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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삶과 꿈에 대한 치밀한 복원

고구려는 단지 15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한국인에게 고구려는 민족의 긍지를 느끼게 하는 기억의 원천 중 하나다. 그러기에 오늘날 고구려의 역사를 환기하고 복원하려는 노력이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저 편에 있는 역사인 만큼, 고구려의 모습을 전하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이런 현실에서 오랜 세월 땅속에 숨어 있다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고구려 고분 벽화는, 오래된 타임캡슐처럼 고구려인의 삶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는, 고구려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기억하고 싶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큰 행운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다. 역사 자료라고 하면 마치 흑백의 무미건조한 문자 자료를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컬러 사진첩을 보는 것처럼 화려한 색상으로 묘사된,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과 일상 장면은 천년의 시간을 넘어 먼 과거와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분명 고구려 벽화를 보는 것은 색다른, 그리고 마음 설레는 경험이다. 사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것이 갖는 사료적 가치를 넘어서 그 다양한 소재나 생동감 넘치는 묘사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라면 고구려 고분벽화 한두 장면쯤은 아주 쉽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벽화 속에서 고구려인의 삶의 모습을 읽어내고 복원하는 결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상당수 벽화고분이 모습을 드러낸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그것은 하나의 오래된 사료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한 장면씩 복원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을 지은 전호태 교수의 공이다. 저자는 20여 년이 넘게 오로지 고구려 고분벽화에만 매달려왔다. 이제는 무르익은 저자의 안목으로 고구려인의 삶과 꿈을 복원한 것이니, 이 책이 갖는 실증성과 신뢰성에 대해서는 굳이 첨언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고구려인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 그리고 문화의 여러 양상들을 17개의 주제로 나누어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고구려인의 일상생활을 의식주는 물론 놀이, 춤과 노래, 사냥 등 삶의 구석구석을 모두 짚어보고 있다.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는 신화의 세계, 하늘세계, 별자리, 불교문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구려인이 남긴 문화는 무덤과 성곽, 전쟁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그 요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90여 개가 넘는 고구려 고분에 남아 있는 수많은 벽화들을 주제별로 해체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갖는 최고의 미덕은 벽화에서 저자가 읽어낸 고구려의 삶과 꿈을 다시 벽화 한 장면 한 장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오직 고구려 벽화에만 몰두해온 저자이기에 가능했다.
2부는 고구려의 성립에서 발전, 멸망에 이르는 전개 과정을 짧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700년 고구려사의 자취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에, 뼈대만을 추려 정리한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도 저자의 고구려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1부가 고구려 문화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 글이라면, 2부는 고구려 역사가 갖는 시간의 깊이를 드러낸 글이다. 1부와 2부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이 책은 비로소 고구려인과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보여주는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받은 감동 중 하나는 벽화에 대한 저자의 세심한 관찰력이다. 벽화 도록을 들여다본다고 그림 속의 묘사 하나하나가 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잔잔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고구려인의 삶 하나하나를 눈에 잡힐 듯이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수많은 삽화들은 저자의 생동감 있는 관찰과 글을 통해 복원된 모습으로 독자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이제 고구려 벽화고분은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오늘 우리들에게 그곳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고구려인의 의식과 손길과 그들이 꿈꾸고 그렸던 이상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더욱 커졌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한국 문화의 오랜 뿌리의 하나인 고구려인과 고구려 문화를 더욱 친근하게 만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