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인민공원의 울창한 숲 속에 자리 잡은 상하이 당대미술관(Moca Shanghai)에서 <그리움: 동아시아 현대미술전>의 막이 올랐다. 2월 18일부터 5월 1일까지 진행되는 <그리움: 동아시아 현대미술전>은 지난해 한국국제교류재단(KF) 문화센터 갤러리에서 시작해 상하이를 거쳐 추후 일본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하다
시간의 흐름은 직선적일까 순환적일까? 시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논의는 고대부터 지속되었다. 시간에 대한 개념과 해석은 지역과 종교,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강요받는 현대인에게, 시간은 직선에 가깝다.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보면 과거지향적이고 도태하는 인간상으로 낙인 찍히기 마련이다. 우리의 강박관념은 과학과 기술, 경제발전을 이뤄냈지만,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한 우리는 수많은 단절을 경험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상하이 당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고 김선희 큐레이터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이후 2007년 시작된 한-중-일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고,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4명으로 송현숙, 원성원, 이주용, 정연두, 허은경 등 한국 작가 5인과 돤젠유, 판젠펑, 하이보, 취안슝 등 중국 작가 4인, 대만의 투웨이청과 이데미쓰 마코, 미즈코시 가에코, 사와다 도모코, 츠바키 노보루 등 일본 작가 4인이 80여 점의 작품을 소개했다.
작품 안으로 옛 기억을 가져오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자신의 기억을 하나씩 더듬고 있었다.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원성원이 일곱 살의 기억을 재구성한 연작 <1978년 일곱 살> 11점. 작가는 어릴 적 직장에 나간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생각에 엄마를 찾아 떠나고, 엄마 없이도 살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일련의 과정을 담은 이 작업은 작가가 유년의 충격을 치유했음을 나타낸다. 유일한 대만 작가 투웨이청은 진짜 같은 가짜 고가구를 손수 만들었다. 그는 이번에 상하이에 대한 글, 상하이의 야경과 이미지 등을 토대로 손잡이를 돌려 이미지를 바꿀 수 있게 하는 등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이주용은 <붉은 섬>, <강변에서>, <무한경계>에서 바다와 돌, 그리고 구름 등 채집한 자연을 통해 축적되거나 산화되는 시간을 언급한다. 옻칠과 나전 작업에 몰두해온 허은경은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다. 몇십 년 전 유행했던 이발소 그림과 만화를 그려 옛 기억을 꺼낸다.
완벽한 변장술로 타인을 연기하는 사와다 도모코의 작업은 사실 작가의 자화상이다. 지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학창시절>과 맞선용 사진 <오미아이> 시리즈에서 그녀는 변신놀이를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빙의한다. 츠바키 노보루는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 내부를 담아, 관객의 욕망을 실험한다. 원전 수조를 배경으로 엔딩크레딧이 끝없이 올라가는데, 관객이 작가의 작업 소식 신청서에 서명하도록 유도한다. 잠시 후 서명이 엔딩크레딧에 시차를 두고 뜨는 작업이다.
그리움을 재구성하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희 큐레이터가 ‘그리움’을 주제로 정하고 가장 먼저 떠올렸다는 작가 송현숙은 대작 회화에서 고향의 이미지, 즉 기와집, 항아리, 빨랫줄 등을 수묵화와 서예에서 익힌 한국의 묵법으로 그려냈다. 정연두는 2010년 시리즈 <사춘기>가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사진의 다큐멘터리적 고유성을 떠나 개인의 기억 속 그리움에 대한 아우라적 재구성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판젠펑은 대규모 설치를 선보였는데, 중국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빅마우스 컵’에 시구와 드로잉을 그려 넣어 친숙한 풍경을 자아냈다.
사진작가 하이보는 오래된 사진 속 인물들을 찾아 수십 년 전의 사진과 같은 구성으로 인물들을 찍어 나란히 전시했다. 모두 모인 사진도 있지만, 과거의 동지를 잃고 홀로 서 있는 중년이 홀로 선 사진도 있어 중국의 격동적인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돤젠유의 회화작업은 현대의 도시인들이 꿈꾸는 자연 또는 유토피아를 표상하는 풍경이다. 기획자는 인간과 삶에 근원적인 어떤 것을 깊이 사유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한다. 이외에도 일본 최초의 여성 미디어 작가인 이데미쓰 마코의 1978년 영
상작업 <가루이자와에서>가 소개되었고, 미즈코시 가에코는 여행지에서 만난 노동자의 반복적인 하루를 촬영한 <바람 속에서>에 작가의 추억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취안슝은 전시제목과 같은 6채널 비디오설치 <노스탤지어>를 선보였다. 영상 앞의 거대한 벌레는 옆으로 누운 채 죽어있다. 고향 쓰촨성을 지배한 거대한 공장단지와 재개발로 파괴된 자연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치유의 시대를 고민하다
15년간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해온 큐레이터 김선희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일까. 그는 “주제가 그리움이니만큼 동아시아 미술에 대한 문제를 재조명하고 싶었다. 동아시아 삼국이 오랫동안 문화적 유산을 공유했던 점, 갑작스러운 모더니즘과 현대미술로의 이동, 서구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건설적인 방향을 모색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움이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슬프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도 그리움의 대상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이 모든 재앙의 근원인 이 시대, 3∙11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지금, ‘치유’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작가들은 작업을 통해 자신의 지난 상처를 치유하고, 관객은 그들의 작품에서 위안을 얻는다. 과거의 기억과 그리움을 다시 꺼내어 얘기하고 공유하는 이 전시는 그래서 소중하게 느껴진다.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다시 살피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경민 월간미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