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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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PRING
장르의 규범에 질문을 던지다
‘음악동인 고물’과 ‘고블린파티’ 두 단체가 협업하여 만들어 낸
는 연주자가 춤을 추고 무용수가 연주를 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들은 전통 음악과 현대 무용의 결합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 기존 장르의 문법을 의심하며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음악이 다른 장르와 협업할 때 관객의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한 수단이나 작품 주제를 위한 배경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꼭두각시 > 는 이러한 주객 관계에서 벗어나 음악과 무용이 주제 의식을 견지하며 동행하는 작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사진 옥상훈(Ok Sang-hoon)
최근 들어 장르적 협업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크게 늘었다. 협업은 오늘날 한국 공연 예술계의 단면을 보여 주는 키워드다. 누가 누구와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고, 협업 자체가 새로움을 보장하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장르의 결합이 곧 협업의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결과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중요하다. 성공적인 협업을 위해서는 장르 간 힘의 균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각각의 장르가 만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결여된 협업은 단순한 눈요깃거리에 머무르기 쉽다. 그런 점에서< 꼭두각시 > 는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역대 최고의 협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 꼭두각시 > 는 우수한 창작 레퍼토리 발굴에 힘쓰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21년 전통 예술 부문 ‘올해의 신작’ 중 하나로 선정한 작품이며, 이듬해 2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들과 처음 만났다. 같은 해 9월에는 국제 공연 예술 플랫폼인 서울아트마켓에서 쇼케이스를 펼쳤으며, 10월에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되었다.
독자적 행보
이 공연에서는 무용수가 연주자를 조종하며 악기 연주에 개입하는 장면을 비롯해 각자의 역할이 해체되거나 전복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는 과연 누가 조종하는 주체이고 조종당하는 객체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동시에 현대인들이 처해 있는 사회 시스템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사진 옥상훈
< 꼭두각시 > 는 전통 음악에 기반을 둔 음악동인 고물(Musical Coterie Gomool, 古物)과 세 명의 안무가들로 결성된 무용 단체 고블린파티(Goblin Party)가 함께한 작품이다. 두 단체의 만남은 흥미진진한 사건을 예고하듯 신선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음악동인 고물은 음악감독 이태원(Lee Tae-won, 李泰源)과 국악을 전공한 3명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팀이다. 이들은 이른바 ‘공연형 다큐멘터리(Staged ary)’라는 양식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풀어낸다. 고물은 한국의 전통음악이 동시대에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고 또 형상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전통 음악을 둘러싼 개념‧제도‧규칙‧시스템 등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동안 고물은 창작자들이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 혹은 시스템의 밖을 상상할 때 어떤 가능성이 열리는지 보여 주곤 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 또는 결코 뒤섞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지 가장 먼저 질문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꼭두각시 > 도 이런 사유의 연장선에 있다. 고블린파티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도깨비의 정체성을 표방한다. 한국의 도깨비는 비범한 재주를 가진 재기발랄한 존재로 생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이들은 대표 없이 세 명의 안무가가 공동으로 창작하는 수평적인 시스템을 추구하며 다양한 작업을 펼치고 있어 이례적인 단체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꼭두각시 > 는 음악계와 무용계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온 두 팀이 호흡을 맞췄다는 사실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너지고 넘나드는 경계
5명의 연주자와 3명의 안무가들이 한데 어울려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농후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을지 짐작하게 만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사진 옥상훈
두 팀의 독특한 협력 관계는 공연 소재인 꼭두각시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감지된다. 꼭두각시는 우선 유치원 학예회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남녀 어린이들이 짝을 이뤄 추는 춤과 반주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대부분 어린 시절 꼭두각시 춤을 직접 추었거나 접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노래와 춤, 풍물 연주 등을 선보이던 조선 시대 남사당패의 연희 중 하나인 전통 인형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서양의 마리오네트처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꼭두각시의 다층적 의미와 맥락은 협업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된다. 움직임, 놀이, 음악, 수동적인 인형의 모티브 등이 직관적인 방식으로 자유로이 뒤섞인다. 이 공연에서는 기존의 문법이 분할되거나 전복된다. 예컨대 무대 위 연주자들과 무용수들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뒤엉켜 있다. 연주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용을 하고, 무용수들은 악기를 연주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몸놀림이 무용으로 접합되는가 하면, 무용수가 악기 연주에 개입함으로써 퍼포먼스의 주체와 객체가 기이하게 뒤틀리는 장면도 등장한다. 또한 음악은 움직임이, 무용수는 음악이, 연주자는 오브제가 되기를 자처하며 음악과 무용 그리고 놀이가 분리되지 않고 어지러이 뒤섞인다. 장르의 경계가 다양한 층위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 공연의 묘미는 무용이든 음악이든 하나의 장르로 작품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드는 순간 내면화되었던 개념의 틀을 관객들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음악에도, 무용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각 장르의 문법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이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은 음악‧무용‧놀이가 무엇인지, 이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까지 대범하게 확장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협상의 테이블
2020년, 국립국악원의 뮤직비디오 제작 프로젝트 참여 당시 음악동인 고물이 뮤직비디오 촬영에 앞서 찍은 프로필 사진이다. 왼쪽부터 가야금 홍예진(弘藝珍), 해금 이유경(李裕卿, 객원), 대금 고진호(高辰虎), 장구 정준규(鄭峻圭, 객원), 피리 배승빈(裵升彬). 2006년 결성된 음악동인 고물은 전통 음악을 둘러싼 첨예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 국립국악원
< 꼭두각시 > 를 단순히 현대 무용과 전통 음악의 결합이라 설명하는 건 단면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개의 협업들이 예술 장르의 병렬적 나열로 수렴되는 데 반해 고물과 고블린파티의 협업에는 특별함이 있다. 다양한 맥락이 뒤섞여 있는 꼭두각시라는 소재가 두 단체의 협업에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 음악과 움직임에 대한 탐구는 꼭두각시를 현재 그들만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음악과 다른 장르 간 협업은 음악이 다른 장르와 만날 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고물과 고블린파티의< 꼭두각시 > 는 음악과 무용의 경계를 지웠다기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경계에서 끝없는 협상을 통해 장르의 규범을 재정의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협업의 바탕에는 두 단체가 지닌 내공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 꼭두각시 > 는 음악과 무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하고, 움직임이 전면에 배치되는 순간에도 음악의 역할이 선명하게 감지되는 치밀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각 팀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까다로운데, 이를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축적되었을 대화의 시간을 가늠해 보는 일도 흥미롭다.
성혜인(Seong Hye-in, 成惠仁)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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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WINTER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최우람(Choe U-ram 崔旴嵐)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움직임과 서사를 가진 ‘기계 생명체(anima-machine)’를 제작해 온 작가다. 그동안 기술 발전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에 주목해 온 그는 이제 인간 실존과 공생의 의미에 관해 질문을 던지며 확장된 시선을 보여 준다.
. 2022. 폐(廢)종이박스, 금속 재료, 기계 장치, 전자 장치(CPU 보드, 모터). 210 × 230 × 1272 cm.
좌우 35쌍의 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선체 주변의 다양한 조각 설치물들과 어우러져 한 편의 웅장한 공연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는 이렇게 물었다. 20세기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위기 앞에 무력하게 넘어질지라도 연대와 협력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 삶의 의미, 역경을 이겨내는 인본주의의 가치에 관한 근원적 질문에 대해 이번에는 한국의 현대 미술가 최우람이 답한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내년 2월 26일까지 열리는 <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작은 방주 > 전시에 그 묵직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굴레, 원치 않는 노동의 반복, 끊임없는 경쟁의 시대를 비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꿈을 꾸고, 의지를 가지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인간’이다. 2014년부터 출발한 < MMCA 현대차 시리즈 > 는 국내 중진 작가 중 한 명을 지원하는 연례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한다.
삶에 대한 은유 미술관 입구에서 티켓을 받아 쥐고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 시선을 먼 곳으로 뻗으면 천장 주변을 빙빙 돌며 느릿하게 날고 있는 검은 새 세 마리를 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90)을 가로지르던 그 새들을 닮았다. 녀석들이 노리는 것은 그 아래 검은 원탁 위에서 나뒹구는 둥근 짚 뭉치인 듯하다. 작가의 신작
다. 이것은 바닥에 놓여 있는 설치 작품
과 짝을 이룬다. 둥글게 어깨를 맞대고 선 ‘지푸라기 인간’들이 원탁의 상판을 짊어지고 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짚 인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름 4.5m의 크고 육중한 검은 원탁이 이리저리 기울어진다. 탁자 위에 놓인 짚 뭉치가 공처럼 데구루루 구른다. 굴러간 쪽에 쭈그려 앉았던 무리가 얼른 일어선다.
지푸라기 인간들은 총 열여덟. 하나같이 머리가 없다. 생각할 수 없고, 보고 말할 수도 없는 이들은 방향을 상실한 군중이다. 무지몽매한 볏짚 인간들은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원탁을 떠받친다. 그들의 동력은 원탁 위의 짚 뭉치, 즉 밀짚 머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다. 짚 뭉치가 제 쪽으로 온다 싶으면 재빨리 일어나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더 먼 곳으로 굴러갈 뿐이다. 누군가 원탁 아래에서 벗어나 그것을 차지한다면 고된 노동을 멈출 수 있을 것이나,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서로 양보하지도 않는다. 이 광경을 머리 위 검은 새들이 비웃고 있다. 새들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짚 뭉치를 낚아채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다.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는 일어서려는 밀짚 인간들의 ‘무릎’이다. 구부렸다 펴는 순간 마치 근육의 떨림 같은 파르르한 긴장감이 보이며, 안간힘이 느껴진다. 고작 지푸라기 두른 기계에 불과한 작품에서 인생사를 감지하게 된다.
“내가 만들고 있는 ‘기계 생명체(anima-machine)’들은 인간의 삶과 모습을 대변하고 또 은유하기 위한 존재들이에요.”
어린 시절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를 꿈꿨으나 더 큰 상상력이 최우람을 미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20대이던 1990년대부터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 생명체를 제작해 왔다. 고고학, 생물학의 이론에 로봇 공학을 접목하여 ‘기계 생명체 연합 연구소(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라는 가상의 국제 연구소도 조직했다.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성한 창작 헙업체이다. 앞 글자만 따면 그의 이름과 같은 우람(URAM)이다. 이번 전시에는 특별히 현대자동차그룹의 로보틱스랩이 기술 자문으로 참여했다.
. 2022. 레진, 24K 금박, 스테인리스 스틸. 162 × 133 × 56 cm.
선체 좌측에는 뱃머리를 장식해야 할 황금빛 천사상이 무력한 모습으로 허공에 매달려 있다.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 2022. 알루미늄, 인조 밀짚, 기계 장치, 동작 인식 카메라, 전자 장치. 110 × 450 × 450 cm.
인간 형상을 한 18개의 볏짚들이 지름 4.5m의 원탁을 떠받치고 있는 작품이다. 원탁 위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쓸수록 더욱 멀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부조리한 현실 이번 전시 작품 53점 중 49점이 신작이다. 미술관 5전시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시 제목과 동명인 < 작은 방주(Little Ark) > 를 마주하게 된다. 길이 12m의 거대한 배다. 겉모습은 위세 등등하나 물이 없어 뜨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닫힌 상태에서는 어른 키를 웃도는 2.1m 높이의 궤짝 형태인데, 노를 내젓는 순간 최대 폭 7.2m까지 펼쳐진다. 양쪽 35쌍 노의 현란한 움직임은 무용수의 몸짓처럼 유려하다. 넋 놓고 한참을 바라볼 정도로 빠져든다. 열린 배 안에는 두 명의 선장이 반대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하나. 선체 중앙에는 5.5m의 등대가 놓였다. 등대의 자리는 고정된 땅이어야 하건만, 배와 함께 움직이는 등대는 더 이상 불변의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등대 불빛은 길잡이가 아니라 감시자처럼 보인다. 배 뒤쪽으로 문이 열린다. 열린 문 뒤에 나타난 것은 새로운 닫힌 문이다. 그 문이 또 열리지만 닫힌 문만 한없이 펼쳐질 뿐이다. 이 영상 작업의 제목은 < 출구(Exit) > 다. 빠져나갈 수 없는 아득함의 연속이다. 좌우 양측 벽에는 떨어져 나간 닻과 뱃머리 장식인 황금빛 천사가 각각 자리 잡았다. 배를 정박하게 할 닻은 손닿을 수 없는 곳에 나뒹굴고 있다. 천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 날개가 태양에 녹아내려 추락한 이카루스의 최후처럼 무력하다. 전시장 전체가 한 편의 상황극을 보여주는 듯한데, 낯선 분위기를 즐기는 관객들이 제법 많다. 최우람은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이 작품들을 구상하고 만들었다. 그는 “핵전쟁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 로봇을 그리던 일곱 살 때나 지금이나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고, 완전히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면서 “우리가 힘겹게 열고 나간 출구 뒤에는 항상 더 단단하게 잠겨 있는 새로운 출구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옛날 천연두나 페스트가 퍼질 때처럼 사람들이 죽고 혼란이 야기되는 팬데믹 상황이 펼쳐졌다”면서 “2022년 인류에게도 방주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그 방주에 모든 것을 실을 수 없을 게 분명하기에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덧붙였다. 방주가 작다고 했지만, 그의 작품 중 최대 크기이다. 안에 담긴 메시지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본 문명의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거대 담론이다. 방향 상실과 무한 반복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 상황을 보여 주는 작품들은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한다. 하지만 조롱은 아니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는 꿈과 희망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쓰레기로 버려질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폐차될 자동차에서 분리한 전조등과 후미등을 구(球) 모양으로 빚은 < urc > 연작은 각각 하얀색과 붉은색 행성을 닮았다. 이따금 불빛들이 깜빡거린다. 살아 있다는 뜻이요, 희망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 URC-2 >. 2016. 현대자동차 후미등, 금속 재료, LED, 커스텀 CPU 보드, PC. 170 × 180 × 230 cm. (왼쪽) < URC-1 >. 2014. 현대자동차 전조등, 철, COB LED, 알루미늄 레디에이터, DMX 콘트롤러, PC. 296 × 312 × 332 cm. 5전시실 복도에 설치된 거대한 원형 조각 두 점은 폐차 직전의 자동차에서 분해한 후미등과 전조등을 모아 행성 형태로 조립한 작품들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시대에 바치는 헌화 꽃 작업
와
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의료진들의 방호복 재질과 같은 타이벡(Tyvek) 섬유로 만들어졌다. 꽃은 천천히 움직여 활짝 피었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꽃잎을 오므리기를 반복한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크게 내쉬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다. 꽃과 함께 심호흡하기에 좋다. 움직임은 곧 생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바이러스로 야기된 세계적 혼란 가운데서 제작된 꽃에는 생사가 갈리는 치열한 현장에 있던 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 위로와 애도의 마음이 담겼다. 작가가 이 시대에 바치는 헌화다. 피고 지고 또 피는 꽃은 생명의 순환이며,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번 전시는 최우람의 회고전 성격을 가진다. 덕분에 작가가 기계 제작 전에 작성한 설계 도면과 기술 도면, 드로잉 등 속살 같은 작품도 볼 수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선보여 온 특유의 작고 반짝이는 기계 생명체 작업도 만날 수 있다. 작아서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정밀해서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뱅뱅 돌아가는 수레바퀴 모양의
는 지푸라기 사람들이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던
을 닮았고, 황금빛 날개를 펼친 채 여러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곤충처럼 보이는
는 35쌍의 노를 저어 대던 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기계 안에 온 우주가 담겼다. 이 기계들은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를.
. 2021. 금속 재료, 타이벡에 아크릴릭, 모터, 전자 장치(커스텀 CPU 보드, LED). 223 × 220 × 110 cm.
꽃잎 소재로 사용한 타이벡 섬유는 코로나19 검사와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착용하는 방호복 재질과 동일하다. 어려운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화라 할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최우람 작가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재난과 위기에 처한 동시대인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이 담겼다. 특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에 최첨단 기술을 결합해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조상인(Cho Sang-in 趙祥仁) 서울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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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UTUMN
뮤직비디오에 담긴 전통 공연 예술
국립국악원이 2020년부터 진행해 온 ‘Gugak in(人)’은 전통 공연 예술을 뮤직비디오로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온라인 채널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 이 영상들은 전통 공연 예술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2021년 10월, 국립국악원의 ‘Gugak in(人)’ 프로젝트 채널을 통해 악당(AKDANG 樂瞠)의 뮤직비디오< 난봉(Nanbong 難捧) > 이 스트리밍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서도 민요< 난봉가 > 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영상은 경기도 안산시의 대부광산(大阜鑛山) 퇴적암층에서 촬영했는데, 이곳은 서울 근교에서 유일하게 중생대 지질층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국립국악원 제공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국립국악원은 전통 공연 예술의 명맥을 잇기 위해 1951년 개원한 국립 음악 기관이다. 이곳이 2020년 8월부터 진행해 온 ‘Gugak in(人)’은 전통 공연 예술가들의 음악과 춤을 뮤직비디오로 제작하여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 공연 예술가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그로 인해 경제‧심리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온라인 공연 무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국립국악원은 첫해에 공모를 통해 20개 단체들을 선정하여 20편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고,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 네이버가 운영하는 네이버TV(NAVER TV)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매주 한 편씩 공개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오늘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며 변화하고 있는 국악의 새로운 면모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출연자들의 공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촬영 장소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국악인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들의 음악과 예술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국내외에 소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 5월에는 미국 방송 채널 테이스트TV(TasteTV)가 주관하는 제5회 캘리포니아 뮤직비디오 어워즈(CALIFORNIA MUSIC VIDEO AWARDS)의 베스트 월드뮤직(Best World Music) 부문에서 그룹 사위(SaaWee)의< 새로운 의식(New Ritual) > 이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큰 관심을 받으며 2021년과 2022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국립국악원의 공모를 거쳐 매년 선발된 예술 단체들의 뮤직비디오는 현재까지 약 50여 편에 이른다. 영상물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한국 전통 예술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달음(Dal:um)의< 탈(TAL) > (2020) 달음은 가야금의 하수연(Ha Su-yeon 河受延)과 거문고의 황혜영(Hwang Hye-yeong 黃惠映) 두 연주자가 2018년 결성한 듀오이다. 두 악기는 생김새는 비슷해 보이지만 구조와 주법, 음색이 매우 다르다. 가야금이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 소리를 내는 데 반해 거문고는 술대라는 막대기로 타악기처럼 현을 세게 때려 연주한다. 달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는 두 악기가 지닌 개성과 에너지를 조합해 국악 현악기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룹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작품< 탈 > 은 전통 춤의 하나인 탈춤에 사용되는 장단과 몸짓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탈’은 탈춤의 탈을 가리키는 동시에 뜻밖의 사고를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어떤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지닌다. 중의적인 곡명처럼 이 작품은 탈이 난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희망을 담았다. 영상 속 장소는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이다.
달음(Dal:um)의
(2020)
김효영(Kim Hyo-yeong 金孝英), 연정흠(Yeon Jeong-heum)의< 생황을 위한 푸리(Puri for Saenghwang) > (2020) 전통 관악기 생황과 피아노가 함께하는 이 곡은 무속 의식인 굿에 사용되는 여러 장단을 이용해 작곡되었다. 굿 음악은 굿판이 벌어지는 현장의 상황에 따라 분위기와 빠르기가 달라지는 즉흥성이 있다. 이 곡 역시 생황과 피아노가 기본적인 약속을 공유한 뒤 즉흥적인 감각으로 연주를 진행해 간다. 생황은 죽관(竹管)을 통과하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데 숨을 내뱉거나 들이마실 때 모두 소리가 난다. 국내의 뛰어난 생황 주자 중 한 사람인 김효영이 들려주는 속도감 있는 연주는 현대 도시의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을 묘사하는 듯한데, 이 영상을 촬영한 송도(松島)국제도시의 시간 변화와도 잘 어울린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접해 있는 이 도시는 최근 글로벌 기업들과 국제기구, 대학들이 터를 잡으면서 점점 활기를 띠고 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건축물들도 많은데, 영상에 등장하는 트라이보울(Tri-Bowl)도 그중 하나다. 우주선처럼 생긴 이 건물은 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김효영(Kim Hyo-yeong 金孝英), 연정흠(Yeon Jeong-heum)의< 생황을 위한 푸리(Puri for Saenghwang) > (2020)
예인 집단 아재(AJAE)의< 왈자 줄타기(WALZA tightrope walk) > (2020)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줄타기는 줄광대가 외줄 위를 걸으며 노래와 춤, 곡예를 선보이는 공연 예술이다. 줄타기 연행(演行)에서 줄광대가 중심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줄광대와 재담을 주고받는 어릿광대가 짝을 이루고 이들의 곡예와 재담에 반주를 곁들이는 악사들도 함께한다. 줄타기는 예로부터 전국을 유랑하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 유랑 예인 집단의 특기였는데, 예인 집단 아재는 이러한 전통 줄타기를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을 시도하는 단체다. 이 영상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창작 의도가 담겨 있다.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장소는 경기도 안성에 있는 죽주(竹州)산성이다. 삼국시대(4~7세기)에 처음 축조되어 고려(918~1392) 때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인 집단 아재(AJAE)의< 왈자 줄타기(WALZA tightrope walk) > (2020)
사위(SaaWee)의< 새로운 의식(New Ritual) > (2021) 사위는 타악기 연주자 김지혜(Kim Ji-hye 金智慧)와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최보람(Chay Bo-rahm [Sita Chay])이 2018년 결성한 듀오다. 이들은 장구와 바이올린 앙상블을 통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한 음악적 실험을 전개한다. 두 연주자는 굿과 전통 무용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모든 작품을 직접 작곡하는데, 전곡에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한 음악적 서사가 관통한다. 이 작품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떠난 영혼들의 춤을 표현한 곡이다. 두 사람은 음색과 음률이 전혀 다른 두 악기로 정형과 즉흥을 넘나들며 신들린 연주를 보여 준다. 영상에 등장하는 배경은 두 곳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한옥 성당이며, 강화 초지진(草芝鎭)은 17세기 중반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이다. 두 유적 모두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해 있다.
사위(SaaWee)의< 새로운 의식(New Ritual) > (2021)
전주판소리합창단(Jeonju Pansori Chorus)의< 인당수(The Indangsoo Sea 印塘水) > (2021) 판소리는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전하는 전통 성악 중 하나다. 한 명은 노래를 부르고, 다른 이는 북을 치며 반주하는 2인조 형식이다. 전라북도 전주는 예로부터 판소리가 흥행했던 도시로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판소리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된다. 2006년 창단한 전주판소리합창단은 ‘판소리 합창’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단체이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판소리 레퍼토리 중 하나인< 심청가(沈淸歌) > 의 한 대목을 새로 작곡한 곡이다. 주인공 심청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의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다. 촬영 장소는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채석강(彩石江)과 솔섬이다. 채석강은 오랜 시간 파도의 침식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해안 절벽이며, 솔섬은 화산 활동이 일어나면서 만들어 낸 독특한 퇴적 구조를 볼 수 있다.
전주판소리합창단(Jeonju Pansori Chorus)의< 인당수(The Indangsoo Sea 印塘水) > (2021)
김나리(Kim Na-ri)의< 춘몽(A Spring Dream 春夢) > (2022)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인 정가(正歌)는 과거 양반 계층에서 향유하던 품격 있는 음악 양식이다. 가곡(歌曲)과 가사(歌詞)는 정가의 한 갈래로 악기 반주가 함께하며 음절 하나하나를 길고 느리게 부른다. 오늘날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김나리는 정가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노력을 이어가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의 창작곡으로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는 가객이다. 이 곡 또한 창작곡으로 어느 따스한 봄날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느낀 감회를 담고 있다. 반복되는 몽환적인 가야금 선율에 대금 연주와 김나리의 노래가 어우러져 여유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장소는 강원도 강릉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 선교장(船橋莊)이다. 18세기 초 지어진 이 집은 300여 년 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김나리(Kim Na-ri)의< 춘몽(A Spring Dream 春夢) > (2022)
송현민(Song Hyun-min 宋玄敏) 월간 『객석』 편집장, 음악 평론가
Art Review
2022 SUMMER
화려하지만 우울한 현대인의 자화상
안창홍(Ahn Chang-hong 安昌鴻)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독자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이다.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해 에콰도르에서 열렸던 그의 전시가 올해 서울 사비나 미술관에서도 이어졌다.
.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사비나미술관 제공.
서울의 북쪽, 북한산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곳에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미술관이 있다. 국내 대표적인 사립 미술관 중 하나인 사비나 미술관(Savina Museum)이다. 이곳에서 2월 23일부터 5월 29일까지 화가 안창홍의 개인전
이 열렸다. 작가의 최신작들과 새로운 시도가 소개되었던 이 전시는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양국 간 문화 교류 행사로 열리게 됐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다른 전시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절정이었던 2020년 겨울, 사비나 미술관에서는 에콰도르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오스왈도 과야사민(Oswaldo Guayasamín 1919~1999)의 개인전
이 개최되었다. 그의 작품은 에콰도르 국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비단 에콰도르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에서도 크게 존경받는 작가다. 국내에 최초로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지난해에는 이 전시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한국 작가 안창홍의 특별전이 에콰도르에서 열렸다. 전시가 열린 장소는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대표작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과야사민 미술관(Casa Museo Guayasamín)과 인류의 예배당(The Chapel of Man, La Capilla del Hombre)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 이후 인류의 예배당에서 전시가 열린 다른 나라 작가는 안창홍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현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독자적 스타일 1953년에 태어난 안창홍은 한국 미술계에서 독특한 존재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과 치열한 작가 정신을 지닌 인물이다. 지난 50여 년간 보여 준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화가로서 자존심을 묵묵히 지켜 왔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미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선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통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홍은 미술대학 진학을 거부했다. 이는 즉 미대 진학을 위한 획일화된 입시 미술과 입학 제도를 거부했다는 의미다. 이렇듯 그는 일찍부터 제도권 미술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 형식적인 원숙함 못지않게 주제 또한 매우 진지하다. 작품을 통해 소외된 인간과 정의로운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왔다. 국내의 많은 미술 평론가들은 그를 매우 개성적인 작가로 평가한다. 화단의 집단 중심주의나 진영 논리, 혹은 아카데미즘 등과 달리 개인주의적 화법으로 역사 속 개인의 비극을 표현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차별화된 조형적 특성이 결합되었기에 누구보다도 개성이 뚜렷한 작가로 손꼽는다. 작품을 구현하는 소재 선택과 주제, 표현 방식도 다채롭고 자유롭다. 최근작 ‘유령패션’과 ‘마스크’ 시리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령패션 시리즈 안창홍은 사비나 미술관의 오스왈도 과야사민 전시를 보고 큰 감흥을 받았다. 이후 에콰도르에서 자신의 개인전 개최가 결정된 직후부터 유령 패션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된 이 시리즈의 출발은 아주 작은 크기에서 시작됐다. 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화려한 패션 모델들의 다양한 이미지를 수집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장착된 펜을 이용해 이 이미지들에 그림을 그렸고, 이 결과물을 디지털 프린트로 출력했다. ‘디지털 펜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장 전통적인 방식, 즉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이용해 붓으로 그리는 페인팅 작업으로 다시 제작했다. 기술과 예술,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법의 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델들이 취한 포즈도 각양각색이다. 인간 삶의 방식이 다양하듯 의상도 다채롭고 화려하다. 그런데 핵심은 이 모델들의 얼굴과 손, 발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인체는 사라지고 입었던 옷만 남았다. 이것은 마치 신체와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유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 2022. Oil on canvas. 162 x 133 cm.
.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 2021. 면지에 오일 파스텔(Oil pastel on cotton paper). 162.2 x 112.1 cm.
마스크 시리즈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안창홍 작품의 핵심 키워드다. 인간의 모습은 얼굴로 구체화된다. 얼굴엔 생로병사, 고통과 절망, 희망과 염원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머리’와 ‘얼굴’은 분명히 다르다고 규정했다. 예컨대 동물에게도 머리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얼굴과 다르다. 동물의 머리는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얼굴은 표정을 지닌 특별한 신체 기관이다. 물론 평생 고된 일을 한 노동자나 농민의 거친 손, 피곤에 지쳐 힘없이 축 처진 어깨 등 다른 신체 기관에서도 표정을 읽어 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눈, 코, 입이 모여 있는 얼굴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눈의 표정이 가장 중요하다. 눈빛이 지닌 상징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형 부조 작품
시리즈는 얼굴, 즉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상징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FRP에 혼합 매체(Mixed Media on FRP. 155(H) X 110(W) X 50(D) cm.
. FRP에 혼합 매체 Mixed Media on FRP. 155(H) X 110(W) X 50(D) cm.
3층 전시실에서는 투명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작가의 디지털 펜화 작품 150점을 볼 수 있다.
연작 23점과 평면 회화를 입체로 확장한 작품 3점을 감상할 수 있는 2층 전시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안창홍은 어떠한 제도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마스크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다. 우민화된 대중들, 집단 이기주의와 폭력, 마치 최면에 걸린 듯이 표리부동한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질주하는 집단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다. 눈을 가린 붕대와 이마에 뚫린 열쇠 구멍은 상실된 자아와 무의식을 상징한다. 제각각 화려한 색들로 치장했으되 막상 들여다보면 허깨비처럼 부유하는 부평초 같은 삶들. 나는 마스크를 통해 욕망의 주체이자 희생자들이기도 한 우리들에 대해, 자본과 권력의 정교한 음모와 사적인 탐욕에 못 이겨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타의에 의해 망가지는 이중적 현상을 표현하고 싶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전 지구를 강타했다. 이를 계기로 탐욕적인 인간과 욕망에 찌든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과야사민은 선구자적인 자세로 20세기 남미와 특히 조국 에콰도르가 겪은 역사적 아픔과 인간에 대한 주제 의식을 표현했다. 같은 맥락에서 안창홍 역시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고민한다. 사비나 미술관에서 마주친 그의 작품들은 겉모습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관 4층 전시장에선 작가의 드로잉 작품 100여 점이 함께 전시되었다. 유화 페인팅이나 대형 입체 작업의 기본이 된 스케치다. 작가의 그림 솜씨가 얼마나 빼어난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안창홍은 작은 드로잉부터 캔버스 유화 작업과 디지털 펜화, 입체 조형, 사진 등 미술의 거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면서 새로움을 시도한다. 열정적인 도전 정신이 만들어 낸 값진 결과물이다.
Art Review
2022 SPRING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최욱경(Choi Wook-kyung 崔郁卿 1940~1985)은 여성으로서 한계를 뛰어넘고 국제 화단의 신조류를 독자적으로 수용했던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적 화가이다. 2021년 10월 27일부터 2022년 2월 1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는 그의 예술이 위치한 좌표를 적극적으로 탐색한 전시다.
사실 최욱경은 일반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2020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 박래현(Park Re-hyun 朴崃賢 1920~1976)도 그렇지만, 최욱경의 이름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거의 잊히는 듯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살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미술사가 주로 남성 위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0~80년대에 회화와 문학,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능동적인 작가의 정체성을 쌓았던 그를 지금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공백으로 남아 있던 한국의 여성 미술사를, 더불어 한국의 미술사를 다시 쓰는 일이 될 것이다.
.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 × 195 ㎝. 리움미술관(Leeum Museum of Art) 소장.
최욱경(Choi Wook-kyung 崔郁卿)의 1970년대 중후반 작품들은 꽃과 산, 새,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유기적 형태들이 뒤얽혀 생동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 1976. 종이에 연필. 102 × 255 ㎝. 개인 소장.
미국의 현대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거대한 연필화이다. 춤추는 듯,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친 흰 형체가 숭고한 서사적 느낌을 준다.
더 큰 세상으로 이번 전시는 연대별로 3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었으며, 에필로그 섹션에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화상들과 기록물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시절 그가 배웠을 ‘입시 미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그림들은 그의 작가적 개성보다는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온 관습적인 기술을 더 부각시켜 보여 준다. 서울대 회화과 재학 중 몇몇 작품을 출품해 입상하면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그의 작업은 대체로 대학 입시 준비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스승의 화풍을 답습하던 작업 방식은 위계적인 가부장제의 습성과 많이 닮아 있다. 1978년 『코리아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미술 교육은 개개인의 작품 정체성을 존중하는데, 이것이 한국 미술 교육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시에는 그가 쓴 시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1972)도 소개되었다. 어머니는 숲에서 늑대를 만나면 쳐다보지 말고 대답하지 말라고, 산보하자고 해도 거절하라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자신은 기꺼이 늑대의 손을 잡고 친구처럼 걸었다는 내용의 시다. 늑대의 손을 잡은 것은 익숙한 세계의 금기를 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의미할 것이다. 1963년, 그렇게 시작한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 유학 생활은 그에게 작업 양식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큰 변화와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정체성 탐구 1부 ‘미국이라는 원더랜드를 향하여(1963~1970)’는 화가의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 시절과 뉴햄프셔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 조교수 시절을 좇는다. 1960년대 미국은 추상표현주의에서 후기회화적 추상으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최욱경은 이러한 작품 경향을 보인 도널드 윌릿(Donald Willett 1928~1985)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강렬한 붓칠과 색상의 추상을 이루어 나갔다. 크랜브룩 미술관에서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접한 것도 그가 당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5년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 졸업 후 그는 브루클린미술관 소속 미술학교(Brooklyn Museum School of Art)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66년 여름 메인주(州) 스코히건 회화∙조각학교(Skowhegan School of Painting & Sculpture) 작가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구상, 그래픽 미술, 판화, 팝아트 등 미국 동부의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영향으로 캔버스에 신문지를 찢어 붙여 색면과 병치하거나 잡지 이미지 위에 덧칠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네오다다, 팝아트에서 나타나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전시 제목 ‘앨리스의 고양이’와 1부의 소제목 ‘원더랜드’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 한쪽에는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가 놓여 있다. 출간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서 관련 도서들의 발행이 활발했던 1965년에는
이라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1972년 출간한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에는 「앨리스의 고양이」라는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전유신(全宥信) 학예연구사는 ‘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여성’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상황에서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겪던 작가가 앨리스 이야기에 쉽게 공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 탐구를
(1966),
(1968),
(1968)와 같이 인종 차별과 전쟁을 반대하는 다수의 작품에 녹이며 미국 사회에 적응해 갔다.
. 1965. 캔버스에 아크릴릭. 63 × 51 ㎝. 유족 소장.
작가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작품이다.
. 1966. 종이에 아크릴릭. 42.5 × 57.5 ㎝. 리움미술관 소장.
미국 유학 시절 최욱경은 아시아 출신의 여성으로만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의 본질적 모습을 탐색하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독자적 경지 2부 ‘한국과 미국,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1971~1978)’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간 시기를 돌아보았다. 최욱경은 1971년 귀국해 1974년 초까지 한국에 체류하며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파리 비엔날레 참여 작가 선발전인 앙데팡당에
(1972) 등 입체 설치 작품 세 점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은 당시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단청과 민화, 서예 등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반영한 양식 실험을 끊임없이 펼쳤다.
1976~1977년에는 뉴멕시코 로스웰미술관(Roswell Museum & Art Center)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치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1976)이나
(1977)처럼 산이나 새, 동물 등이 연상되는 유기적 형태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 대작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뉴멕시코의 이국적 풍경에 영감을 얻은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현실주의적 꿈속 풍경을 뒤섞어 자신만의 회화적 어법을 만들어 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개최한 순회전
(1978~1979)은 주로 “미국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작품은 그렇게만 규정하기 어려운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 1981. 캔버스에 아크릴릭. 80 × 177 ㎝. 개인 소장.
. 1984. 캔버스에 아크릴릭. 73.5 × 99 ㎝. 개인 소장
1979년 영구 귀국해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던 작가는 경상도 지역의 자연 풍광에서 영감을 받아 산과 섬의 조형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생전,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욱경의 모습이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추상표현주의에서 후기회화적 추상으로 이행하던 당시 미국 미술계의 변화를 경험하며 치열한 탐구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이루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부 ‘한국의 산과 섬, 그림의 고향으로(1979~1985)’에는 1979년 영구 귀국 후 영남대와 덕성여대 재직 시절, 1985년 작고하기까지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특히 영남대 교수 시절은 그의 작품 세계에 또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경상도 지역의 산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1981),
(1984)과 같은 작품에 나타난 중간색과 절제된 선∙구성은 그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평화로운 ‘원더랜드’에 정착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산과 섬의 조형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꽃잎의 형태와 질서, 강렬한 색상에도 관심이 더욱 깊어져
(1984) 같은 작품도 제작했다.
2021년 10월 27일부터 2022년 2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전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한국 추상 미술의 대표적 여성 화가인 최욱경의 예술 세계 전반을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 지안
잃어버린 이름 최욱경은 시 「나의 이름은」에서 자신을 어린 시절엔 겁 많은 눈 큰 아이였고, 유학 시절엔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말을 잃은 벙어리 아이였고,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가던 무렵에는 무지개 꿈을 좇다가 길을 잃은 아이였으며,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 끈질기게 시와 그림으로 스스로를 조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0~80년대는 후기회화적 추상과 형식을 공유하는 단색조 회화가 이미 한국 미술계의 주류 양식으로 자리 잡은 때였다. 미술사학자 최열(崔烈)에 의하면 최욱경은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토착화시켰지만, 한국 미술계는 그것을 한물간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리 크래스너를 ‘미세스 잭슨 폴록’이라 칭하던 당시 미술계의 성차별주의 또한 그를 곤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더 힘들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최욱경은 1985년,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21년 파리 퐁피두센터는 추상미술에 기여한 세계 여러 나라 여성 작가 106명의 작품 500여 점을 모아
이라는 전시를 열었는데, 이 중에는 최욱경의 회화 세 점도 포함되었다. 그가 찾고자 했고 말하고자 했던 언어가 그 작품들만으로 제대로 소개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를 통해, 여기서부터 그의 역사를, 또는 여성의 미술사를 다시 써나가야 할 것이다.
Art Review
2021 WINTER
한국식 주크박스 뮤지컬의 도전
1980~90년대 젊은 세대의 감성을 흔들었던 이영훈(1960~2008 Lee Young-hoon 李永勳)의 팝 발라드는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이 노래들을 모아 엮은 뮤지컬
가 올 가을 시즌 세번째 무대에 올려져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는 1980~90년대 젊은 세대에게 크게 사랑받았던 팝발라드 작곡가 이영훈(Lee Young-hoon 李永勳 1960~2008)의 명곡들을 바탕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서울의 광화문과 덕수궁 옆 정동길을 무대로 꾸몄다.
© CJ ENM
요즘 흥행하는 뮤지컬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왕년의 인기 영화를 활용한 무비컬(moviecal) 또는 흘러간 대중음악으로 꾸민 주크박스 뮤지컬(jukebox musical). 거대한 고릴라 인형이 무대에 등장하는
이나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가 가장 대표적인 무비컬이고, 미국 밴드 포 시즌스(Four Seasons)의 음악으로 꾸민
나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들이 연이어 펼쳐지는
가 흥행을 보증하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명사다. 대중음악을 무대용 콘텐츠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을 팝 뮤지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파고가 국내 시장에도 불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7~9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무대를 꾸민 이후 지방 공연을 이어간
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싱어롱 커튼콜 이 작품은 소위 ‘트리뷰트 뮤지컬’ 계열에 속한다. 이영훈 작곡가가 만들고 가수 이문세(李文世)가 노래했던 음악들이 소재로 쓰였다. 사실 작곡가 이영훈을 빼고 1980~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말하긴 힘들다.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처럼 그는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뮤지컬 제목으로 쓰인
(1988)를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1987),
(1988),
(1991) 등은 모두 관객들이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게 되는 주옥같은 당대의 명곡들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노스탤지어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뮤지컬 마니아들뿐 아니라 이영훈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게다가 커튼콜에서 아이돌 그룹 빅뱅이 리메이크해 큰 인기를 누렸던
(1988)이 연주되면 관객들은 더 이상 객석에 앉아만 있기 힘들게 된다. 관객들이 목 놓아 노래를 따라부르며 환호하는 ‘싱어롱 커튼콜’은 이 무대가 만들어 낸 특별한 체험이자 감동이었다.
극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시간 여행 안내자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차지연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이 극본을 쓴 이 작품은 기억과 현실, 환상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세 가지 버전 독특하게도
는 여러 버전들이 있다. 이영훈의 곡들을 뮤지컬로 재구성한 첫 시도는 인기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가 2011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렸던 무대다. 세간에는 이영훈이 암 투병 말기에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후문도 있다.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특히 중장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며 대형 무대에서 초연되는 창작 뮤지컬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을 기록했고, 이듬해 LG아트센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로 시도된 김규종 연출가의
는 전작의 스핀오프 작품이며, 소극장을 중심으로 라이브가 강조된 무대였다. 장기판 모양의 격자 무대 세트 안에 악기 연주자들이 각각 자리 잡고 한층 강화된 음악적 매력을 제공했다. 콘서트에 가까운 이 버전은 상하이, 항저우, 난창, 푸젠 등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공연을 이어갔다.
올해 상연된
는 유명한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이 극본을 새로 쓰고, 이지나가 복귀해 연출을 맡았다. 임종을 앞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참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기억과 현실, 환상이 교차한다.
이 세 번째 버전은 2017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 초연과 2018년 재연에 이어 이번이 삼연째다. 이 작품은 스타일리시한 무대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아온 연출가의 작품답게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성을 잘 담아낸 수작이었으며, 여전히 식지 않은 이영훈표 음악들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해 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 캐스팅도 화제가 되었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가수와 배우들의 출연, 호흡이 잘 맞는 연출과 음악감독, 물오른 듯한 무대 디자인 등 솜씨 좋은 제작진의 조합을 비롯하여 적절한 마케팅 전략과 공연의 시기적 선택 등이 주요한 흥행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곡가 이영훈 이영훈이 처음부터 대중음악계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극이나 방송, 무용 등에 사용되는 배경음악의 작곡가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고, 20대 중반 대중음악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이 무렵 그는 1978년 가수 겸 MC로 데뷔한 이문세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2집 음반까지 냈던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라디오 DJ로 더 유명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1985년 발표한 3집 앨범의 타이틀곡
가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고, 이 노래뿐 아니라 음반에 수록되어 있던 곡들 대부분이 히트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이영훈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사가이자 작곡가로 떠올랐다. 2년 후에 나온 이문세의 4집
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드는 앨범으로, 당시 280만 장 이상의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두 사람의 동행은 2001년 13집
까지 계속됐다.
그는 이문세와의 협업이 뜸해진 시기에는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만들거나 이문세에게 주었던 노래들을 편곡해 관현악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서울 덕수궁 정동길에 세워진 그의 노래비는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감회의 장소가 되고 있다.
1980년대 군부 독재에 맞선 젊은이들의 시위 현장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주인공 역을 맡은 가수 윤도현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영훈의 곡
(1988)를 부르고 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역시 노스탤지어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친숙함의 장점 한국에서는
가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명사이자 전부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이 장르를 세분화하면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그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1980년대 히트한 록 음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처럼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대중음악들을 시대나 주제, 형식에 따라 엮어내는 컴필레이션 뮤지컬 계열과
처럼 특정 뮤지션의 음악적 산물만을 활용하는 트리뷰트 뮤지컬 계열이 있다. 전자가 이야기의 주제에 따라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후자는 기존의 공연 애호가뿐 아니라 원래 그 음악을 좋아했던 팬들까지도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다. 물론 해당 뮤지션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거나 세상을 떠났다면 관심은 더욱 배가되게 마련이다.
무비컬이나 주크박스 뮤지컬이, 특히 후자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관객들이 생소한 노래와 이야기를 한꺼번에 대하는 부담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 두세 시간 남짓한 무대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수십 곡이나 들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작곡자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총동원한 수려한 멜로디를 잔뜩 들려주고 싶겠지만, 관객은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도 있다. 주요한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변주하거나 공연 전 미리 콘셉트 음반을 만들어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은 장점이 많은 공연 형식이다. 일단 무대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이미 관객들과 친숙하다. 게다가 매번 현장에서 재연되는 만큼 그 생동감이나 역동성은 거실 오디오나 책상 위 조그마한 스피커로 들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주크박스 뮤지컬에 공연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원곡이나 해당 음악가를 추종하던 음악 팬들까지 몰려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이미 대중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콘텐츠를 활용하기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서도 흥행에 대한 부담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Art Review
2021 AUTUMN
이미지와 텍스트로 소통하다
사회적 문제를 재치 있고 날카롭게 조명해 온 민중미술 작가 주재환(Joo Jae-hwan 周在煥 1941~)과 인기 웹툰 작가 주호민(Joo Ho-min 周浩旻 1981~)은 부자 관계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활용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은 이런 공통점에 초점을 맞춘 전시다.
(왼쪽). 주재환. 2020. 캔버스에 아크릴, 플라스틱 장난감. 53.2 × 45.5 ㎝.
. 주호민. 2021. 디지털 드로잉.
화가 주재환(Joo Jae-hwan 周在煥)과 웹툰 작가 주호민(Joo Ho-min 周浩旻) 부자가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에 나란히 걸린 서로가 그려준 초상화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재환은 현대사의 주요 이슈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망해 왔으며, 아들 주호민은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트 있게 해석한 웹툰
로 널리 알려졌다.
ⓒ 박홍순(朴弘淳), 월간미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가야 겨우 이해가 되는 난해한 미술 전시들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별다른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18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린
이 바로 그런 전시다. 언뜻 가볍게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얄팍하지 않다. 다양한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진솔함과 유머가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재환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는 작품을 주로 창작해 왔다.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시적 메타포를 지니며, 보는 이의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주호민의 웹툰에서 텍스트는 대개 말풍선 속 대사로 표현되며 서술성이 강조되어 독자에게 영화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상이한 특성을 지니는 두 장르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묘미이다.
. 주재환. 2010. 캔버스에 아크릴. 193.7 × 130 ㎝.
1980년 ‘현실과 발언’ 그룹 창립전에 출품해 세상에 알려진 이 작품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부조리와 압박에 대한 풍자로 마르셀 뒤샹의
를 패러디한 것이다. ‘현실과 발언’은 이후 10년 동안 민중 미술 운동을 통해 미술의 사회 참여를 이끌었다.
아버지 주재환 주재환은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집안 사정으로 중퇴를 결정한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흔 즈음에야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이에 대해 그는 “체질적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80년 창립해 1990년 해체된 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은 민중미술 운동과 미술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 낸 모태였다. 이 단체의 창단 멤버였던 그는 창립전에 마르셀 뒤샹의
를 패러디한 작품
를 출품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변주되어 그려졌는데, 제목에 언급된 ‘봄비’는 사실 계단에 서 있는 남자들이 누는 오줌이다. 아래로 갈수록 굵어지는 오줌 줄기는 하층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견뎌야 하는 부조리와 억압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 소재는 일상 곳곳에 뻗어 있다. 다 마신 음료수 병을 빨래 건조대에 매달아 환경 문제를 암시한
(2005)나 현대 사회에 부재하는 도덕 관념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동네 목욕탕에서 가져온 수건을 재료로 삼은
(2012)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버려진 일상 사물을 재활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데,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나 유머 감각이 “타동사가 아닌 자동사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관람객이 전시를 보다가 하품이 나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세월이 지나며 깨달은 게 있다면 모든 작가에겐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그는 사회적 불평등에, 군부 독재에, 정형화된 한국의 단색화 미술에 저항했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그의 마음도 예전보다 순해진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회에는 희망의 노선과 절망의 노선이 늘 꽈배기처럼 얽혀서 함께 쭉 간다. 긍정과 부정이 섞여서 가는 게 인간의 운명”임을 자각한 그는 동시에 작가의 무기력함도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작품이 전시장에 내걸리는 순간 작가는 무력해지고, 평가는 관람객에게 맡겨진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바를 발견하는 관람객을 볼 때 다시 또 배우게 된다.”
. 주재환. 2005. 알루미늄 빨래대, 각종 음료수 제품, 드링크 제품. 가변 크기. .
대형 빨래 건조대에 각종 음료수를 담았던 빈 페트병과 빈 캔을 주렁주렁 매달아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또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일으키는 탄산음료를 통해 대량소비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양면성도 담아냈다.
. 주재환. 2010. 유리 액자에 냄비, 돌, 사진 복사. 70.8 × 53.7 ㎝.
배고픈 아이를 억지로 재워야 하는 브라질 빈민촌 엄마의 이야기와 백금을 입힌 두개골에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를 대비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풍자한 작품이다.
. 주재환. 2012. 캔버스에 아크릴, 수건 콜라주. 66 × 53 ㎝.
동네 목욕탕에서 수건을 훔치는 사람들의 도덕 관념을 꼬집은 작품이다. 주재환은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소재를 유머를 담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 주재환. 2008. 캔버스에 아크릴, 매직 잉크. 96.3 × 96.5 ㎝.
2008년 당시 재벌 기업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리히텐슈타인의
을 패러디해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아버지와 아들, 미술과 웹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은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신명 나는 한바탕 잔치이다.
. 주호민. 2021. 후렉스에 디지털 출력. 740 × 220 ㎝.
주재환의 대표작
를 패러디한 주호민의 대형 설치물로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유머 감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아들 주호민 바로 이 지점에서 주호민은 그의 아버지와 맞닿아 있다. 그에게도 독자들의 평가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랐다.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는지 중학생 때부터 만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자신이 그린 만화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빠른 피드백에 ‘중독’되었다. ‘더 웃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2000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만화를 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커리어가 시작됐다. 독자들의 평가가 그를 결국 웹툰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이다. 군대 생활을 소재로 한 공식 데뷔작
(2005)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2010~2012) 시리즈로 국가 대표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2017)은 누적 관객수 1,400만 명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 역대 3위에 오를 만큼 성공했으며, 후속작
(2018) 역시 누적 관객수 1,200만 명을 동원했다. 유튜버로도 활동하며 21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이 스타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만화라는 게 미술관에 걸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서 벽에 걸리는 게 영 어색하고, 관람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미술관 2층을 가득 메운 주재환 작가의 다양한 회화와 설치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반면에 주호민 작가의 대표작들 중 주요 장면을 디지털 프린트한 전시물과 콘티가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주로 전시한 3층 전시실은 언뜻 휑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전시물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며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의 행간이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듯 3층 공간의 여백은 매 장면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 작용했다. 창작 당시 그가 참고했던 서적들 역시 일상적인 것들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변신의 순간을 보여 준다.
3층 전시실의 관람객들이 한국인의 저승관이 담겨 있는 주호민의 웹툰
을 감상하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화와 설화적 요소로 전시 벽면을 구성했다.
ⓒ 연합뉴스
컬래버레이션 이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점이다. 전시장 입구에 나란히 걸린 두 사람의 초상 ― 아이스크림 모형과 선글라스를 활용한 주재환의 콜라주 작품
(2020)과 웹툰 스타일로 표현한 주호민의 디지털 드로잉
(2021) ―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초상화에 대해 담담한 평가를 내렸다. 아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잘 늙었다”는 것을 느꼈다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작품이 “그냥 너무 웃기다”는 아들….
한편 아들은 아버지의 대표작
를 패러디한 대형 설치물
(2021)를 내놓았다. 전자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강하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후자는 여러 캐릭터들이 서로를 끌어 주고 올려 주는 상승과 협업의 이미지를 가진다.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유머 감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낸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이 “그저 당연하게” 느껴졌다는 주호민은 자신이 막상 창작자가 되어 보니 “얼마나 어렵고 신기한 일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지금 아버지가 여든인데 여전히 작업하시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는 벌써 힘이 드는데…. 어떻게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오셨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라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전시는 스트리머 주호민이 화가 아버지와 협업한 영상물로 끝을 맺는다. 두 명의 배우 중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 결국 최종적인 이상형을 선택하는 형식의 ‘이상형 올림픽’ 게임을 변형시켜, 아들은 아버지에게 본인의 작품 중 더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고르게 했다.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각 작품에 얽힌 자신의 기억, 소회 그리고 아들과의 추억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전시 제목에 아들의 이름이 먼저 들어가서 서운하지 않냐는 필자의 우문에 주재환 작가는 “오히려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회화니 만화니 하는 장르 구분도, 누가 먼저니 따지는 것도 전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아버지와 아들, 미술과 웹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은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신명 나는 한바탕 잔치이다.
Art Review
2021 SUMMER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올해 첫 기획전으로 1930~50년대 활발했던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특히 이 전시는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불행한 시대에 화가와 문인들의 교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큰 화제가 되었다.
1.
. 구본웅(具本雄 1906~1953). 1937. 캔버스에 유채. 71.4× 89.4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구본웅은 인상파 위주의 아카데미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화면에 그려진프랑스 미술 잡지 『Cahiers d’Art』를 통해 알 수 있듯 구본웅과 그의 지인들은 서구의 새로운 문화 예술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향유했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 통치가 더욱 혹독해진 암흑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가 진행되며 한국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가 일어난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경성(일제 강점기의 서울)은 신문물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입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포장된 도로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고, 화려한 고급 백화점들이들어섰다. 거리에는 새로운 유행을 앞서 받아들여 뾰족구두를 신은 모던 걸과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들이 가득했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근대의 낭만이 혼재했던 경성은 예술가들의도시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중심가 골목 곳곳에 즐비한 다방은 단순히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이국적 실내 장식과 커피 향기속에 울려 퍼지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노래를 들으며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해 이야기했다.
카루소와 아방가르드 예술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이 ‘역설적 낭만’의 시대를 돌아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전시는 연일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근대를 대표하는 50여 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제목이 말해주듯 화가와 시인, 소설가들이 장르의 벽을 넘어 서로 어떻게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적 이상을 펼쳐냈는지 돌이켜본다.
전시는 4개의 주제로 요약된다. ‘전위와 융합’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은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이기도했던 이상(李箱 1910~1937)이 운영한 다방 ‘제비’와 그곳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건축을 전공한 이상은 학교 졸업 후 한동안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하기도했는데, 폐결핵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 단편소설 「날개」와 실험주의적 시 「오감도」 등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개척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비는 희멀건 벽에 이상의 자화상 한 점과 어릴 적부터의 친구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그림 몇 점만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별다른 실내 장식도 없는 초라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구본웅을 위시해 이상과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기림(金起林 1908~?) 등이 이곳에 주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이 다방에 모여 앉아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최신 경향과 작품에 대해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었다. 이들에게 제비는 단순한 사교 공간이 아니라 최첨단 사조를 흡수하며 예술적 자양분을 얻었던 창작의 산실이었다. 특히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와르네 클레르(René Clair)의 전위적인 영화는 이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이상은 장 콕토의 경구들을 다방에 걸어두었으며, 박태원은 파시즘을 풍자하는 르네 클레르의
(1934)를 패러디해 식민지 현실을 위트 있게 꼬집은 작품 「영화에서 얻은 콩트: 최후의 억만장자」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흔적과 친밀했던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구본웅이 그린
(1935) 속 삐딱한 인상의 주인공은 이상이다. 둘은 네살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학창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죽이 잘 맞았다. 김기림은 구본웅의 파격적인 야수파 화풍에 누구보다 찬사를 보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이상이 27살의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 선집』(1949)을 냈는데, 이것이 이상의 첫 작품집이었다. 이상 역시 김기림의 첫 번째 시집『기상도(氣象圖)』(1936)의 장정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때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독특한 문체와이상의 초현실적인 삽화는 독창적인 지면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 황술조(黃述祚 1904~1939). 1939. 캔버스에유채. 31.5 × 23 ㎝. 개인 소장.
구본웅과 함께 같은 미술 단체에서 활동했던 황술조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던 해에 그린 것이다.
1920~40년대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제2 전시실. 이 시기 간행되었던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비롯해 신문사들이 발행했던 각종 잡지와삽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청색지(靑色紙)』 제5집. 1939년 5월 발행. (왼쪽)『청색지(靑色紙)』 제8집. 1940년 2월 발행. ⓒ 아단(雅丹)문고(Adanmungo Foundation)ⓒ 근대서지연구소 1938년 6월창간되어 1940년 2월 통권 8집을 마지막으로 종간된 『청색지』는 구본웅이 발행과 편집을 맡은 예술 종합 잡지이다. 문학을 위주로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분야를망라했으며 당대의 유명 필진들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기사를 제공했다.
시와 그림의 만남 소설에 삽화를 곁들이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한시적으로나마 일정한 수입을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신문이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 감각을 보여 주는 매체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정갈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제2 전시실은 1920~40년대 발행된 신문과 잡지, 책을 중심으로 당시 인쇄매체가 이뤄낸 이 같은 성과를 집대성했다. ‘지상(紙上)의 미술관’을 제목으로 한 이 전시는 안석주(安碩柱 1901~1950)를 필두로 대표적인 삽화가 12명의 작품을 곁들인 신문 연재소설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도록 구성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잡지도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시에 삽화를 입힌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본격등장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에 정현웅(鄭玄雄1911~1976)이 그림을 그린 1938년도 작품이 대표적이다. 주황색과 흰 여백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백석의 시를 닮아 아련한 정감 속에 묘한 공허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같이 만들었던 조선일보사 발행 문예잡지 『여성』에 실렸다.
세련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향토색 짙은 서정시들을 발표했던 백석과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화가 정현웅은 신문사동료로 시작한 관계였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웅은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백석을 종종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얼굴이‘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는 찬사를 쓴 짧은 글 「미스터 백석」(1939)을 『문장』이라는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의 우정은 직장을 떠나서도 이어졌다. 1940년 훌쩍 만주로떠나버린 백석은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라는 시를 지어 보냈고, 남북 분단 이후 1950년 월북한 정현웅은 북에서 백석과 다시 만나 그의 시를 꾸려 시집으로 엮어냈다. 그 시집의뒤표지에는 ‘미스터 백석’보다 더 중후한 모습의 백석이 그려져 있다.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 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
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정현웅(鄭玄雄1911~1976). 아단문고 제공. 시인 백석이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던 잡지 『여성(女性)』 제3권 제3호(1938년 3월 발행)에 발표한 시에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곁들인 ‘화문(畵文)’이다. 당시에는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화문이라는 장르를 통해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3.
. 이중섭(李仲燮 1916~1956). 1955.종이에 연필, 유채. 32 × 49.5 ㎝. 개인 소장.
한국전쟁 직후 시인 구상의 집에서 기거하던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친구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 현대문학사에서 1955년 1월 창간한 문학 잡지 『현대문학』의 표지들. 장욱진(張旭鎭 1918~1990), 천경자(千鏡子1924~2015),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화가의 글과그림 ‘이인행각(二人行脚)’을 주제로 한 제3 전시실은 1930~50년대로 시대적 배경을 확장해 예술가들의 개인적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동시대의문인과 화가들은 물론 다음 세대 예술가들과의 인적 관계에서도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기림이었다. 그는 신문 기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으며,평론을 통해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런 역할을 이어받았던 이로 김광균(金光均 1914~1993)을 들 수 있다. 시인인 동시에 사업가였던 그는 우수한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지원했다. 그래서 이 전시실의 여러 작품들이 그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은 단연코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그린
(1955)일 것이다. 그림 속 이중섭은 구상(具常 1919~2004)의 가족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한국전쟁 중 생활고로 인해 일본의 처가로 떠난 가족과 헤어져 지내던 시기, 이중섭은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렵게 개최한 전시회가계획했던 대로 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자 자포자기했고, 당시 그런 심경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남편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구상에게 보낸 편지가 나란히전시되어 있어 전쟁이 가져온 가난과 병고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와 그 가족의 사연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의 글∙그림’을 보여 주는 마지막전시실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글쓰기에도 남다른 경지에 이르렀던 6명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장욱진(張旭鎭1918~1990), 평생 산을 사랑했던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독특한 화풍뿐 아니라 내면에 솔직한 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포함되었다. 그중 전시의 말미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전면점화’ 네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가 수많은 작은 점들이 빼곡히 박힌 소우주를 바라보고있으면 앞서 지나온 문인과 화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어두운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그들을 이제 비로소 한자리에 불러 모은 듯하다.
2. <18-II-72 #221>. 김환기. 1972. 코튼에 유채. 49 × 145 ㎝.ⓒ환기재단․환기미술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 김환기는 여러 잡지에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발표했으며,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말년의 김환기를 대표하는서정적인 추상화 ‘전면점화(全面點畵)’는 그가 뉴욕에 머무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기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6~1977)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단초가발견된다.
Art Review
2021 SPRING
추상화시킨 일상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설치미술가 양혜규(Yang Hae-gue [Haegue Yang] 梁慧圭)는 그간 일상 속 친숙한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을 연출해 왔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회에서는 이런 시도들이 더욱 다양하고 과감해지며 또 다른 화두에 대한 작가의 도전을 보여 줬다.
양혜규는 빨래 건조대, 블라인드, 전구 등 일상적 소재를 작품에 자주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로 참여해 철제 프레임과 선풍기, 뜨개실 등으로 부엌을 형상화한 작품
을 선보인 바 있다. 이후 카셀의 도큐멘타(a in Kassel),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센터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상 소재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다양한 형태로 변주시켜 왔으며, 여기에 그래픽 디자인을 활용한 벽지 설치 작업까지 더해졌다. 최근작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이미지 밀도가 과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에 대해 그는 난해함을 본인 작품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2019년 1월, 타이베이 난강 전시 센터(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에서 열린 제1회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台北 當代) 아트페어에 참여한 양혜규(Haegue Yang 梁慧圭). 그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나 일상의 사물들을 설치, 조각,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한다. ⓒ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및 강철 천장 구조물, 강선, 회전 무대, LED 등, 전선. 1105 × 780 × 780 cm.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KINDL – Centre for Contemporary Art)는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20미터 층고에 달하는 보일러 하우스 공간에 단독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17년 9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양혜규의 작품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 ⓒ Jens Ziehe, 작가 제공
동일한 대상, 다른 해석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2020. 9. 29.~2021. 2. 28.)도 예외가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대형 설치 작품
인데, 제목부터 난해한 이 작품은 베니션 블라인드와 조명 기구들을 활용한 11m 높이의 대형 모빌 형태를 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짙은 푸른색과 검은색의 베니션 블라인드가 서로 엇갈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품의 내외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고, 거대한 규모와 색상이 연출해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에 사용된 베니션 블라인드는 그의 대표작
의 상징과도 동일한 소재다. 전시장 내부로 이동하면 흰 블라인드를 활용한
연작을 볼 수 있는데, 제목에 언급된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니멀리즘적 요소가 강하다. 이 연작들 앞에서 관람객들은 21세기에 과거의 미니멀리즘 양식을 되풀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블라인드에 대해 “누군가는 서양적, 다른 이는 동양적이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이는 서구적인 오피스 공간을, 다른 이는 동양적인 대나무 발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대상을 통해 각기 다른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현상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다른 작품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7년 멕시코 시티 쿠리만주토(kurimanzutto)에서 열린
전시 전경. 이 전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린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 Omar Luis Olguín, 쿠리만주토 제공
. 2017. 인조 짚,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천장 구조물,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강선, 너설, 부포. 580 × 750 × 60 cm.
. 2017. 보안 무늬 편지 봉투, 모눈종이, 색종이, 사포, 액자, 접착 비닐 필름 11개. 86.2 × 86.2 cm; 57.2 × 57.2 cm; 29.2 × 29.2 cm.
.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천장 구조물, 강선, 형광등, 전선. 878 × 563 × 1088 cm.
뒤섞인 경계 본격적인 전시가 펼쳐지는 제5전시실에 이르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연작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인조 짚과 플라스틱 끈, 놋쇠 방울이 주된 재료로 금속 방울이 알알이 달려 있는 모습 때문에 첫눈에는 기괴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조금씩 눈에 익숙해지면 이들 형태가 각각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임이 드러난다.
블라인드를 활용한 작품에서 동서양의 경계를 겨냥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를 탐색한다. 헤어드라이어를 게로, 두 개의 마우스를 쌓아 곤충 같은 형체를 만든다. 또는 다리미를 맞붙여 가위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들엔 바퀴가 달려 있어 움직일 때 소리가 나기도 한다.
작품 오른쪽 벽면에는 네 가지 유형의 문손잡이들을 달았는데, 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노리는 효과도 비슷하다. 손잡이는 문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벽에 달리면서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맥락에 따라 바뀌는 사물의 의미를 통해 작가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듯하다. 다만 이런 전략은 이미 100년 전 다다이즘 작가들이 보여준 바 있어 아쉽게 느껴진다. 양혜규가 다리미를 교차해 가위 형태를 만들기 훨씬 이전에 시각미술가 만 레이(Man Ray)는 다리미판에 압정을 박아 그 기능과 의미를 무화시킨 바 있다. 1921년 작품
이 바로 그것이다. 더 거슬러 오른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와
(1917)이라고 명명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요즘엔 미술사에 나타난 특징적 요소들을 시대와 상관없이 작가가 마음껏 차용하는 경향이 국제 미술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19세기 이전 회화를 차용해 추상화하는 영국 작가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은 물론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도 자신의 우상인 피카소의 작품을 대놓고 빗댄다. 그렇다면 개념미술을 빌린 양혜규만의 목소리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
. 2020. 인공지능(타입 캐스트), 양혜규 목소리, 스피커. 가변 크기. 기술 제공 네오사피엔스.
(오른쪽)
. 2020. 폴리에스터 현수막 천에 수성 잉크젯 인쇄, 애드벌룬, 아일렛, 강선, 한지. 가변 크기. 그래픽 지원 유예나.
국립현대미술관의
(2020. 9. 29.~2021. 2. 28.) 전시에서 양혜규는 인공 지능으로 복제된 자신의 목소리를 삽입하거나 현수막에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 홍철기(Cheolki Hong),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다리미, 헤어드라이어, 마우스, 냄비 형태를 토대로 재료들을 서로 맞붙이거나 교차 결합하여 혼종 기물을 탄생시켰다. ⓒ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2020.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분체 도장 격자망, 분체 도장 손잡이, 바퀴, 검은색 놋쇠가 도금된 방울, 놋쇠가 도금된 방울, 빨간색 스테인리스강 방울, 스테인리스강 방울, 금속 고리, 플라스틱 끈.
(왼쪽)
. 208 x 151 x 86 cm.
(왼쪽에서 두 번째)
. 155 x 227 x 115 cm. (왼쪽에서 세 번째) . 291 x 111 x 97 cm. (오른쪽) . 224 x 176 x 122 cm.
현실과 추상 이번 전시에서 양혜규는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현수막 작품
과 인공지능 목소리가 나오는
가 그것이다.
에 대해 작가는 “정치적 선전물을 닮은 강렬한 그래픽과 과장된 타이포그래피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5개의 현수막에는 오방색(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이 상징하는 다섯 가지 요소(나무, 불, 흙, 철, 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현수막 아래쪽에는 한지로 만든 무구가 술처럼 달려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제목
와 큰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작가는 일상에 존재하는 공기와 물이 ‘O2’와 ‘H2O’로 기호화되는 것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실을 다섯 개의 요소로 추상화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설명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는 현수막 사이 사이에 스피커를 매단 작품이다. 스피커에서는 인공지능 기술로 복제된 작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과 서울 사이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혜규는 199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해 미술대학 슈테델슐레(Städelschule)를 졸업했다. 2005년부터는 베를린에 정착해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서울에도 스튜디오를 열고 두 곳을 오가며 작업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팬데믹 상황인 2020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재개관을 기념한
(2019. 10.~2021. 2. 28.), 그리고 영국 콘월의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Tate St Ives)에서 대규모 전시
(2020. 10. 24.~2021. 5. 3.)가 열렸다.
2014년 이불(Lee Bul 李昢)로 시작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중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연례전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 미술관이 기획한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4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됐다.
Art Review
2020 WINTER
박래현의 삶과 예술
“곤두박질하듯 살며 사랑과 예술로 인간 승리를 이룬 삶”– 청각 장애 화가의 헌신적인 아내일뿐 아니라 자신도 그 못지않게 훌륭한 작가였던 박래현(Park Re-hyun 朴崃賢 1920~1976)은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설이 된 삶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작가 박래현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2020년 9월 24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은 데뷔 시절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약 30년간에 걸친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전시는 주로 여인들을 소재로 한 1940~50년대의 구상 작품, 남편 김기창(Kim ki-chang 金基昶)과 함께한 부부전 자료들과 박래현의 개인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글들, 1960년대 추상화, 그리고 1970년대 판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인 ‘삼중통역자’는 청각 장애를 가졌던 남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국어, 영어, 그리고 구화(口話)의 삼중통역자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전시는 박래현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양식의 변화 1920년에 태어난 박래현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미술을 시작했다. 경성사범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시절 일본인 미술 교사 에구치 게이시로(Eguchi Keishiro)에게 그림을 배웠고, 1940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단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이다. 붉은색 화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검은색 기모노 차림의 일본 소녀를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이 작품은 관습적인 일본화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때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감각적이고 과감한 구성미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 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박래현의 가족은 친정이 있는 군산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4년여 동안 부부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오로지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조형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1956)과
(1956)으로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영예로운 시간을 맞이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반 시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소재는 여인들인데, 피난 시절을 거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은 점점 꾸밈없는 가난하고 평범한 모습을 하게 된다. 데뷔작
과 비교해 볼 때 그로부터 13년 후 그린 과 두 작품에서는 큰 변화가 느껴진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작가가 속한 지리적 위치, 그림을 대하는 태도, 결혼 후의 개인적인 환경,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 모두 너무나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양식적인 변화이다.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래현이 1965년 한 월간 잡지에 기고한 「동양화의 추상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 말이다. 이런 생각은 선과 색채의 적절한 융화를 통한 대상의 간결하고 입체적인 표현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화풍의 변화는 1955년도 작품 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고 평범한 두 소녀의 모습이지만 언니의 살색과 저고리의 색이 같아 구분이 되지 않고 동생의 치마 또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먹선은 작품의 소재에 외곽선으로 쓰이는데, 박래현은 먹선과 채색을 하기 위한 붓터치를 혼용하여 자유롭게 그어 나갔다. 이 시기 그가 직접 언급한 ‘입체적’이라는 표현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화단에 수용된 큐비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는 피카소를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무쌍하고 항상 싱싱한 젊음을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하는가 하면 1973년 4월에 사망한 피카소의 부고 기사와 그의 작품 이미지들을 콜라주하여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추상화와 판화 1950년대 후반까지 박래현의 그림에서 대상은 점점 더 단순해졌다. 1960년 1월, 그는 동양화의 새로운 모색을 함께하기 위해 결성된 그룹 백양회(White Sun Group 白陽會)의 일원으로 타이완을 방문하여
이라는 첫 해외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이듬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이어졌는데 박래현은 이 시기의 해외 여행을 통해 동시대 동아시아 화가들이 전통적인 양식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서는 앵포르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비정형’을 의미하는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카데믹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유럽 미술의 한 동향으로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두터운 유화 물감의 질감을 살려 표현했다. 박래현은 이 유행을 수용하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이용한 독자적인 화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변화는 1962년 12월에 열린 여섯 번째 부부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나타났다.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적갈색 계열의 색채 덩어리들로 구성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된 것이다. 이 무렵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는 바탕 종이를 구겨서 생긴 결 위에 먹을 그어 자국을 만들기도 하고, 종이 위에 안료를 쏟아 흐르게 한 후 번지게 하여 먹과 물감이 서로 뒤섞이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은 1961년부터 63년경까지 계속되다가 1966년부터 이른바 ‘맷방석 시리즈(straw mat series)’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가늘고 수없이 반복되는 먹선이 더해져 보다 높은 완성도에 다다르게 된다.
(1966~67)을 보면, 앵포르멜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화려하고 힘찬 선으로 가득 찬 다른 동양화가들과 달리 얇고 질긴 한지에 가는 선을 그으면서 종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특유의 수공예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여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뉴욕 프랫 센터(Pratt Graphic Center)와 밥 블랙번 판화공방(Bob Blackburn Print Studio)에서 수학했는데, 같은 시기 그의 큰딸은 프랫 인스티튜트에 재학 중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에칭 기법을 사용하여 기존의 동양화 작품을 판화로 변환하는 데 주력했다.
(1970~73) 이후 판화만의 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동양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입체적 질감 효과를 창출해 냈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직접 작가가 손으로 그 물질성을 느낄 수 있는 매체이므로 그의 장기인 세밀한 터치가 물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작업 과정은 작가 자신에게 더없는 기쁨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 이유는 박래현이 앵포르멜의 ‘분위기’는 받아들이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살려 특유의 섬세한 기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식의 시간 박래현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새로운 시도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김기창의 아내’로 더 잘 알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1943년 그는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을 차지하며 중견 작가로 자리를 굳히던 김기창과 만났고, 3년 뒤 결혼했다. 이들의 만남은 김기창의 표현대로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당신’의 결합이었는데 그해 한국 화단에 큰 이슈가 되었다. 평생의 반려자로 인해 자신의 예술 인생이 지속될 수 있을 것임을 감지했었기에 가능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호를 지어 준 이도 남편이었다. 김기창은 자신의 호 ‘운보(雲甫)’에 어울리는 ‘우향(雨鄕)’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는데, 이는 시골 고향(鄕)에 비(雨)를 내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이다. 박래현은 네 아이를 키우며 청각 장애 남편이 혼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될 때까지 5년 동안 구화를 가르쳤다. 이러한 의지와 헌신이 그를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어진 아내, 좋은 어머니’의 표상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1974년 한 여성단체로부터 이 점을 높이 평가받아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 “곤두박질하듯 살아왔다”, “남편의 말문을 연 사랑과 예술이 인간 승리의 기록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예술은 그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소중한 틈새이자 마음껏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
Art Review
2020 AUTUMN
몸으로 스며들어 만나는 음악
국악계의 재기발랄한 젊은 예술가들이 전통에 현대성을 접목한 개성 넘치는 음악 세계를 창조하며, K-pop과는 결이 다른 또다른 한류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에는 이들보다 먼저 세계 무대에 섰던 명인 명창들의 뛰어난 기량과 함께 훌륭한 기획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오래전 해외 공연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공연이 끝나고 소풍을 가기로 했다. 사막에서 누리는 봄날, “오늘만큼은 예술도, 무대도 깨끗이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던 터라 일행 모두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신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냉천.’ 발을 담근 순간 물의 온기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우리가 지금 아랍 지역에 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는 찰나, 저 건너에서 뚱땅거리는 소리가 냇물을 타고 흘러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아이 몇이 뭔가를 둘러메고 신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음악도 춤도 훌훌 털겠다던 우리는 어느새 하나둘씩 다가가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모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소년들의 북 리듬에 입장단 맞춰 가며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었다. 말이라고는 오직 딱 두 마디, ‘앗살라무 알라이쿰’과 ‘슈크란’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일환으로 2005년 10월 8일과 9일 이틀간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무대에서 당대 최고의 원로 춤꾼들이 한국 전통 춤의 진수를 펼쳐 보였다. 왼쪽부터 김수악(金壽岳 1926~2009) 선생의 진주교방굿거리춤, 김덕명(金德明 1924~2015) 선생의 양산학춤, 강선영(姜善泳 1925~2016) 선생의 태평무, 이매방(李梅芳 1927~2015) 선생의 승무 장면이다. ⓒ 뉴스뱅크
2014년 7월, 독일의 월드음악 축제 루돌슈타트 페스티벌(Rudolstadt Festival)에서 가야금 산조 김해숙(金海淑) 명인이 프란츠 리스트 바이마르 국립음대의 스트링쿼텟과 협연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축제의 헤드라이너로 선정되었다. ⓒ 전주세계소리축제
명인 명무 무대 전무후무(全舞珝舞 The Perfect and Precious Dances by Virtuosos) –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춤판을 이루며 당대를 주름잡던 평균 나이 80세의 명인 명무 여섯 분들을 2005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악사들이 돗자리를 깔고 무대에 길게 앉아 선생들의 몸에서 춤을 불러냈다. 현재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陳玉燮) 선생이 기획해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서 선보인 무대이다. 이 공연을 본 프랑스 몽펠리에 축제(Festival Montpellier Danse) 부감독 지젤 데푸치오(Gisèle Depuccio)는 그 자리에서 이분들을 초청하기로 결정했고,
이라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2006년은 마침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던 해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항공과 화물 운송을 책임지고, 축제 본부가 상당히 높은 공연료와 기타 초청 비용 전액을 부담해서 프랑스 몽펠리에와 샤토 발롱(Chateau Vallon) 2개 도시에서 공연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과 1년 새, 선생들의 시간은 너무 빨랐다. 그 공연 이후 장삼자락 휘휘 날리며 하늘로 난 길을 따라간 분들이 계셨기에 일부 출연자 교체로 평균 연령을 살짝 낮추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몽펠리에 광장에 있는 오페라 코메디(Opéra Comédie)에서 드디어 공연이 끝났을 때 극장 앞은 집에 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선 프랑스인들로 북새통이 되었다. 피곤하지만 어쩌겠나. 사람들이 모였으니 잔치를 할 수밖에. 보조 악사로 공연에 참여했던 노름마치(noreum machi)가 한바탕 마당놀이를 펼쳤다. 이 잔치가 얼마나 즐거웠으면 현지 지방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나무에 물 주다 뛰쳐나와 벼 베어 낸 논에서 너울너울 춤추고 다시 비닐하우스로 돌아가는 농부 춤꾼 이윤석(李潤石) 선생을 르몽드가 인터뷰로 집중 조명했다. AFP는 남성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김덕명(金德明) 선생의 학춤을 사진으로 전송하느라 바빴다. 극장 스태프 중 한 명은 장금도(張今道) 선생의 살풀이춤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혼이 위로받았을 것 같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오코라 라디오 프랑스가 2012년 제작한 김해숙 명인의
음반. 세계적인 음반사 아르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를 통해 60여 개 국가에서 동시에 출시됐으며 산조를 월드 뮤직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코라 라디오 프랑스가 2014년 출시한 경기민요 이춘희 명창의 아리랑과 민요 앨범
.
2011년 4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관으로 덕수궁에서 열린
공연에서 이춘희 명창이 열창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7년 4월, 체코 프라하의 이벤트홀 아크로폴리스궁(Palác Akropolis)에서 잠비나이가 연주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해금의 김보미, 기타의 이일우, 거문고의 심은용. 뒷줄은 베이스를 맡고 있는 유병구의 모습이다. ⓒSong Jun-ho
안은미컴퍼니가 2018년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한
의 한 장면이다. 남북한 전통 춤의 동작, 의상, 음악 등을 분석하여 공통분모를 찾아낸 작품으로 2019년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의 시즌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으며, 2020년 2월 벨기에 리에주 국립극장이 주최한
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소개되었다. ⓒ Gadja Productions
국제적 신뢰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에 들어가면 숨어 있는 한국 음악 귀 명인들이 지금도 찾는 명반이 있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오코라 라디오 프랑스(OCORA Radio France)가 2012년 제작해 세상에 내놓은
(Corée: Gayageum Sanjo - Ecole Choi Ok-Sam)는 가야금 산조 명인 김해숙(金海淑), 거문고 명인 이재화(李在和), 아쟁 명인 김영길(金泳吉)의 연주를 담았다. 이 음반은 영국, 독일 음악 비평가들이 주는 상도 받았으니 이들이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같은 해 경기민요 명창 이춘희(李春羲)는 ‘아리랑’이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축가를 불렀고, 국내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저 동경만 하는 상상축제(Festival de l'Imaginaire)가 선생을 2014년 개막 공연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피나는 노력으로도 오르기 힘든 정수에 도착하면 숨소리 하나도 예술이 되는 것일까? 연주깨나 한다는 후배들이 아직 가 보지 못한 세계 최정상 무대는 명인 명창에게는 참 쉽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예술가의 빼어난 실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루돌슈타트 페스티벌(Rudolstadt-Festival), 세계문화의 집(Maison de la Culture du Monde)까지도 열어젖힌 기획자는 “어르신들이 평생 닦은 내공을 제대로 존중받으시도록 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말하며 칭찬을 마다한다. 라디오 프랑스의 유일한 한국 프로듀서인 김선국 저스트뮤직(Just Music & Publishing) 대표가 쌓은 국제적 신뢰가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도 한국 음악은 새로운 뮤지션의 등장에 환호하고, 이들을 알아본 발 빠른 월드 뮤직계의 눈 밝은 에이전트들은 언제 하늘 길이 열릴지 손꼽아 기다린다.
세계가 사랑한 한국 음악 매년 수많은 음악 전문 행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불과 몇 개월 전까지는 해외 공연이 예정된 단체들의 운송 지원 수요를 다 감당해 내지 못해 걱정이었다. 이렇게 예술 유통에서 해외 무대 비중이 높아지고, 많은 한국 이름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데에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젊은 음악인들의 공이 매우 크다. 국악에 헤비메탈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록을 접목해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주도하는 밴드”라는 평가를 받으며 월드 뮤직계를 충격에 빠뜨린 잠비나이(Jambinai)는 국내에서 만나기보다 해외에서 마주치기가 더 쉬울 정도다. 다양한 유통 시장의 전략적 활용, 유명 레이블과의 계약 등 그들이 걸어온 길은 후배 음악인들이나 국내 공연 예술계가 국제 교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했다. 잠비나이의 성공에 힘입어 지금은 적잖은 연주자들이 전문가와 손잡고 체계적으로 해외 무대에 접근하고 있다. 해외 무대 진출에 가장 적극적이고 용이한 분야는 퓨전 국악을 중심으로 하는 월드 뮤직 장르지만 세계 무대가 첫손에 꼽으며 반기는 예술가는 단연 안은미(Ahn Eun-me 安恩美)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 무용을 배우고 뉴욕 유학 시절에 현대무용가로 변신해 데뷔한 안은미의 무대는 화려한 색의 나열, 강렬하고 속도감 있는 움직임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작품은 하나하나 사연을 담고 있으며, 관객과 현장에서 어울리며 소통하는 그녀는 항상 “우리 지금 함께 행복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난 가슴이 따뜻하고 기쁘다”는 프랑스 기획자 장-마리 샤보(Jean-Marie Chabot)가 유독 안은미에 집중해 국제적 공연 예술가로 부각시키려 애쓰는 이유는 바로 예술가로서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한편 명창 이춘희의 제자였고, 파격의 선두 주자 안은미의 무대와 철학을 민요에 입혀 ‘조선의 아이돌’이라 불리게 된 이희문(Lee Hee-moon 李熙文)은 ‘보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우리 함께 놀아버리자”고 관객들에게 외치는 그는 소리꾼이지만 안은미가 무대에 펼쳐 놓는 화려한 강렬함을 온몸으로 입어 버리는 배우이기도 하다.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 드레스를 걸친 것도 모자라 분홍, 노랑, 파랑 가발을 뒤집어쓰고 능청스럽게 관객과 주거니 받거니 진짜 놀아 버린다. 그가 리드 보컬로 있었던 그룹 씽씽은 뉴욕에서 열린 ‘2017 글로벌페스트(globalFEST)’에 아시아 음악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아 화제의 중심에 섰다. ‘민요계의 레이디 가가’로 소개될 만큼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여 뉴욕타임즈로부터 “올해 글로벌페스트 최고의 수확은 씽씽(이희문)”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2019년에는 아델, 존 레전드 등이 출연했던 미국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출연해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가 120만 건을 넘기도 했다.
소리꾼 이희문(가운데)이 민요 듀오 놈놈(좌우), 밴드 허송세월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오방神과(OBANGSINGWA)’를 결성했다. 이희문과 놈놈의 신승태(맨 왼쪽)는 그룹 씽씽의 일원으로 2019년 미국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해 큰 화제를 낳았다. ⓒ Kwak Ki-gon
디지털 무대를 향해 오늘도 한국 음악은 새로운 뮤지션의 등장에 환호하고, 이들을 알아본 발 빠른 월드 뮤직계의 눈 밝은 에이전트들은 언제 하늘 길이 열릴지 손꼽아 기다린다. COVID-19로 하루아침에 바뀐 세상. 우리는 지금 나누고 싶은 좋은 음악, 보여 주고 싶은 매혹적인 춤을 어느 디지털 플랫폼에 실을지 고민 중이다. 우리에게는 넷플릭스와 견줄 만한 재원도 없고, 확장현실(XR)까지 소비하는 영상 세대를 홀릴 만한 기술력도 아직은 없다. 오프라인 무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렸으며, 여전히 박수를 그리워하고, 오늘도 땀 흘리며 마이크와 악기를 놓지 않는 예술가들에게 시간을 주자. 화면 속 그들이 실제 무대의 감동을 고스란히 지구촌 청중들에게 전하는 그날까지.
Art Review
2020 SUMMER
보이지 않는 것과의 접속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주최한
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돌아보는 뜻깊은 전시였다. 다만 2019년 11월 28일부터 2020년 5월 31일까지 진행된 전시 중 COVID-19 사태로 인해 상당 기간 관람이 정지되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한국의 비디오 아트는 서구와 동시대간대에 함께 발전해 왔으나,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일반 대중은 대부분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1932~2006)을 제외하고는 비디오 아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전시에는 비디오 아트의 태동기인 1970년대부터 시작해 이 장르가 본격적으로 무르익은 1990년대까지 한국 작가 60여 명의 작품 130여 점이 소개되었다. 관람객들에게는 국내에서 비디오 아트가 정착해 가는 전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로서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작가들의 초기 작업들을 볼 수 있어 흥미를 더해 주었다.
. 박현기(朴炫基). 1979. 돌 14개, TV 모니터 1대. 260 × 120 × 260 ㎝ (WDH).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백남준(白南準). 1974/2002. 부처 조각상, CRT TV, 폐쇄회로 카메라, 컬러, 무성. 가변 크기.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실험 미술 1970년대는 한국 현대 미술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여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군부 독재라는 엄혹한 정치적 상황이 역설적으로 예술의 전위 운동을 촉발시킨 점은 매우 아이러닉하다. 해프닝, 설치, 사진과 영상을 끌어들이는 일련의 실험적 작업이 왕성하던 때에 최초로 비디오 아트 작업이 몇몇 작가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시도되었다. 당시 미술인들은 비디오를 새롭고 독자적인 영상 미학의 표현 매체로 삼기보다는 대부분 전위 예술이나 개념 미술의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수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구림(Kim Ku-lim 金丘林), 이강소(Lee Kang-so 李康昭), 박현기(Park Hyun-ki 朴炫基) 등이었는데, 이 작가들은 비디오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시간성, 과정과 행위, 감각과 존재, 개념과 언어 등에 관련된 사유를 시각화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국내 실험 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초기 작품인
(1974/2001)는 책상을 걸레로 닦는 행위를 보여 주는데, 걸레질이 반복될수록 걸레가 점점 더 더러워지고 급기야 까맣게 되어 조각조각 흩어지는 과정이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국내에서 본격적 비디오 작업의 선구자로는 단연 박현기를 꼽을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1973년부터 비디오 작업에 들어섰다고 한다. 일명 ‘TV 돌탑’이라 불리는
연작은 실제의 돌과 돌을 촬영한 영상을 함께 배치시켜 자연과 기술, 실재와 환영, 원본과 재현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사람들이 돌을 주워 작은 탑을 쌓고 소망을 비는 행위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돌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염원을 투사하는 문화인류학적 사물이고, 그의 작업은 돌에 대한 한국인의 무속 신앙의 한 편린을 접하게 해준다.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 미술에 내재된 이미지의 주술성과 무속성이 첨단 테크놀로지 속에서 환생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예술적 전용
은 1984년 1월 1일 전 세계에 생방송된 백남준의 위성 TV 쇼를 영상으로 편집한 작품으로 비디오 아트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스스로 빛을 내는 브라운관이 그저 그림자에 불과한 사진이나 영화와는 다른 미학적 성질을 갖고 있음에 일찍이 주목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음악을 전공하고 실험적인 현대 음악가로서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60년대 초에 TV를 임의로 조작하여 상업 텔레비전 방송의 일방적인 정보 지배 구조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선보였다. 1965년 이후에는 새로 개발된 비디오를 처음으로 미술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매체 미술의 큰 흐름을 열었다.
텔레비전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발견한 백남준은 그 장치와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 원래 설계된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전용해 냈는데, 그의 이 같은 상상력을 “사물에 부여된 기능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다기능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해 온 한국인들의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으로 바꾸었듯이 이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주된 특징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백남준은 TV라는 고정된 미디어로 조형적 실험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고, 나아가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지만, 단일 주사선(走査線)으로 만들어진
(1974)는 명상적이고 제의적인 초기 작품의 특징을 예증하는 대표작이다. 긴 받침대 위로 모니터가 놓이고 그 앞쪽에는 청동 불상이 마주하고 있다. 모니터 뒤의 카메라가 부처를 정면으로 촬영하여 화면에 비추고, 부처는 화면 속 자신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이 설치 작품은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킨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석가가 명상을 통해 수행한 목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개념인 공(空)이었지만, 모니터상의 카메라 영상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육체를 반사하고 있다. 백남준의 예술적 공헌은 바로 동양 철학이나 한국 전통 사상을 서구 아방가르드 정신과 결합하여 현대 미술 언어로 조형화시켰다는 점이다.
. 오경화(Oh Kyung-wha 吳景和). 1990. TV 16대, 비디오 & 컴퓨터 그래픽, 컬러, 사운드, 27분 4초. 작가 소장.
비디오 조각 1980년대 후반 이후 비디오 조각이 새로운 형식으로 부상했다. 탈평면, 탈장르, 혼합 매체, 테크놀로지 등에 대한 관심 속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비디오 조각은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초반에는 여러 개의 텔레비전 모니터를 쌓거나 중첩시키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물리적 움직임과 영상 속 움직이는 이미지를 결합한 키네틱 비디오 조각이 나타났다. 그중 김해민(Kim Hae-min 金海敏), 육태진(Yook Tae-jin 陸泰鎭) 등의 작가는 관념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박현기, 백남준과 동일한 맥락에 자리하고 있다. 김해민은 미디어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가상과 실재, 과거와 현재, 현존과 부재의 절묘한 경계를 연출해 온 작가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1992/2002)는 망치가 화면을 내려칠 때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TV 모니터를 통해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육태진은 고가구 같은 오브제와 반복적인 행위를 담은 영상을 결합하여 비디오 조각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왔다.
(1995)는 두 개의 서랍이 모터에 의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서랍 속에 설치된 비디오 영상에는 등을 보이며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흡사 시시포스(Sisyphus)처럼 영원히 어딘가를 올라야만 하는 인간,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느끼게 한다.
한국 무속이 지닌 엑스터시와 초자연적 소통의 의미가 첨단 매체인 비디오와 접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 육태진(陸泰鎭). 1995. 모니터 2대, VCR, 고가구. 85 × 61 × 66 ㎝ (WDH). 대전시립미술관 소장.
샤머니즘적 예술 사실 작가라는 존재는 연금술사이다. 하찮은 재료를 매만지고 서로 접목시켜 새로운 존재로 환생시킨다. 그들은 물질의 영혼을 꼼꼼히 읽어낼 줄 아는 샤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돌이나 나무를 사람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물질에 혼을 불어넣어 생명이 깃든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에서 가능하다. 샤머니즘은 물활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물활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 존재를 살려내는 힘을 신(神)이라 한다.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은 죽음과 삶, 어둠과 빛으로 나뉘는 이원성의 분리와 경계를 지워버린다. 샤머니즘은 죽음의 세계와 소통하고 대화하고 왕래할 수 있게 한다. 예술 또한 샤머니즘처럼 죽음과 소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갈 수 없는 세계에 닿게 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 가시적인 것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무속이 지닌 엑스터시와 초자연적 소통의 의미가 첨단 매체인 비디오와 접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점은 한국 비디오 아트의 매력적인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실을 이번 전시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