 벌어지는 듯하다. 대화의 주제에 따라 표정을 바꿀 때면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 근육이 움찔거린다. 그는 손으로도 여러 제스처를 취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의 오하이오 한국인 이웃이 매슬론 씨가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놀랍게도, 내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그가 말했어요. 저는 쉴 새 없이 말하고 손을 써가며 말을 해요. 저는 시각적 인간이에요.” 하지만 미국을 떠난 후의 경험을 묘사하면서 그는 가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눈을 감아야 해요.”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국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어요.” 그는 머릿속으로 지난 20년을 떠올리고 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여정이 지금까지 97%는 좋았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그는 이걸 혼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여기엔 누구도 초대하고 싶지 않아요. 아주 사적인 일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그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윤정(Cho Yoon-jung 趙允貞)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In Love with Korea 2022 SPRING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이 젊은 프랑스 남자가 하고 있는 일, 그의 예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는 오랫동안 “소리와 시각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합시켜” “이질적인 요소가 만나게 하는 일” 혹은 “두 세계를 함께 채집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선택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체류자와 달리 해미 클레멘세비츠 씨의 여정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자라면서 그는 예술대학 교수로 아시아에서 종종 전시회를 연 아버지를 통해 한국과 주변 국가에 대해 들었다. 마르세이유-지중해 미술학교(ESADM)에 입학할 즈음에 클레멘세비츠 씨는 아시아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중 한 친구의 초대로 2009년에 독학한 한국어로 무장해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그 첫 방문이 제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곳에 저랑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들이 있고 동시에 제게 익숙한 것들과 완전히 다름을 느꼈어요. 그리고 어쩐지 이 다른 것들이 제게 아주 잘 맞았어요.” 이후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방학 동안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는 이 여행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흡수하는 동안 그는 서울의 실험적 예술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신의 예술 아이디어에 아주 수용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더욱 한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대학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외국에서의 인턴 경험이었고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울에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의 한국인 친구 한 분의 도움으로 그는 2011년에 예술 컨설팅 회사에서 4개월 동안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되었고 한국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한국에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2013년 그는 영구적으로 머물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리 클레멘세비츠 씨는 종종 사운드 예술가, 혹은 인터미디어 예술가라고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단순히 “소리에 관심이 있는 예술가”라고 소개한다. 한국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그는 두 개의 영역을 오간다. 실험적 음악과 소리를 조합한 시각 예술이 그것이다. “소리는 제게 가장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소리와 시각 예술 두 영역이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 결과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한 주 동안 그는 음악 공연을 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가장 최근에 만든 “소리 조각 작품” 또는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곡을 하고 안무가와 협업해 공연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피커 국기, 망가진 국기(Speaker Flag, Broken Flag)” 같이 많은 작품이 고장난 스피커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태극기 중앙에 스피커가 있다. “통역을 위하여(For Interpreters)”는 수화를 사용하는 비디오인데 시청자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 작품은 “소리 없이 소리를 표현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지난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주요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홍대 근처의 작지만 실험적인 공간에서 작업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인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국제적 정취가 물씬한 서울 이태원 지역에 있는 데이크아웃 드로잉 카페에서 2014년에 작업했다. 두 달 동안 매일 그는 그곳에서 즉흥 솔로 콘서트나 초대 손님이 있는 공연을 하거나 더 많이는 그저 리허설을 했다. 확실한 틀이 없는 공연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제대로 된 콘서트와 리허설 사이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2013년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Rémi Klemensiewiczs는 시각과 청각의 관계, 존재와 해석의 차이를 작품으로 옮긴다. 주로 소리를 소재로 하여 전시, 라이브 퍼포먼스, 무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수수께끼 클레멘세비츠 씨는 역설과 애매모호함을 즐기는 듯한데 이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존칭법은 보통 개인 간에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는데, 특히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서 그렇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있을 때 학생이 언어뿐 아니라 몸짓이나 다른 미묘한 것들에서 예의를 갖추는 걸 볼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관계의 룰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는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아요. 프랑스에서 제가 느끼는 것과 정반대죠. 프랑스에서는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얘기 나누지만 선생님과 친하다고 느낀 적은 드물어요.” 그는 자신의 고국과 한국의 외적인 면모에서도 역설적인 것을 발견한다. 파리와 프랑스의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전통과 영성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건물들이 좀 뒤죽박죽처럼 보였어요. 근데 시각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신에는 질서가 있다고 느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두 나라를 비교하자면 프랑스는 외부에는 질서가 있지만 내부엔 혼란이 있어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혼란이 있지만 내면에는 질서가 있고, 전통과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 같은 발견이 그를 설득하고 자극해서 한국에 눌러 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자 때문에 팬데믹 동안에 많은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시골에 머물렀고 최근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콘크리트와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미묘하게 겹쳐져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지하철을 따면 주변의 산자락까지 이동할 수 있고 한강변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아파트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습을 보인다. “이런 건 완전 짱이죠.”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2019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순천의 예술공간 돈키호테(Artspace Donquixote)에서 Rémi Klemensiewicz가 중 ‘Handmixer’의 한 장면을 공연하고 있다. 생계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프랑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프랑스 유튜브 사용자들을 위해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만들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기분전환으로 만든 것이 진지한 일로 변했다. 결국 한글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을 포함해서 수업을 계획하고 작성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수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리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서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한국어과 프랑스어를 오가는 언어 수업 덕분에 다행히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가르치는 일이 균형을 잡는 데에도 좋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진정 언어를 갖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한글의 시각적인 면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작업에 녹여내기도 했다. 2018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한 “소리 말 시리즈”는 스피커와 케이블로 만들어진 한글 단어를 선보인다. 전시회의 일부로 초대 뮤지션들과 함께 케이지 공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에서 네 음(G, A, G, E)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음으로 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예술 수업 강의는 그에게 안정적 수입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중학생들과 예술 워크숍을 진행하는 걸 시작으로 이제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소리와 시각 자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에서 “소리 디자인”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한국현대무용단과 협업도 하게 되었다. 2017년 10월 12월부터 28일까지 서울 소재 복합문화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된 전시 에서 Rémi Klemensiewic가 선보인 작품 ‘Interpreted Masks’이다. 종이마스크와 스피커, 케이블과 소리로 구성됐다. 과정 클레멘세비츠 씨의 작업은 규정하기 어렵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점이 있다. 그가 보고 듣는 것 모두가 그의 예술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을 알면 계속해서 변하는 한국에 대한 그의 거의 본능적인 애착이 좀 더 잘 이해가 된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전형적으로 밀월기간이었다. “바닥에 자면서 행복했어요. 매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게 행복했어요. 매일 비가 내려도 행복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작업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일과 사적인 삶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 예를 들어 밤에 전화를 해서 다음날까지 10페이지 번역을 요청하는 것 같은 - 조금씩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일과 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모든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9년을 보낸 클레멘세비츠 씨의 삶은 실험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과 닮았는데, 그에게 영향을 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강조한 것처럼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안무가 노경애 씨와 프랑스의 모교와 함께 하는 교환 프로젝트에 그가 푹 빠져 있는 게 놀랍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청각장애인 댄서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기로 되어 있다. 32살인 그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전시회를 하자고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자문한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라는 조언을 기억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리스크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조윤정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 사진가

기적이 일군 삶

In Love with Korea 2021 WINTER

기적이 일군 삶 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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