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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UTUMN

한국에서 와인을 빚는 프랑스 농부

프랑스인 도미니크 에어케(Dominique Herqué) 씨에게 한국은 꿈을 이뤄가는 나라다. 땅을 살리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그 결실들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와인을 제조하며 산다. 그는 한국인 아내 신이현(Shin Ihyeon) 씨와 함께 프랑스 알자스를 닮은 한국의 ‘작은 알자스’에서 꾸리는 이 삶이 참 좋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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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난 도미니크 씨는 오랜 세월 엔지니어로 일하다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농업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알자스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아내와 한국으로 들어온 후 충청북도 충주에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작은알자스’를 만들었다.

도미니크 에어케 씨가 있는 작은 알자스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다. 마당에선 풍경(風磬 작은 종)이 쉼 없이 울려대고, 밭에선 새와 닭과 거위가 수시로 울어댄다. 하지만 전혀 시끄럽지 않다. 자연 속의 소리는 소음보다는 음악에 가깝다.

숲과 같은 포도밭

귀마저 즐거운 ‘작은 알자스’는 수안보온천(水安堡溫泉)으로 유명한 충북 충주시(忠州市) 수안보(水安堡)면에 있다. 뒤론 산이 있고 앞은 탁 트여 있어,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미니크 에어케 부부가 ‘첫눈에 반했던’ 이 땅은 프랑스 알자스와 비슷한 데가 많다. 알자스(Alsace)는 도미니크 씨의 고향이다. 프랑스 최북단에 자리한 와인 생산지로, 산 밑 언덕배기에 포도밭이 많다. 흙도 까맣고 볕도 깊다. 그가 지금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그는 자주 고향을 느끼며 산다.

“2017년에 여기로 왔어요. 한국에서 농사도 짓고 와인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1년간 전국을 둘러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이 땅을 만났어요.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죠.”

도미니크 씨는 아내와 가꾸는 약 4,000㎡의 농토를 ‘숲과 같은 포도밭’이라 부른다. 이들의 밭엔 10여 종의 포도나무와 30종 안팎의 사과나무가 있다. 다양한 와인 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품종의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이 밭에 심은 건 포도나무와 사과나무만이 아니다.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무화과, 보리수, 키위, 라벤더…. 부부는 제초제나 살균제 같은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퇴비’가 되어줄 100여 종의 식물을 주위에 빼곡하게 심어 놨다. 닭과 거위가, 벌과 지렁이, 온갖 미생물이, 서로를 이롭게 하며 더불어 살아간다. 그와 아내는 어떻게 하면 와인을 더 맛있게 만들까보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더 많이 고민한다. 좋은 와인은 잘 지은 농사에서 오고, 좋은 과일은 비옥한 땅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는 익숙한 프랑스식 농사법을 따른다. “한국인들이 절기(節氣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에 맞춰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는 행성달력(행성의 움직임에 맞춰 농사를 짓는 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우주의 모든 행성은 매일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식물의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열매에 좋은 날, 뿌리에 좋은 날, 잎에 좋은 날, 꽃에 좋은 날이 따로 있어요. 오랜 세월 축적한 삶의 지혜를 기꺼이 따르고 있죠.”

와인 한 병에 담긴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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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에서 숙성하고 있는 레돔 내추럴 레드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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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맛있는 과일을 얻기 위해 농약이나 퇴비를 쓰지 않고 건강하게 땅을 일구며 다양한 과수나무와 거위, 닭, 지렁이를 키워 땅속 미물까지 함께 돌본다.

그렇다고 달력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씨엔 농부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그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검토하며 농사짓는다. 예컨대 풀을 깎아놓았는데 며칠 후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갓 나온 싹이 모두 얼어버리고, 풀을 안 깎았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벌레들이 떼 지어 몰려든다. 그간의 실패가 그에게 알려준 소중한 경험들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하지만, 도미니크 씨는 단 한 해도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믿고 있다.

“땅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 처음 한두 해는 참 힘들었어요. 거리의 낙엽들을 차에 꽉꽉 채워 오고, 동네 깻단을 죄다 모아와 밭에 뿌렸어요. 해마다 왕겨 5톤씩을 밭에 집어넣었고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 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회복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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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로 만드는 내추럴 시드르는 작은알자스의 대표 상품으로, 레돔이라는 이름은 도미니크의 애칭을 따 이름 붙였다.

‘작은 알자스’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사과를 발효시켜 만드는 시드르(Cidre, 영어로는 사이더 Cider), 포도로 빚은 로제와 산머루를 섞어 빚은 레드와인이다. 첨가제는 물론 효모도 넣지 않는다. 말 그대로 ‘내추럴 와인’이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 대신 ‘그 해의 모든 것’이 담긴다. 나무들을 키운 햇볕과 바람, 농부의 땀과 고민까지 와인 한 병에 고스란히 실린다. 발효 시간까지 합하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의 와인을 마시는 일은 그가 만난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다.

“와인 브랜드가 레돔(LESDOM)이에요. ‘Le’는 불어로 복수를 뜻하고 ‘Dom’은 저의 애칭입니다. ‘도미니크 가(家)’란 뜻이에요. 이젠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도미니크의 아내 신이현 씨는 소설가다. 1994년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도미니크 씨가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다. 당시 도미니크 씨는 파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고, 신이현 씨는 프랑스에서 1년쯤 살아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이 모두 아는 베트남 부부가 집들이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도미니크 씨와 신이현 씨는 만나자마자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했고. 파리에서 1년만 살아보려던 신이현 씨의 계획은 변경됐다. 2003년 결혼식을 올린 뒤 파리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씨가 캄보디아 회사로 가게 되면서 6년간 캄보디아 생활을 했고, 이후 그가 한국의 대기업으로 파견되면서 아내의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 살아보게 됐다.

한국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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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성 중인 레드 와인을 점검 테이스팅 하는 도미니크 씨. 그는 누구나 떠올리는 정형화된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일이 자란 땅의 성격과 맛을 와인 한 병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 한국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자신이 맡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땐 일에 허덕이느라 삶을 돌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론 매우 고마운 시기예요. 농부가 되는 꿈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알자스에서 평생 포도 농사를 지으신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포도밭을 나눠주시면서, 어릴 때부터 저는 포도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포도밭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 수확기 때마다 농사일을 거들곤 했죠. 언젠가부터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더라고요. 한국에서 그 그리움이 꿈으로 이어졌네요.”

농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미니크는 다시 파리로 갔다. 프랑스농업대학(Centre National d'Enseignement Agricole par Correspondance)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와인 양조장에서 1년간 일을 배웠다. 이제 농부가 될 차례였다. 처음에 그는 프랑스에서 포도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남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고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곳도 찾아냈지만, 이번엔 아내가 망설였다. 프랑스에선 파리 외의 지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타국살이를 두려워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한국엔 제대로 된 시드르 생산지가 없으니, 우리가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요. 그때 저는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어요.”

2016년 한국으로 다시 왔고, 이듬해 지금의 땅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낸 지난 6년이 그저 꿈만 같다. 한여름 포도밭의 풀을 깎을 때도, 한겨울 포도나무 가지를 칠 때도, 그는 더위나 추위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낀다. 프로그래머로서 한국에 살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 매일 새롭게 그에게 찾아온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 나라를 그는 농사를 통해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꿈을 이루게 해준 아주 고마운 나라다.

“지금의 ‘작은 알자스’는 지난해 새로 지은 건물이에요. 양조를 위해 지은 건데, 짓다 보니 애초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어요. 공간이 커진 만큼 쓰임새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안에서 생태적 농사법이며 자연적 와인 제조법도 나누고, 술이며 농사와 관련된 작품 전시도 해보고 싶어요. 내성적인 저보다는 아내가 그 일을 맡게 되겠지만, 이 공간이 그렇게 쓰일 걸 생각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농부’ 도미니크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해가 뜨자마자 밭으로 가서, 온갖 생물들과 안부를 나눈다. 볕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에서 쉬고, 볕의 기세가 누그러지면 다시 밭으로 나가 해가 온전히 질 때까지 밭을 가꾼다. 요즘 그가 힘쓰는 일은 포도나무 가지가 처지지 않고 올라가도록 줄로 잡아주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십 대 초반의 포도나무인 셈이라 손이 아주 많이 간다. 꽤 힘들 텐데도 그는 자주 웃음 짓는다. 자연을 그대로 담는 그의 와인들처럼, 그의 미소에 그의 행복이 오롯이 실려 있다.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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