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브레이킹에 입문한 홍텐(Hong 10)은 2001년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해 비보이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느덧 30대 후반이 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창의적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선보인다.
2021년 11월, 폴란드 그단스크(Gdańsk)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열린 ‘레드불 비씨 원 캠프(Red Bull BC One Camp)’ 장면. 홍텐의 시그니처 동작에 다른 참여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는 ‘홍텐 프리즈’를 비롯해 독창적인 시그니처 기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Lukasz Nazdraczew, Red Bull Content Pool
2023년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렸던 제19회 아시안게임에는 45개국에서 온 1만 1,907명의 선수들이 총 40개 종목, 482개 경기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었다. 그중 브레이킹은 항저우 아시안게임부터 정식으로 채택된 신규 종목으로, 한국에서는 홍텐이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최초로 메달리스트가 됐다.
그의 본명은 김홍열(Kim Hong-yul, 金洪烈)이다. 이름 마지막 자(字) ‘열’을 외국 비보이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이를 동음이의어인 숫자 ‘10’으로 바꾼 것이 그의 활동명이 되었다. 그가 선보이는 창의적인 기술들은 이른바 ‘홍텐 프리즈((Hong 10 freeze)’라 불리며 전 세계 비보이 마니아들을 열광시킨다. 그는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레드불이 2004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레드불 비씨 원(Red Bull BC One)’ 월드 파이널에서 2006년, 2013년, 2023년 통산 세 번의 우승 벨트를 차지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 최정상급 비보이들만 참가할 수 있는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의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최다 우승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사실상 세계 최고의 비보이 반열에 오른 셈이다.
홍텐은 브레이킹 댄서에서 국가대표 선수,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그리고 이제 올림피언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레드불 비씨 원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다. 소감이 어떤가?
레드불 비씨 원은 브레이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다. 나는 2005년 처음 참가했고, 2006년과 2013년에 우승했다. 2016년에는 2위에 그쳤는데, 그때 ‘앞으로는 우승하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출전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2022년에 다시 초청받았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오랜만에 참가하게 됐을 때는 그곳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우승까지 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홍텐은 같은 해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도 제패했다. 이로써 그는 네덜란드의 비보이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의 최다 우승 기록을 갖게 되었다.
지난해 레드불 비씨 원 월드 파이널에서는 컨디션이 어땠나?
그때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회 전에 무릎 부상이 있었고, 직전에 아시안게임을 치렀기 때문에 피로도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전혀 긴장도 되지 않았다. 결승 상대였던 필 위자드(Phil Wizard)는 같은 레드불(Red Bull BC One All Stars) 소속이고 친한 사이다. 그와 즐겁게 겨뤘는데 그것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춤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이 하는 걸 보고 흥미를 느껴 시작하게 됐다. 브레이킹은 어려워 보이는 기술을 시도해서 성공시켰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초기에는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시그니처 기술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서는 나만의 무브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됐다.
움직임 개발은 창의성이 필요해서 쉽지 않을 것 같다.
자기만의 무브를 만든다는 건 도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해야 뭘 만들 수 있다는 확실한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걸 창안하기도 어렵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내 몸이 해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다 적어 놓고 실험해 보는 편인데, 거의 다 실패한다. 되든 안 되든 계속 시도해 보는 근성이 필요하고, 창작하는 걸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나?
2003년쯤 춤을 잠깐 그만둔 적이 있다. 2002년에 ‘Battle of the Year’, ‘UK B-Boy Championships’ 등 그동안 영상으로만 접했던 유명한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그러고 나니까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춤을 그만두고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아는 형들이 찾아와서 팀 배틀에 나가자고 권유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내가 춤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그 뒤로 슬럼프에 빠지면 브레이킹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출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파고들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됐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아시안게임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면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시작되고 보니까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기대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커졌다. 운이 나쁘게도 대회를 2주 정도 남기고 무릎을 크게 다쳤다. 어떤 처치를 해도 회복이 되지 않아서 진통제를 먹으며 견뎌야 했다.
경기가 이틀에 나뉘어 진행됐는데 첫날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다. 둘째 날엔 처음 붙은 상대가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카자흐스탄의 아미르(Amir, 본명 Amir Zakirov)였다. 이길 생각 말고 준비한 것만 잘하자고 마음을 비웠더니 오히려 자신감이 더 붙었다. 결승에서는 일본의 시게킥스(Shigekix, 본명 Nakarai Shigeyuki)를 만났는데 한 표 차이로 준우승을 해서 좀 아쉬웠다.
서울 홍대 입구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보이 홍텐. 플로우엑셀(FLOWXL) 크루 소속인 홍텐은 10대 중반 브레이킹에 입문하여 20년 넘게 정상급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올림픽에 나가려면 5월과 6월에 열리는 예선전을 잘 치러야 한다. 거기서 10위 안에 들어야 출전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당장은 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목표다.
춤을 언제까지 출 것 같나?
브레이킹은 배틀이라는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춤을 그만둔다는 것은 배틀에 나오는가 아닌가가 기준이 된다. 심사위원 같은 다른 활동을 계속하더라도 배틀을 중단하면 그것이 곧 은퇴이다. 우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배틀에 나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은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제까지 배틀에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출 수 있는 한 오래 추고 싶다. 다만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올림픽을 기점으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있다.
후배들에게 어떤 댄서로 기억되고 싶나?
국내 브레이킹 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어린 나이의 비보이들이 적은 편이다. 내게는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유입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홍텐 프리즈’처럼 내 이름이 붙은 기술들이 있다. 훗날 브레이킹에 입문한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은 모르더라도 내 이름이 붙은 기술은 알게 될 거다. 그거면 족하다.
윤단우(Yun Danwoo, 尹煓友) 무용 평론가
허동욱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