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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보낸 92일간의 추억

지난 2006년 2월부터 3개월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한국연구펠로십 덕분에 서울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한국의 교육 정책에 관해 박사 과정 논문을 작성 중이었던 내게 이런 도움은 대단히 요긴했다. 통계청에서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할 수 있었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정보자료실은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또 매주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의 한국어 교실에서 꾸준히 공부도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원고를 의뢰 받았을 때,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지금하고 있는 연구에 관한 것보다는 92일간 한국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한국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의 한국어 실력은 중급 정도다. 과연 3개월 만에 어떻게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갔는지 놀랍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나의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수년간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어 교실에 다녔다. 또 정기적으로 한국인 교회 일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한국어를 배웠다.
이미 한국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의외로 내가 한국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크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집에는 김치냉장고도 있었고, 한국 음식을 자주 먹었으며, 한국인 친구와 가족들이 전 세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과거 내가 두 살 때인 1981년과 1992년 한국을 두 번 방문했을 때보다 한국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킨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한국은 1992년 이후 놀랄 만한 변화를 겪었다.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색 빛 김포공항은 현대적인 인천국제공항으로 변해 있었다. 공항과 육지를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를 지나며 그 발전 과정이 매우 집중적인 것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안내를 맡은 분은 서울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다른 건축적 기준보다 기능성을 우선해 조성된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교통 혼잡과 대기오염이 더 심해졌고, 부유한 사람들은 여전히 외제 차를 몰았다. 슈퍼마켓에 가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을 지나갈 때면 보호주의 정책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지나칠 정도로 과잉보호되고 있었다. 열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한국 아이들은 오로지 집과 학교, 학원만 왕복하는 생활을 한다. 이런 아이들의 상황을 보면 어릴 때 지나치게 자식을 보호한다고 여겼던 우리 부모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중해 국가 출신인 나로서는 너무 심하게 날씬해지려 하고, 창백한 피부를 가지려는 여성들의 강박관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공개적인 입맞춤이라는 것이 없으며, 최소한의 신체적 접촉만을 하는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이 서로 손을 잡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모습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스페인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휴대전화와 힙합 음악을 좋아한다. 지난 1992년 여름의 최고 인기곡이었던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이제는 비와 보아가 대체했다. 축구 팬들의 수가 늘어난 것도 놀라웠다.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얘기하면 항상 처음에 듣던 소리 중 하나가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이겼다는 얘기였다.
체류 기간에 고모님 댁에서 지냈기 때문에 나는 일과시간을 고모님 식구들의 일정에 맞추어야만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오후 6시에 저녁을 먹는 일이었다. 몇 달을 지내면서 나는 한국식 생활양식을 직접 체험했다.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하고, 일하고, 또 일만 했다. 주말이 되어서 나는 북한산에 올라보기도 했고, 부산과 경주에도 갔으며, 몇몇 ‘콘도’에도 다녀왔다. 또 처음으로 설도 세고(사촌들을 위해서 돈을 좀 가져왔어야 했는데!) 어버이날,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는 것도 즐겼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이 글에 다 압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라도 더 읽고 싶고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면, 한국 여행기를 담은 내 블로그(www.alvaroencorea.blogspot.com)를 찾아주길 바란다. 내 논문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 것 외에도 한국에서 보낸 3개월의 기간은, 내가 누구인지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었고, 과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많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모든 이유에서 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대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