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의 세계] 서울 북촌을 대표하는 백년 고택, 백인제가옥
돌계단 위로 높이 솟은 대문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위엄을 상징했던 한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백인제가옥은 그 겉모습만 보면 격조 높은 전통 한옥입니다. 하지만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접목한 색다른 모습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천여 채의 한옥이 밀집해 있는 북촌 한옥마을에서도 특별한 규모와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지닌 명소입니다.
건물이 지어진 때는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가 시작된 후인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성은행의 전무였던 친일파 한상룡이 주변 가옥 열두 채를 사들여 집터를 마련하고 백두산의 소나무를 가져다 집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로서도 파격적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가옥에서 조선총독부의 고관대작을 위한 연회가 종종 열렸던 것이 영화 <암살>에도 등장합니다. 이후 이 가옥은 한성은행을 거쳐 민족자본 진영의 언론인이었던 최선익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고, 1944년에는 백인제 박사가 사들이게 됩니다. 백인제 박사는 백병원의 설립자이자, 독립운동단체인 흥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2009년에 서울시가 이 가옥을 인수할 때까지 가장 오래 소유하고 거주한 주인이 백인제 일가이기에 백인제가옥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습니다
백인제가옥은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기조로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지어졌다는 평을 받습니다. 대지 가운데에 사랑채와 안채, 넓은 정원과 마당이 자리하고 가장 뒤쪽의 높은 곳에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가장 독특한 것은 사랑채와 안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통 한옥은 두 공간을 별개의 동으로 구분하는 반면, 백인제가옥은 일본식 복도를 도입하여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했습니다.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된 것도 전통 한옥에서 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사랑채의 다다미방과 장마루는 이 가옥을 한옥과 일본 주택의 혼합형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백인제가옥은 2015년에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새롭게 꾸며져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매주 월요일인 휴무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됩니다. 8월에는 금요일, 토요일에 밤 8시까지 개장합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안채, 사랑채 등 시설 내부를 관람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한국어 해설과 영어, 중국어, 일어 등 외국어 해설도 예약할 수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의 북촌한옥마을은 한국인은 물론이고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도 인기 높은 관광지입니다.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하고 마을 구석구석을 잇는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기에도 좋지만 백인제가옥이 백 년 넘게 간직해온 역사의 이야기도 놓치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글 김문영
그림 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