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한국, 외국어 사용난무

외국어를 수용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의 입장에 서서 선택하여, 창조성 있게 수용했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민족 선조들이 남긴 문화를 제대로 보존, 발전시키고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한국에 온 지도 어느덧 5개월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지난해 재단 펠로로 선정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격과 설레임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만큼 한국은 해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나에게 오매불망(寤寐不忘)의 고국이요, 오매구지(寤寐球之)의 나라였다.

나는 처음 다짐한 대로 한국에서의 하루하루를 뜻깊게 보내려고 애썼고 실제로 많은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 특히 그 동안 책에서만 보고 가르쳤던 지식들을 현지에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해외에서의 한국학 연구와 발전을 도모하고 여러 다양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재단의 존재에 존경과 찬탄을 금할 길 없다.

물론 한국에서 많은 좋은 경험을 하는 가운데 안타깝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도처에서 ‘난무’하는 외국어이다. 일반 책자나 신문, 광고, 게시판, 간판 등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외국어를 접할 때마다 나는 어느 정도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보다도 한국인들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외국어 수용 자세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문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땅에서 만들어져 통용되어 온, 한국어의 피와 살로 굳어진 고유어나 한자어들을 굳이 외국어로 대체해 쓰는 현상이다. 닭고기를 치킨으로, 흰색을 화이트로, 아내를 와이프로, 수술칼을 수술메스로, 자리나 위치를 포지션으로, 행사를 이벤트로, 비결을 노하우로, 청혼을 프로포즈로, 추문을 스캔들로, 대리인을 에이전트로, 논평을 코멘트로…. 이외에도 부지기수다. 왜 한국어에 이미 있는 어휘들―고유어나 한자어들―을 꼭 외국어로 바꾸어야 하는지? 자기 언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같은 말이라도 외국어로 표현하면 남에게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허영심 때문일까? 참 궁금한 일이다.

이밖에 외국어 수용에 있어서 통째로 삼키는 식의 수용 자세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한글이 음역이 넓고 모방성이 강한 소리 글자라는 점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음역해 써야 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있듯이 외국어를 그대로 옮겨다 쓰는 것은 기실 한국어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마치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무작정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중국어가 한국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어는 외국어를 수용함에 있어서 ‘자기 본위’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 예를 들면, 코카콜라를 可口可樂(입맛 좋고 상쾌한 음료)로, 소시지를 香腸(향기로운 순대)으로, 슈퍼마켓을 超市(초급 시장)로, 컴퓨터를 電腦(전자 뇌)로 표현한다. 물론 중국어는 음과 뜻이 결합된 음절 문자이기에 이러한 창조적 표현이 가능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의 경우에도 고유어와 한자어의 풍부한 조어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서양 문화를 반영한, 한국어에 없는 어휘일지라도 얼마든지 한국말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예를 든 소시지를 양순대로, 슈퍼마켓을 초급 시장으로, 컴퓨터를 전자 뇌 혹은 전자 계산기로, 이외에도 싱크탱크를 두뇌 집단으로, 룸메이트를 방 친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하는가 안 하는가에 있다고 본다. 통째로 삼키는 식의 외국어 수용 방식에는 그 어떤 창조적인 과정을 거부하는 ‘나태성’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TV에서 상영되고 있는 ‘태조 왕건’이나 ‘덕이’와 같은 연속극을 보면서 나는 가끔 한국어 고유어와 한자어의 감칠맛을 잘 살려 쓴 연기자들의 대사에 매료되곤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어인가! 불행한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어가 지금 ‘난무’하는 외국어에 의해 퇴색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지구상의 다양한 민족들 대부분이 자국의 고유 언어로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확인한다. 또 ‘언어는 문화의 색인’이라는 말과 같이 언어에는 이를 사용하며 살아온 민중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호하듯이 자기의 언어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어에는 ‘三句不離本行’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 뜻은 사람은 누구나 세 마디만 해도 자기 직업상의 이야기를 꺼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전력하고 있는 내가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외국어 수용 자세를 거론하는 것은 결코 주제 넘는 일이 아니며 남의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식의 싱거운 걱정도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한국어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한국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외국어가 ‘난무’하는 한국어의 현실이 그만큼 나에겐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물론 국제화·정보화 시대에 어느 나라 말이든 필연적으로 외국어를 수용하게 마련이므로 한국어에서의 외국어 수용을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국어를 수용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의 입장에 서서 선택하여, 창조성 있게 수용했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또한 그래야만 한민족 선조들이 남긴 문화를 제대로 보존, 발전시키고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