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중간국 우즈베키스탄의 전략적 헤징과 시사점
강봉구(한양대학교)
중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은 주민수 약 3천 3백만으로 최다 인구국이지만, 경제력·군사력 등 하드 파워를 총체적으로 고려하면, 소국에 속한다. 지리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 중국 등과 근접하지만, 영향력 투사의 측면에서는 미국, EU 등 서방과 터키의 입김도 작용하는 지정학적 중간국이다. 약 4반세기 동안 우즈벡을 철권 통치하며, 현대 우즈벡 국가・국민 형성을 주도했던 이슬람 카리모프 집권기의 우선적 목표는 국가의 ‘주권적’ 자립과 안정이었으며, 우즈베키스탄의 대외정책은 일관되게 ‘방어적 자립(defensive self-reliance)’ 노선의 지속이었다. 물론 이러한 노선은 러시아, 미국, 중국 등 복수 강대국의 영향력 경쟁 구도에 처해 있는 지정학적 중간국으로서의 입지 뿐 아니라, 우즈벡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국가주권 수호와 안보, 안정을 중시한 자립 노선을 실천하기 위한 카리모프 정권의 대 강대국 접근방식은 주로 전략적 ‘헤징(hedging)’에 의존하였다.
탈냉전기 중소국이 가동한 전략적 헤징은 강대국의 직접적인 위협이 부재한 상황에서 중소국이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단선적 제휴 및 정책 선호가 초래할 부정적 결과를 회피하며 리스크를 완화할 목적으로 가동되는 대외전략을 의미하는데, 주로 자산/기회의 분산을 통해 그리고 상충하는 복수의 정책 선호 혼용, 모호한 제휴 신호 발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21세기의 국제환경에서 많은 중소국가들이 가동해 온 전략적 헤징은 개별국의 사정에 따라 그 변주가 다양하였다. 그 다양성을 관통하는 공통논리에 따르자면, 중간국들의 헤징은 무엇보다도 환경의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완화하고자 하는 대응이며, 강대국과의 제휴에서 가능한 한 기본적 안보이익을 타협하지 않고 경제・외교 관계의 혜택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중소국들이 ‘전략적 교환거래’를 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미국(과 EU) 등 경쟁하는 강대국들에 대한 카리모프식 자립노선의 헤징은 크게 세 시기로 대별될 수 있다: 러시아와 제한적 제휴 시기(1991~1998), 미국과의 제휴 시기(1999~2003), 대러 제휴의 강화・유지 시기(2004~2016). 이 시기 구분은 우즈베키스탄의 특정 강대국에 대한 제휴 추세의 ‘상대적’ 강화를 의미할 뿐, 세 시기 모두에 걸쳐, 타슈켄트는 모든 경쟁하는 강대국들에 대해 지속적이며 일관되게 헤징 전략을 가동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가 주도해온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가입과 탈퇴를 두 번 되풀이하였다(CST로부터 1999년 탈퇴, 2006년 재가입[CSTO], 2012년 재탈퇴). 특히, 우즈벡의 CSTO 재탈퇴 선언(2012. 06. 28)은 러시아와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증진 선언(the Strategic Partnership Enhancement Declaration, 06. 04)’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던 것은, 헤징의 경험적 징표인, ‘상충되는 정책 선호’와 ‘모호한 제휴 신호’ 발신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 부분 미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GUAM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바 있고, 대러 제휴 강화의 페달을 세게 밟고 있던 2008년에는 (모스크바로서는) 당혹스럽게도 유라시아경제공동체(EurAsEC)의 회원자격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위의 시기 구분에서 보듯이, 미국과의 제휴를 시도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제국의 사실상의 식민모국으로서 중앙아시아지역에 영향력 행사의 강한 지렛대를 가졌던 러시아에 대한 제휴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의 러시아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제휴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해도 이 추세 역시 자국의 자율성 보존을 위한 타슈켄트의 전략적 헤징의 일환이었기에 미국과의 정책 제휴 역시 제한적이나마 지속되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의 대미 제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미국(더 크게는 유럽-대서양 세계)을 지향한 우즈베키스탄의 외교 다변화 노력은 탈러시아보다는, 상대적으로 러시아에 쏠린 강대국 제휴를 다원화하려는 시도였다.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이 시도는 러시아와의 일원적 제휴가 가져 올 자율성 감소 가능성 그리고 안보・경제적 수혜 기회의 제한성 등의 리스크를 완화하려는 전략적 헤징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러 정서나 러시아에 대한 경성 균세의 시도와는 거리가 멀다. 타슈켄트의 다면적 리스크 완화・관리 목적의 헤징은 어떤 경우에도 상호 연루로 결박되는 동맹적 결속이나 진영 논리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카리모프 시대의 자립 노선과 그 실천 방도로서 전략적 헤징은 어느 시점에서도 친러적 반서방이나 반러적 친서방 등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시간의 검증을 견뎌 낸 이 카리모프 시기의 유산은 미르지요예프 정부에도 계승되고 있다. 과거와의 차이점은 2010년 대 이후, 특히 일대일로 프로젝트 가동 이후, 강대국 제휴에 대한 타슈켄트의 헤징 시에 중국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핵심 행위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G2 부상과 글로벌 힘의 축 이동,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치는 새로운 국제적 벡터 등 변화된 국제환경에서 러시아와 (과거 미국의 자리에 들어선) 중국간 경합은 비배타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르지요예프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양 강대국 제휴에 대해 모호성을 발신하는 비배타적 방식으로, 중러 모두로부터 경제・안보적 수혜를 얻는 실용적 관계를 유지해 나올 수 있었다. 우즈 ̄러, 우즈 ̄중 두 쌍의 양자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첩과 경쟁 영역이 적은 편이기에 지금까지 큰 갈등은 야기되지 않았다. 이것은 성공적인 전략적 헤징의 한 징표이다.
타슈켄트는 어느 강대국에게도 자국의 군사・전략적 종속을 허용치 않기 위해, 경제・안보 리스크 관리와 적정 수준의 자율성 보존을 위해, 중러 사이의 헤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와 중국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을 회피하며 기회와 리스크를 분산하는 전통적 헤징 전략을 유지하는 한, 중러 간에 우즈베키스탄을 둘러싼 배타적인 영향력 경쟁은 전개되기 어렵다. 그러한 배타성은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패권적 지배를 의도하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타슈켄트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은 30년 이상을 대외정책의 자립 노선을 지속하고 강화해 나왔으며, 어떤 나라도 위협이나 강박으로 타슈켄트를 양보하도록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베이징이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전통적 입지를 고려하여) 중국과 우즈베키스탄과의 양자관계에서 군사적・정치적 제휴를 적극 시도해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설혹 그런 시도를 할지라도, 강대국 관계에서 자율성 보존에 민감한 타슈켄트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 당분간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갈등적 영향력 경쟁이 점화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 30년간 우즈베키스탄의 전략적 헤징은 국가주권과 안정, 대외 자율성 유지라는 목표에 비추어 볼 때 대체로 성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성과는 헤징 실천의 외교적 역량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적대국의 안보 위협 부재, 대외 경제 변수에 좌우되는 취약성의 최소화와 외부 충격에 대한 회복 탄력성, 방어적 자립 노선에 대해 국민적 컨센서스 등을 들 수 있겠다. 타슈켄트가 누린 헤징 가동에 유리한 조건들을 한국은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고조되는 미중 산업・과학・기술 패권 경쟁에서 워싱턴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구축을 위해 ICT 기술・중간재 공급을 통제할 대중 견제 연합전선에 그리고 인도-태평양 전략 수행을 위한 연합세력 QUAD+에 한국이 참여해 줄 것을 압박해 왔다. 한국은,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편승도(안보・금융 수혜의 대가로서 자율성의 과도한 양보와 훼손 가능성 때문에) 부적절하고, 중국에 대한 선명한 균세도(대중 제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 이익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적절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위협국이 존재하고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이 상수화된 환경에서 통상적 중간국의 전략적 헤징을 가동하기도 어렵다. 한미동맹 하 한국정부로서는 미국의 화웨이 제재 동참 요청에 대한 모호성 유지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이전 국내 사드 배치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의 대중 견제 전선에서 동맹정신에 기초한 공유(되고 있다고 가정되는) 안보이익의 정도에 대해 한국이 모호성 발신을 장기간 지속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중 경쟁 첨예화의 어느 시점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여) 미일한 대중 견제 전선의 선두에서 중국에 창끝을 겨누는 것도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중 대결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미래 어느 시점을 대비하여 ‘적극적’ 헤징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지점이다.
안보위협 부재 중간국의 통상적인 ‘소극적’ 헤징과는 달리, 한국의 헤징은 ‘적극적’이어야 한다. 한국정부는 상대국과의 관계 형성에서 생겨나는 ‘관계의 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관계형성의 고리는 ‘평화외교’ 혹은 ‘가교 외교(bridging diplomacy)’이다. 평화외교의 요체는 한국의 대외관계가 평화와 공영의 중립적 가치, 포용적 정체성의 기치 하에 화해 촉진자, 국제 공공재 창출자의 역할을 떠맡는데 있다.1)
중간국으로서 한국이 안보・경제적 수혜를 얻고 있는 어느 한 강대국도 배타하지 않는 포용적 정체성과 외교적 자율성에 기반한 중립적 평화외교를 추구한다는 것은 ‘전략적 헤징’의 일환이다. 특히 이 전략적 헤징은, 강대국간 경쟁이 중간국에 가하는 위험부담의 분산과 회피만이 아닌, 강대국간 갈등의 근원을 완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극적’ 헤징이 아닌 ‘적극적’ 헤징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렇게 평화외교의 적극 추진을 매개로 창출 가능한 ‘관계의 힘’을 한국이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에 활용하면, 외교적 운신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 나갈 기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시에 한국 외교・안보 정책의 자율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조건인 남북한 관계정상화와 교류 지속, 국제 금융・투자 역량 강화 등을 위한 노력도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1)김태환, “대항지정학으로서 평화외교,” 『평화의 신지정학』 (서울: 박영사, 2019), pp. 26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