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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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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천명관(千明官) 작, 김지영(金知暎) 번역, 365쪽, 22달러, 아키펠라고 북스(2023)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고래 책 표지

천명관의 『고래』는 세대를 넘나들며 운명의 실타래에 얽힌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소설은 유난히 큰 체구로 태어난 금복의 딸인 소녀 춘희가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 후 몇 녀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춘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에 살았던, 자신에게 잔인했던 세상을 저주하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외모와 암내를 타고났지만, 남자들의 욕망에 희생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가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해안 마을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그녀는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후 평대로 이사한 그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횡재하게 되면서 벽돌 공장을 열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룬다. 그 꿈은 그녀가 해안 마을에서 처음 본 거대 생물인 고래 모양으로 영화관을 짓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예언의 얽힘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무대에서 그녀의 최후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래』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은 모두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도 종종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운명에 얽매여 있다. 운명은 이 소설의 서사 전반에 시계추처럼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에게 닥칠 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전조가 있다. 화자는 또한 사랑의 법칙, 반사의 법칙, 어리석음의 법칙, 이데올로기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심지어 자만의 법칙과 같은 다양한 ‘법칙’의 관점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연결된 이야기 세계, 즉 인간의 의도와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결과를 갖는 세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전조와 법칙의 사용은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준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붕괴한다. 분명히 사건의 순서와 사건의 진행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대한 이야기가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신비를 엿본 듯한 느낌을 들게 된다.

『날개 환상통』

김혜순(金惠順) 작, 최돈미(崔燉美) 번역, 208쪽, 18.95달러, 뉴디렉션즈북스(2023)

복화술사가 하늘을 향해 노래하다

Phantom Pain Wings 책 표지

김혜순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를 보며 우아하게 날아다니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하지만, 이 시에서는 새-시인(혹은 시인-새)은 하이힐을 신고 땅 위를 걷고,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부끄러워하고, 새장 같은 옷을 입는다. 새들은 종종 새장에 갇혀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비극을 경험하고 큰 슬픔에 빠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적절해 보인다.

영문판에 추가된 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복화술의 기법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남성 시인들이 여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복화술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배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영감이나 홀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나 적절해 보인다. 시인은 우리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홀린 무당처럼, 하늘의 숨결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고양시킨다.

< The Gleam >

빛의 은유

The Gleam 책 표지

박지하(朴智夏)의 < The Gleam >(2022)은 제목 그대로 어슴푸레한 빛의 잔상을 쫓는다. 상태이자 순간이고, 이미지이자 감정인 빛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이 음반에 담겨있다.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인 피리(觱篥), 생황(笙簧), 양금(洋琴)이다. 악기의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이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다. 악기 본연의 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산란하는 빛으로, 긴 잔향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음을 길게 지속할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진동과 호흡,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섬광과도 같은 노이즈, 아스라이 멀어지는 잔향, 섣부르게 몸집을 키우지 않고 섬세하게 고안된 공간감은 깊은 고요, 내면의 침묵으로 우리를 이끈다.

박지하는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徐廷旼)과 함께 ‘숨(suːm)’이라는 듀오로 9년간 활동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문법에 보다 깊게 천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솔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영토로 선회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 The Gleam >도 넓게 보면 < Communion >(2016), < Philos >(2018)의 연장선에서 음악적 재료와 패턴을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그는 양금의 현을 활로 연주하거나 손톱으로 긁어 예리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연주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참신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다이내믹을 확장해 이질적인 감각을 조형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이 음반을 이해하는 데 또 한 가지 유효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물관인‘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음반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do)가 설계한 이 공간에서 진행됐던 2020 The Art Spot Series ‘Temporary Inertia’ 공연의 일부를 발전시켜 음반으로 엮었다. 공간의 음향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려해 개별 악기의 응축된 소리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흔적이 음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지하에게 공간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자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로 기능한다. 빛의 여러 형태와 잔상을 포착한 음악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질까.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성혜인(Seong Hye-in, 成惠仁)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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