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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AUTUMN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경청』
김혜진(金惠珍) 작, 장해니(張傑米) 번역, 200쪽, 18달러, 레스트리스 북스(2024)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김혜진의 『경청』은 진정 이 시대를 위한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수가 자신을 비난한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해수의 편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편지도 끝맺지 못한 채 남겨진다. 편지는 해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기만을 위한 시도’에 가깝다. 심리 상담사이자 토크쇼 패널로도 잘 알려진 해수는 어느 날 무심코 대본에 적힌 대로 한 배우에 대한 평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배우의 자살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네티즌들이 다른 여러 명과 함께 해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서, 그녀는 배우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해수는 자신이 언어의 힘을 잘 알고 있고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었지만, 아직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욕할까봐 두려워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혼자 지낸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에 사는 여학생 세이와 길고양이 순무를 만난다. 세이는 덩치가 크고 재빠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같은 피구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있고, 순무는 구조가 시급한 상황이다. 해수는 길거리에서 서서히 힘겹게 죽어가는 순무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따뜻한 공감을 통해 세이가 힘든 상황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해수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애초에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었던 목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경청』이라는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는 바로 ‘도덕적 범주(도덕적으로 배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구분)’이다. 길고양이를 잡기 위해 통 덫을 들고 돌아다니던 해수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면서,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의 구분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는 자신은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해수는 이것이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해수의 도덕적 범주 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인터넷과 SNS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연결성이 높아진 지금, 단편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연결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심각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라인상의 타인을 인간이나 도덕적 존재가 아닌, 공터에서 우는 길고양이처럼 굳이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는 얼굴 없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사한 두 단어 ‘cancel’과 ‘counsel’을 활용한 재치 있는 영어 제목은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다. 한국어 제목 『경청』에서 드러나듯이, 귀 기울여 듣는 것, 즉 나의 관점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경청』은 배려심 깊은 독자들에게 귀 기울일만한 많은 이야기를 던져준다.
『이별 후의 이별』
장석원(張錫原) 작, 데보라 김(金) 번역, 83쪽, 10,000원, 아시아 퍼블리셔스(2023)
언어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장석 원의 시(이번 시집에는 영문 번역된 20여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의 기원이 ‘혁명과 사랑’이며 그 기원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 두 주제는 이번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여기에서 혁명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석원은 언어의 혁명 없이는 어떤 혁명도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는 그러한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트랜스 휴머니즘의 미래까지 나아가며, 그는 갈등과 투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사이로 사랑의 빛이 비추지만,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의 사랑은 아니다. 작가가 노래하는 사랑은 고통과 그리움, 때로는 야만적이고 죽음과 연결되는, 날것의 사랑이다. 새로 출간된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세계관을 엿보고 독자 자신의 투영된 이미지를 관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MMCA 리서치랩
한국 현대 미술의 세계를 탐색하다 www.mmcaresearch.kr
MMCA(국립현대미술관) 리서치랩은 ‘한국 현대미술 연구에 관한 지식 및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다. 1945년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의 한국 미술에 대해 인명, 단체, 기관, 전시 등 미술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 그리고 한국 미술에 대한 학술적 에세이를 담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MMCA의 플랫폼답게, 리서치랩은 세련된 인터페이스 안에서 방문자들이 방대한 정보를 탐색할 수 있는 서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를 제공한다. 첫 화면에서는 월별 연표를 통해 다양한 미술 용어를 시대별로 정리해 두었으며, 상단의 메뉴에서는 미술 용어와 학술적 에세이 (모든 컨텐츠는 훌륭한 영문 번역이 함께 제공된다.)를 시대별, 주제별, 알파벳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페이지 가장 상단의 검색창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검색할 수도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에 관심 있는 사용자에게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랩이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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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UMMER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고래』
천명관(千明官) 작, 김지영(金知暎) 번역, 365쪽, 22달러, 아키펠라고 북스(2023)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천명관의 『고래』는 세대를 넘나들며 운명의 실타래에 얽힌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소설은 유난히 큰 체구로 태어난 금복의 딸인 소녀 춘희가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 후 몇 녀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춘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에 살았던, 자신에게 잔인했던 세상을 저주하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외모와 암내를 타고났지만, 남자들의 욕망에 희생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가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해안 마을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그녀는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후 평대로 이사한 그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횡재하게 되면서 벽돌 공장을 열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룬다. 그 꿈은 그녀가 해안 마을에서 처음 본 거대 생물인 고래 모양으로 영화관을 짓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예언의 얽힘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무대에서 그녀의 최후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래』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은 모두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도 종종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운명에 얽매여 있다. 운명은 이 소설의 서사 전반에 시계추처럼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에게 닥칠 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전조가 있다. 화자는 또한 사랑의 법칙, 반사의 법칙, 어리석음의 법칙, 이데올로기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심지어 자만의 법칙과 같은 다양한 ‘법칙’의 관점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연결된 이야기 세계, 즉 인간의 의도와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결과를 갖는 세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전조와 법칙의 사용은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준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붕괴한다. 분명히 사건의 순서와 사건의 진행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대한 이야기가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신비를 엿본 듯한 느낌을 들게 된다.
『날개 환상통』
김혜순(金惠順) 작, 최돈미(崔燉美) 번역, 208쪽, 18.95달러, 뉴디렉션즈북스(2023)
복화술사가 하늘을 향해 노래하다
김혜순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를 보며 우아하게 날아다니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하지만, 이 시에서는 새-시인(혹은 시인-새)은 하이힐을 신고 땅 위를 걷고,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부끄러워하고, 새장 같은 옷을 입는다. 새들은 종종 새장에 갇혀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비극을 경험하고 큰 슬픔에 빠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적절해 보인다. 영문판에 추가된 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복화술의 기법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남성 시인들이 여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복화술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배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영감이나 홀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나 적절해 보인다. 시인은 우리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홀린 무당처럼, 하늘의 숨결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고양시킨다.
< The Gleam >
빛의 은유
박지하(朴智夏)의 < The Gleam >(2022)은 제목 그대로 어슴푸레한 빛의 잔상을 쫓는다. 상태이자 순간이고, 이미지이자 감정인 빛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이 음반에 담겨있다.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인 피리(觱篥), 생황(笙簧), 양금(洋琴)이다. 악기의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이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다. 악기 본연의 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산란하는 빛으로, 긴 잔향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음을 길게 지속할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진동과 호흡,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섬광과도 같은 노이즈, 아스라이 멀어지는 잔향, 섣부르게 몸집을 키우지 않고 섬세하게 고안된 공간감은 깊은 고요, 내면의 침묵으로 우리를 이끈다. 박지하는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徐廷旼)과 함께 ‘숨(suːm)’이라는 듀오로 9년간 활동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문법에 보다 깊게 천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솔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영토로 선회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 The Gleam >도 넓게 보면 < Communion >(2016), < Philos >(2018)의 연장선에서 음악적 재료와 패턴을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그는 양금의 현을 활로 연주하거나 손톱으로 긁어 예리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연주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참신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다이내믹을 확장해 이질적인 감각을 조형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이 음반을 이해하는 데 또 한 가지 유효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물관인‘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음반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do)가 설계한 이 공간에서 진행됐던 2020 The Art Spot Series ‘Temporary Inertia’ 공연의 일부를 발전시켜 음반으로 엮었다. 공간의 음향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려해 개별 악기의 응축된 소리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흔적이 음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지하에게 공간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자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로 기능한다. 빛의 여러 형태와 잔상을 포착한 음악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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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PRING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나목』
김금숙 작, 자넷 홍 번역, 320쪽, 29.95달러, 드론 앤 쿼털리(2023)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크로스미디어의 각색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글이나 그림 작품, 즉 소설이나 만화가 영화나 TV 드라마로 각색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유명 작가인 고 박완서(1931-2011)의 데뷔 소설 『나목』을 각색한 김금숙 작가의 『나목』은 그래픽 소설이라는 시각적 매체를 통해 원작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박완서의 원작 소설 『나목』은 한국전쟁 동안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던 화가 박수근(1914-1965)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예술적 비전과 천재성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인정 받지 못했다. 박완서 작가의 분신인 경아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한국인과 주둔한 외국군 사이의 문화 충돌과 한국전쟁 동안 사회적 가치가 변화하는 신생국의 특징을 다루기도 한다. 그 격변의 시대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비판함으로써 호평을 받은 소설은 여성 작가에게 수여하는 여성동아 문학상을 받았다.
김금숙의 그래픽 소설은 이 유명한 작품의 역사에 또 다른 장을 추가한다. 그녀는 원작에 충실히 하고자 했지만, 점차 그녀만의 색을 넣어 새로운 서사를 끌어냈다. 핵심 서사는 동일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박완서와 그녀 남편의 분신으로 재탄생한 인물이 도입되면서 원작의 이야기에 맥락을 더한다. 김금숙은 박수근의 여러 작품을 모작하여 핵심 서사와 맥락 부분에 집어넣었다. 이는 이야기에 더 많은 층과 깊이를 더하면서 실제 인물들의 삶과 이들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인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독자 각각의 마음속에 이미지가 생성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예술가의 독특한 비전을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다. 작가는 악몽 같고, 정신 없고,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울 수도 있는 한국전쟁 기간의 서울을 흑백 드로잉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그래픽 표현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매체를 최대한 활용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만화 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하는 “출혈을 일으키고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을 표현할 때 보통의 칸보다 확장된 칸을 활용한다. 확장된 칸은 때때로 시간의 확장을 암시하면서 서사에서의 전환을 예고한다. 또 다른 경우로는 한국전쟁의 외부적 혼란 혹은 인물들의 내적 혼란을 묘사한다. 작가는 그래픽 소설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기본 적인 칸에서도 그것들을 기발하게 활용한다. 경아가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릴 때 그녀 가족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칸의 경계를 뚫고 나온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시각적 표현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인물들이 장면의 일부인 것처럼 칸 가장자리에 팔이나 손을 얹고 있다. 박수근의 작품 전시회를 묘사하는 장에서는 작품 자체만을 위해 칸이 이용되고 인물들은 그림 주변에서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활보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 받은 소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재창조하는 작가의 기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직접 탐험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남겨둔다. 박완서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든 처음으로 접하게 되든 이 그래픽 소설은 작품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창이다.
『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
최지인 작, 스텔라 김 번역, 142쪽, 10,000원, 아시아 출판사(2023)
한 시인의 쟁투
최지인의 새 시집은 ‘사건들’이 벌어진 세상의 장소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제주, 오키나와, 타이베이, 마닐라, 싱가포르,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아이티, 홋카이도’.(‘커브’). 이 시집의 모든 라인에는 전쟁과 갈등이 엮여 기억과 역사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커브’)라고 고백하면서 이를 통해 의미를 찾지만, 자신의 탐구가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신세계’). “세상의 죄를 짊어진 지구의 고양(羔羊)이여”(‘성장의 끝’)와 같은 성경 주제에 대한 눈에 띄는 언급은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공자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지혜를 뒤집는다. “감히 삶에 대하여 / 묻습니다 / 죽음을 모르는데 / 어찌 삶을 알겠습니까”(‘파종’).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여전히 사랑을 선택한다. 어떤 희망을 품든지 간에 아마도 그 희망은 이 선택과 우리가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 모른다. 최지인 시인이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기억들이다.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www.liveinkorea.kr
한 지붕 아래의 세상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웹사이트는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13개의 언어로 제공한다. 영어와 러시아어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언어들이다.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누리’는 ‘많은’ 혹은 ‘다수의’라는 한자어 ‘다(多)’와 ‘세계’를 의미하는 순수 한국어 ‘누리’의 조합이다. 이 사이트는 다문화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디자인되었고, 주 대상자는 한국에 사는 여성 결혼이민자이다. 하지만 다른 이민자들도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정보는 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두 개의 파일, ‘결혼 이민자를 위한 웰컴북’과 ‘한국생활 가이드북’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한국에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주요 정보를 요약한 짧은 이중 언어 책자이다. 후자는 각각의 언어 한 가지로 되어 있고 이민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책자이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다문화가족과 결혼이주민들을 위한 것이지만 내용의 많은 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이 사이트는 가끔 검색이 힘들기는 하지만 신중하게 준비되고 선별된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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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WINTER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
『다른 사람』
강화길(姜禾吉) 작, 클레어 리차드(Clare Richards) 번역, 304쪽, 14.99파운드, 푸쉬킨 프레스(2023)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물론 어떤 주인공들은 문제가 있고, 또 다른 주인공들은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만약 세상을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 이야기의 조연에 불과하며 때로는 악당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강화길 작가의 강렬한 첫 장편소설인 『다른 사람』에서 작가는 이 같은 생각을 탐구한다. 작가는 유동적 관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추측이나 가정을 매 단계에서 재검토하도록 유도한다.
소설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젊은 여성인 김진아는 직장 내 팀장인 남자친구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직장에서의 사내 연애가 알려질까 두려워 처음에는 침묵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폭력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법적 제도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인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남자 친구는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한 삼백만 원의 벌금형만 받았을 뿐, 가택 연금이나 접근 금지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좌절한 진아는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이제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진아의 이야기만 보면 독자는 쉽게 진아의 편에 설 것이다. 특히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면서도, 문제가 있는 여성들은 얼굴이 좀 별로라는 코믹스러운 성차별적 언사로 그녀를 나무라는 본부장을 보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독자는 진아의 이야기 속 다른 인물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를 통해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고 복잡하게 얽힌 퍼즐에서 빠진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진아의 믿음과 주장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성 인물들의 자기 회의와 자책, 남성 인물들의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등의 대조가 그중 하나이다. 대학교 강사가 된 진아의 옛 남자친구 동희가 학교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끔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신고한 여학생과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그를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여교수 등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그를 동정하게 된다. 물론 그는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동시에 진아의 단짝이었던 수진이가 악의로 가득 차 진아를 증오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흑백처럼 선명하지 않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수많은 회색 지대가 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누구도 완전히 옳고 그를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미묘하고 절묘하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그로 인해 더 큰 효과를 갖게 된다. 이 소설은 독자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끌 것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시작하든 독자는 결국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면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북촌』
신달자(慎達子) 작, 조영실(趙永實) 번역, 106쪽, 18.95달러, 호마 앤 세키 북스(2023)
유명한 동네 산책하기
북촌에 위치한 계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한 신달자 시인은 새로운 환경으로 인한 신선한 경험과 감각이 익숙함으로 무뎌지기 전 시집을 한 권 쓰기로 결심했다. 말 그대로 ‘북쪽의 마을’인 북촌은 독특한 곳이다. 콘크리트와 유리로 이루어진 대도시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북촌은 전통가옥인 한옥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전통과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현지인과 여행객 모두가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시인의 시들은 북촌의 내면을 그린다. 동네의 유명한 랜드마크를 소재로 하는 시들은 호기심 많은 방문객의 가이드가 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시는 한옥 주거지와의 강한 연결을 보여준다. 한옥에서는 현대식 건물에서 보기 힘든 자연환경은 물론 동네의 역사와 문화와의 긴밀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시인은 삶의 현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질병과 외로움, 그리고 노년에 관해 쓴다. 독자는 시집을 통해 북촌을 관광하는 것 이상으로 흥미로운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 고전 영화’
www.youtube.com/@KoreanFilm
한국 영화 애호가들을 위한 보물 창고
한국 영화의 블록버스터 시대는 1997년 < 타이타닉(Titanic) > (1997)이 세운 국내 흥행 기록을 경신한 1999년 액션 스릴러 < 쉬리 > 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거의 매년 새로운 블록버스터 영화가 나타나 왕좌를 차지했다. 곧 세계가 주목하게 되었고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영화 < 기생충(Parasite) > (2019)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제 한국 영화를 알지 못하면 스스로를 영화광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20세기 말에 와서야 스크린을 점령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한국 영화는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초보 영화 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튜브 채널 ‘한국 고전 영화’에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화들이 제공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자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이 유튜브 채널에는 1910~1945년 일제 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영화들이 추가되고 있다. 더 좋은 점은 모든 영화에 영어 자막이 옵션으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이 채널의 오랜 구독자이자 팬으로서 ‘한국 고전 영화’ 유튜브 채널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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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UTUMN
앎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Hwang Yeo-jung 黃汝貞) 저,정예원(Jung Ye-won 鄭叡媛) 번역, 165쪽, 13.99파운드, 혼포드 스타: 스톡포트 (2023)
앎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1882년, 병든 칼 마르크스는 지중해 기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알제리로 간다. 불행하게도 그가 바랐던 것보다 날씨는 그의 건강에 좋지 않았고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알제리에 머무는 동안 마르크스는 희곡 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찾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유일한 극 작품인 『알제리의 유령들』을 썼다.
마르크스는 얼마 있지 않아 런던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백 년이 더 지나 박선우가 파리의 헌책방에서 그 희곡을 발견하고 여전히 냉전 이데올로기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으로 가져온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당국의 법에 저촉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알제리의 유령들』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던 마르크스의 희곡이기도 하지만 전설적 극작가 탁오수가 은퇴를 선언하고 제주도에 ‘알제리’라는 바를 열기 전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황여정 작가가 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겹치는 여러 층위는 소설 자체의 은유로 작용한다. 소설은 섬세하게 제작된 퍼즐 상자처럼 첫눈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며, 독자들이 박스 안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박스를 찔러보며 이 다층적 서사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도록 만든다.
소설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서술한다. ‘율의 이야기’는 희곡의 그늘 아래서 성장한 젊은 여성이 부모와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을 따라간다. ‘철수의 이야기’는 진실을 찾아가는 불안정한 한 청년의 여정을 기술한다. ‘오수의 이야기’는 서사의 흩어진 조각들을 가능한 해석으로 통합한다. 마지막 부분은 율에게로 되돌아가지만, 이야기는 또 다른 전환을 겪는다. 이 다양한 관점들은 서로 보완되어 일어났던 일을 더 완전한 그림으로 그려내지만, 어떤 면에서는 맹인들이 코끼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우화와 같다. 모두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누구도 온전하게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수조차도 어떤 객관적인 사실보다 진실의 구도자인 철수의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이다.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해도, 그것을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 가끔은 실제로 당신이 직접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율은 희곡 자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서사의 많은 실타래를 다시 모으는 것은 그녀이다. 하지만 결과는 여러 갈래의 끝마디를 모아두었을 뿐 깔끔하게 정돈된 매듭은 아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황여정 작가의 재능이 이 소설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를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카드를 모두 펼치지 않고 독자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작가는 쉬운 답을 피해 간다. 모든 이야기에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만화경과 같다.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굴절된 빛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의 ‘진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설사 진실에 근접한 것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알제리의 유령들』은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격언을 재확인시킨다. 이 여정이 독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들 것이다.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
정우신(鄭佑信) 저, 수잔 케이(Susan K 金秀辰) 번역, 71쪽, 9,500원, 아시아 출판사: 파주(2022)
기억의 값
정우신 시인의 새 시집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는 상실과 애도, 그리고 이후 찾아오는 공허의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것은 한때 화려했던 도시의 폐허 속을 걷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서 도시는 시인이 많은 시에서 말을 거는 ‘너’라는 애인과 함께 지은 세상이다. 애인은 더 이상 산 자와 함께 있지 않지만, 시인의 기억 속에 새겨진 모든 것에 남아 있다. 애인이 머물렀던 장소, 시인과 애인이 함께 걸었던 길, 그리고 애인이 밖을 무심히 바라보던 창가에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꽃들은 여전히 피고 진다. 미용실이 문을 닫고 부동산이 그 자리에 문을 연다. 그대로 머물기를 고집스럽게 거절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망각의 치유 대신 기억의 고통을 선택한다. 그 고통과 사랑하는 이를 추모하며 감동적인 시집을 만들었다. 이 산책길은 가치가 있고 기억할 만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Imagine Your Korea’
www.youtube.com/@imagineyourkorea
한국의 즐길 거리로 가득한 뷔페 상차림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이 유튜브 채널은 한국의 도시를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소개하는 영상으로 넘쳐난다. ‘한국의 리듬을 느껴라(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는 전국의 인기 있는 여행지를 소개하는데, 한국의 예술인들이 만든 음악에 맞춰 시청자를 에너지 넘치는 투어로 이끈다. 초기 영상들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기발한 춤사위로 강조된 이날치의 중독성 있는 퓨전 음악을 보여주는 반면, 가장 최근의 영상들은 케이팝 돌풍의 주인공 BTS와 만들었다. 이 외에도 한류 팬들을 위한 영상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한류 장소 투어와 한류 경험에 대한 소개가 있다. 조금 다른 성격의 영상으로 ‘묘하게 만족감을 주는 한국(Oddly Satisfying Korea)’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서는 눈과 귀로 즐길 수 있는 한국의 삶과 문화의 면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 축구 팬이라면 토트넘 홋스퍼팀의 공격수 손흥민과 함께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즐길 거리가 있으며, 대부분의 영상은 짧고 유혹적이어서 시청자들이 관심 영역을 빠르게 엿볼 수 있게 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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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UMMER
운명의 씨실과 날실로 엮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Kim Ju-hea 金宙慧) 저, 403쪽, 8.99파운드, 윈월드 출판사: 런던(2022)
운명의 씨실과 날실로 엮이다
김주혜의 첫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시기를 관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했던 엄마는 딸 옥희를 평양에 있는 기생집 은실에게 집안일을 거두며 품삯을 받는 식모로 팔았다. 이후 옥희는 은실의 사촌이자 기녀 단이가 있는 경성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기녀로 자란다. 한편, 시골 출신인 고아 남정호는 비밀스러운 가보 두 개만 몸에 지닌 채 돈을 벌기 위해 평양에서 경성으로 왔지만, 길거리 패거리와 어울리게 된다. 옥희와 정호는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삶이 아주 다른 궤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실은 세월이 흐르는 내내 계속해서 둘을 엮는다. 이 실들은 마치 태피스트리(다채로운 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의 생생한 가닥처럼 이야기 전체에 짜여 있다. 한국에서 실은 사람이나 사물들이 엮여 생기는 관계인 ‘인연’을 상징한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책 속의 인물들이 인연이라는 그물망 속에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배려는 인연이 운명론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따스한 위로의 빛, 즉 결국 모든 것이 옳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소설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신화든 정호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신화이든 작품 속에서 신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은실의 딸이자 옥희의 동료인 기녀 월향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자 단군 신화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신, 신화에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절박한 여성의 욕망에 대해서만 나오고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를 의아해한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화를 문제시하는 그녀의 의문은 신화가 갖는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조명한다. 한편, 정호는 호랑이를 발견했지만,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던 말에 사냥을 포기한 그의 아버지와 호랑이에 대한 신화가 어느 정도는 상상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중에 자신의 의심을 넘어서는 더 많은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장대한 역사적 서사와 많은 인물을 담은 소설은 감상주의로 빠질 수 있지만,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균형을 유지한다. 모든 인물은 진실하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소설의 악인 중 가장 경멸을 받을 만한 인물조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 역시 자신을 타인과 묶는 인연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 앞부분에 기억할 만한 장면이 있는데, 옥희가 기녀 은실의 집에 남아 기녀 견습생이 되고 나서이다. 옥희는 아마도 가장 뛰어난 노래꾼은 아니지만 - 그녀의 친구 연화만큼 재능이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 오리가 물을 좋아하듯 옥희는 시를 좋아한다. 그녀는 기녀가 되기 위해 아름다운 시 구절을 읽고 암송하던 훈련 중에 동료 견습생들이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고 무덤덤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시가라는 경이로운 세계에 입문하고 본능적으로 이에 영향을 받는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라고 작가는 썼다. 여기서 옥희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작은 땅의 야수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은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하기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단어를 독자가 내면에서 재배열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음악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거의 모든 기쁨』
이소연(Lee So-youn 李昭延) 저, 채선이(Sunnie Chae 蔡仙伊) 번역, 89쪽, 9,500원, 아시아 출판사: 파주(2022)
시인이 경험한 세상
스무 편의 시를 모은 이소연의 시집에서 우리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초대된다. 이 세계에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 그리고 모든 것에 깃든 생명의 잠재력과 연결되고픈 열망을 느끼게 한다. 이소연은 정원을 가꾸지는 않지만 여전히 씨앗을 믿는 시인으로, 씨앗처럼 땅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시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여성들이 차별받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은 그녀는 분노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과 희망으로 포용하기로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접근이다.
작가는 책의 뒤쪽 노트에 “작가들마다 힘겹게 자기 세계를 견디고 있다.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라고 적었다. 이소연의 세계는 모든 것,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는 세계이다. 그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시는 목적이 아니라 동력”일 뿐이다. 즉 시는 시인이 경험한 세상에서 생겨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이 시집은 새로운 독자에게 그녀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그녀의 세계가 확장됨에 따라 우리의 세계도 확장된다.
‘스튜디오 기와’
www.youtube.com/@STIDOPLOWAPFFOCIAL
기품 있는 한옥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가 적절하게 이름 붙인 ‘스튜디오 기와’는 국내외의 음악인들을 초대해 서울의 남산골 한옥 마을에 있는 민 씨 가옥과 같은 한옥에서 연주하도록 한다. ‘기와’는 한옥의 지붕을 장식하는 검은색 타일이고 이 지붕 아래에서 스튜디오 기와는 현대와 고전의 음악인들을 포함해 다양한 예술가들을 집합시킨다. 피아니스트가 공연장에서 연주하거나 인디밴드가 떠들썩한 관객 앞 안개가 자욱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신기하게도 한옥의 단순한 우아함이 둘 모두에게 완벽한 무대가 된다. 오래된 나무 바닥과 서까래의 온기일까, 아니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의 잔잔한 아름다움 때문일까? 무슨 이유에서든 스튜디오 기와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독특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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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PRING
현대를 위한 전통 시
『시조 - 한국의 대표적 시 형태(Sijo: Korea’s Poetry Form)』
루시 박, 엘리자베스 요르겐센 저, 284쪽, 16,000원, 박영사: 서울(2022)
현대를 위한 전통 시
이 책의 필자 11명 중 한 명인 마크 피터슨(Mark Petersen)이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이 짧은 시를 애호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예를 들어, 영어로 쓰는 리머릭(limerick)은 익살스럽고 종종 외설스러운 내용에 운을 맞춘 시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짧은 시 형태는 일본의 하이쿠(俳句)일 것이다. 5, 7, 5의 3구 17자의 짧은 음절로 이루진 일본 특유의 단시인 하이쿠는 주로 자연에 대한 명상을 주제로 한다. 리머릭이 엄격한 운율 규칙과 리듬적인 음보의 병치를 통해 전통적이고 음악적 느낌을 주는 반면, 하이쿠는 극도의 간결함으로 시적 아이디어를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다. 이같이 간결한 형태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암기(그리고 이를 통한 전달)가 쉬운 것도 한 가지 이유임은 확실하다.
한국에는 시조라는 고유의 짧은 시 형태가 있다. 리머릭이나 하이쿠처럼 서구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4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시조 역시 3행으로 이루어졌지만, 각 행이 일본의 하이쿠보다 훨씬 더 길고 행마다 구조도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한 제한이 있는 하이쿠보다 더 많은 표현이 가능하며,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의 학생들(필자를 포함)은 하이쿠를 배우고 썼다. 하이쿠처럼 학교 교육 과정에서 시조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책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시조 - 한국의 대표적 시 형태』는 시카고에 거점을 둔 세종문화회가 오랜 기간 공을 들인 결과물이다. 이 책은 교육자를 대상으로 발간했지만, 시조에 대해 알고 싶거나 시조를 직접 써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책의 1부는 시조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는 학자들의 글을 모았다. 데이비드 맥캔(David McCann)은 14세기부터 현재까지 시조의 역사와 발전을 추적하고, 마크 피터슨(Mark Petersen)은 시조를 중국의 절구(绝句)와 일본의 하이쿠 같은 동아시아의 다른 짧은 시 형태와 비교한다. 루시 박은 현재 한국과 북미에서 쓰인 시조와 독일어, 타갈로그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스왈리어로 쓰인 소수의 시조를 소개한다. 또한 그녀는 시조와 음악의 관계(시조는 원래 시가 아니라 노래로 구상되었다)를 짚어보고 시조 가사를 현대 뮤지컬에 도입하려는 당대의 시도를 다룬다. 김성곤은 시 번역의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영어로 직접 쓴 시조에 대해 큰 기대를 건다. 마지막으로 작가 린다 수 박은 시조가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든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 책의 2부는 시조를 가르치기 위한 다양한 지도 계획을 담고 있어 교육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여기에 공동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요르겐센이 그녀의 학생들과 함께 한 시조 쓰기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사례 연구는 특히 관심을 끈다. 서관호(徐官浩)의 아이들을 위한 시조 지도법은 시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상세한 로드맵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세종문화회에서 매년 주최하는 시조 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참가자들의 시조를 모아두었다. 각각의 시에는 작가의 말과 시 애호가의 해설이 붙어 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글에서 “사람들이 시적 미묘함과 섬세함을 멋지게 표현했던 시조로 서로 소통했던 시절이 그립다”라고 아쉬워한다. 이 책은 종종 산만하고 각박한 현대 사회를 시로 삶을 표현하고 풍류를 즐겼던 이전과 같은 시절로 되돌리기 위한 한걸음이다.
『 빙글빙글 우주군(Launch Something) 』
배명훈 저, 스텔라 김 번역, 363쪽, 11.99파운드, 혼포드 스타 출판사: 스톡포트(2022)
인류 최후의 개척지를 지키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양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래된 아케이드 게임의 캐릭터 팩맨을 닮은 두 번째 태양이 나타난다면? 이것이 한국 우주군이 맞닥뜨린 긴급한 문제이다.
국제 연합우주군의 일부인 한국군의 임무는 다른 모든 위성들을 잠재적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쓰레기장을 만들면서 지구 궤도에 있는 어떤 위성도 격추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임무를 맡은 단원들은 다채로운 캐릭터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는 우주군에 남기 위해 민간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에이스 조종사 한섬민도 있다. 정보 장교 엄종현은 위성 궤도를 분석하는 자기만의 기술을 갖고 있다. 날씨 전문가인 서가을은 호의적인 바람을 기원하는 현대판 샤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새로 영입된 이자운은 케이팝 스타로 색다른 스타를 꿈꾼다. 연락 담당관 김은경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똑똑한 사람들과 멍청한 시스템. 하지만 이들은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그 멍청한 시스템을 정비해보려는 사람들”이다.
화성-지구 왕복선에서의 암살 음모가 밝혀지고 화성 식민지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으로 알려진 화성 총독이 갑자기 지구로 돌아오기로 결정되면서 단원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뒤바뀐다. 좌절된 암살의 진짜 타깃은 누구였나? 이전 총독은 멀리 떨어진 연구센터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가? 그리고 우주군 참모총장 구예민과 그녀의 팀은 제때에 대응을 할 수 있을까?
‘K-friends’
kfriends.visitkorea.or.kr
모두 함께 모이자!
K-friends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커뮤니티로 모든 한류 팬을 연결해준다. 케이팝, 드라마, 영화, 음식, 여행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팬 모두를 아우른다. 회원 가입은 쉽다. K-friends 페이스북 그룹의 멤버가 되면 된다. 멤버가 되면 여러 이벤트에 참여해 ‘친구’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이 포인트는 나중에 한국 관련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모이자 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면 K-friends 홈페이지를 방문해 어떤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또 회원들이 작성한 한국에서 혹은 자신의 나라에서 경험한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 인기 있는 포스팅을 읽어봐도 좋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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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WINTER
도시에서 피어나는 연약한 꽃 한 송이
『바이올렛(VIOLETS 紫羅蘭)』
신경숙(Shin Kyung-Sook 申京淑) 작, 안톤 허(Anton Hur) 번역, 212쪽, 15.95달러, 더 페미니스트 프레스: 뉴욕(2022)
도시에서 피어나는 연약한 꽃 한 송이
오산이는 시골 마을에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이 씨 집성촌 사이에서 외부인이었던 산이는 마을 내에 또 다른 아웃사이더인 서남애와 친해진다. 어느 날 개천에서 놀다 야생 미나리 군락지에서 젖을 옷을 말리는 동안 산이는 남애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날 이후 남애는 산이를 멀리하며 당시 있었던 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산이는 그날 이후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깨어난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버려지고,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버리는 엄마 때문에 산이는 배신과 고독에 익숙해진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간다.
작가가 되길 원했던 산이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과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출판사에 입사 지원한다. 하지만 일을 구하지 못하고, 그녀는 꽃집 아르바이트 구인 문구를 보게 된다. 꽃집 주인은 청각 장애가 있어 글로만 소통할 수 있다. 산이는 주인이 종이에 적은 질문에 답하며 면접을 본 후 꽃집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업하게 된다. 꽃들 속에서 위로와 치유를 받으며 꽃집은 그녀에게 은신처가 되어준다. 실제로 그녀는 가슴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겨난 모든 사랑을 꽃에 줬다. 때론 그 사랑이 너무 과했던 탓에 물을 너무 많이 줘 꽃이 썩어버리기도 했지만.
초록 식물과 다채로운 꽃들 속에서도 모든 것이 낙원 같지는 않다. 그녀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긴 하지만 ‘마음속 잉크’가 말라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리 펜을 들고 종이에 글을 써보려고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말을 쓸 수 없다. 게다가 꽃집 안에서 바깥세상을 영원히 피할 수도 없다. 그녀에게 뻔뻔하게 추파를 던지는 오만하고 건방진 최현리가 산이의 은신처에 등장하고, 사진작가인 한 남자는 의뢰를 받은 바이올렛을 찍기 위해 꽃집에 왔지만, 꽃보다 산이의 모습을 찍는 데에 더 관심이 있다. 사진작가의 등장은 앞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폭풍을 알린다. 과연 그녀가 그 폭풍을 견디고 살아남을지가 문제다.
『바이올렛』은 사실 2001년에 쓰여졌다. 작가가 설명하듯이 ‘제도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여성의 지위나 여성의 언어들이 가차 없이 차별받던 때’였다. 책 출간 후 20년 동안 한국의 서울은 많이 변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 나오는 세종문화회관 뒤 뽐모도로 식당처럼 어떤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변한 것처럼 많은 것들은 상당히 변화했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이야기나, 미투는 종종 불편한 것으로 여겨져 누군가에게 반격을 유발하는 등 어떤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의 이야기를 여전히 독자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작가가 전하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날까지 이 책은 계속 남아 있을 게 분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Yi Won 李源) 작, 고은지(E.J. Koh)/마르시 칼라브레타 칸시오 벨로(Marci Calabretta Cancio-Bello) 번역, 128쪽, 16달러, Zephyr Press: Brookline(2021)
인간성을 비추는 거울을 응시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는 아방가르드 시인 이원의 세계로 통하는 창을 열어준다. 한국어 원문과 함께 영문 번역이 함께 실려 마치 창처럼 투명하며 하나의 언어로 실렸을 때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한국어에 익숙한 독자들은 영어로 표현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 시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인간의 시간 경험과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 같은 보편적이면서도 시대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독자는 상징들이 명료함과 불명료함 사이를 오가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봄을 알리는 첫 신호인 나비나 사막의 여행자인 낙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우주를 잇는 네트워크가 되는 도로나 좌우를 뒤집는 것이 아닌 먹는 자를 먹히는 자로 바꾸는 거울이 있다. 날카로운 칼날 쉼표를 사용해 문장을 수천 개의 조각으로 자르는 산문 시 「시간과 비닐 봉지」나 「철, 컥, 철, 컥」처럼 이원의 시는 해석이 쉽지 않다. 이 시들은 단순히 종이 위의 단어가 아니라 살아있고 숨 쉬며, 맥박 같은 리듬으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음악과 이미지에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7707
https://www.youtube.com/channel/UCZigS1LHB6SBOlscLpSUZQg/featured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새로운 공공외교 유튜브 채널인 7707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다채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소개한다. 현재 채널에는 세 가지 시리즈가 있는데 더 많은 것이 추가될 예정이다. ‘K-디자인’은 현재까지 세 개의 짧은 영상이 업로드되어 있는데, 해당 콘텐츠는 디자인이 한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 어떻게 뿌리 내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파인 다이닝의 선구자들에 의해 예술로 승화된 한국 식문화, 현대적인 감각과 소재의 장점을 살린 전통적 소반, 옷과 병풍에 사용되는 전통 자수의 세심한 기술 등이 그것이다. ‘Shake Your Taste’ 편에서는 술 소믈리에인 더스틴 웨사(Dustin Wessa) 씨가 계절과 상황에 맞는 술과 곁들이면 좋은 음식을 소개한다. ‘Wrap Around the World’ 편에서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한다. 이 영상 시리즈는 백남준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전 세계 인류에게 평화와 소통의 메시지를 보냈던 동명 작품인 ‘세계와 손잡고’에 젊은 한국 예술가들의 공연을 섞어 넣은 것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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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UTUMN
비밀스런 자료에 담긴 변종 인간 이야기
『캐비닛(CABINET)』
김언수 작, 션 린 할버트 번역, 299쪽, 9.99 파운드/15.99 달러, 노팅햄: 앵그리 로봇 출판사 (2021)
비밀스런 자료에 담긴 변종 인간 이야기
도시 한복판의 한 연구소 4층에는 평범한 캐비닛이 놓여 있다. 캐비닛 13호다. 그 속에는 포스트휴먼 종으로 진화하는 특징을 보이는 ‘심토머’에 관한 375개의 자료가 있다. 어떤 이들은 휘발유, 유리, 철 같은 물질로 연명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서 이상한 것들이 자란다. 한 사람은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한 여자는 혀에서 도마뱀이 자란다. 또 ‘타임스키퍼’가 있는데 이들은 몇 날, 몇 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그리고 ‘토포러’는 놀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잠을 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좀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기억을 편집하고, 또 어떤 이들은 외롭게 우주로 라디오 메시지를 보내며 밤을 보낸다.
연구소 행정과 공덕근 대리는 어느 날 우연히 13호 캐비닛을 보게 된다. 무료함과 호기심으로 캐비닛 속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캐비닛을 관리하는 권 박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른다. 몰래 캐비닛을 열어본 것에 대해 벌을 주는 대신 권 박사는 자기 조수로 일하길 공 대리에게 요청한다. 권 박사는 심토머들이 현재의 인간 모습을 대체하는 진화한 인간 종이며 미래의 인류가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들이 괴물로 분류되지 않는 것뿐이다.
공 대리는 파일을 다루고 심토머들을 응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권 박사가 중병에 걸리고 공 대리가 모든 일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프로젝트 진행이 어렵게 된다. 유언집행주식회사라고만 알려진 한 그림자 조직이 공 대리에게 접근하는데 이들은 심토머를 괴물이 아니라 기회로 간주한다. 이 조직이 원하는 건 정확히 무엇일까? 권 박사는 그동안 무엇을 숨겨온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오면 공 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캐비닛』은 어떤 책이라고 정의하기 힘들다. 과학과 마술, 인본주의와 포스트휴머니즘 사이를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현대적인 도시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든다. 심토머들이 기이하게 보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년의 시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느 순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소셜미디어라는 광활한 공허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그곳에 정말 누군가가 있는지 혹은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한 챕터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들 모두 자신 역시 심토머가 아닌지 묻는다. 일화들을 읽다 보면 심토머와 비심토머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전체에 대한 일면일 뿐이다. 쉬운 대답에 유혹될까봐 공 대리는 이야기에 아무런 도덕이 담겨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건 교훈을 찾으려 하고 잠언을 얻으려 하지만 교훈과 잠언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각각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Invisible Land of Love)』
마종기 작, 조영실 번역, 112쪽, 16.95달러, 뉴저지: 호마 앤 시키 북스 (2022)
이주가 바꾼 모습
시인 마종기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시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1939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해방과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의학을 공부한 후 1966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했고 그곳에 거주하는 동안 그의 첫 책이 1980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시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중 타지에서 의사로 살았던 그의 삶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중국 철학자 장자를 기억하게 하는 시 「나비의 꿈」은 타지에서의 삶을 꿈으로 묘사한다. 다른 시들에서 그의 꿈을 채우는 건 가끔은 달콤하고 가끔은 씁쓸한 한국의 기억들이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방황하는 영혼의 동요를 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학박사 마종기의 의사로서의 경험 역시 시에 영향을 주었고 「퇴원」, 「증례 6」, 「제3강의실」과 같은 시들은 삶과 죽음의 얽힘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보여준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시인은 생명을 연장하고 가능하게 했지만, 그에게 가장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준 건 죽음으로 잃은 환자들이다. 의사인 그가 냉정하고 차갑기도 할 거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내면의 시인으로서 그는 세상에 대한 의미를 - 이성적으로가 아니라면 감정적으로 - 이해하려고 한다. 그의 시는 몇십 년을 거슬러 와서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동아시아연구원
http://eai.or.kr/new/en/main
지역 문제를 다루다
동아시아연구원은 지역이 맞닥뜨린 다양한 정치적 문제를 천착하는 한국의 중요한 정책연구소이다. 남북한 관계, 한일 관계, 그리고 미〮중 간의 전략적 경쟁이 지역의 다른 국가에 미칠 영향 등이 연구소가 다루는 이슈에 속한다. 지역의 전문가가 함께 모이는 세미나와 포럼, 주요 연구를 발표할 수 있는 저널(글로벌 NK 줌 & 커넥트와 같은 웹저널), 학술서 출간, 다른 국가들과의 협업 프로젝트, 공공정치 전문가의 새 세대 육성과 지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제공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해마다 활동 내용에 대한 자세한 보고가 제공되고 이 외에도 연구소는 소셜 미디어 활동도 한다. 유튜브(http://youtube.com/c/EAIkorea)에 온라인 세미나, 회의, 강의 등을 업로드하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에도 포스팅하고 있다.
찰스 라 슈어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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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UMMER
『저주 토끼(Cursed Bunny) 』
『저주 토끼(Cursed Bunny) 』
정보라 작, 안톤 허 번역, 256쪽, 10.99 파운드, 스톡포트: 혼포드 스타(2021)
귀신이 출몰하는 이야기 모음집
『저주 토끼』는 영어로 번역 출간된 정보라 작가의 첫 단편집이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 작품집에는 열 개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으며 호러, 판타지, 그리고 공상 과학 등 장르의 경계를 유쾌하게 넘나든다. 영문으로 번역된 책은 “머리”와 “몸하다”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이야기 배경이 매우 익숙한 세계처럼 보이지만 여자 주인공들이 자신의 몸에서 시작된 호러 경험에 대응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음이 드러난다. 인물들의 걱정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세상은 이들의 반응을 무관심과 경멸로 대한다.
“즐거운 나의 집”과 “재회”는 비슷하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배경으로 세상은 죽은 자들의 영혼으로 가득하다는 전제가 있다. 영혼들은 비극적인 과거를 상기시키고 주인공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차가운 손가락” 또한 유령 이야기이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어둠은 실제로 독자들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게 한다.
표제작 역시 만만치 않다. 탐욕과 복수의 이야기인 “저주 토끼”에서 무서운 저주를 가져오는 집착은 이에 넋을 잃은 모든 이들을 삼켜버린다. “덫”은 전래 동화의 틀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를 현재의 시간에서 멀어지도록 하는데, 덫에 걸린 동물이 자신을 살려준 대가로 사례를 하는 고전 이야기를 살짝 비튼다. 욕심 때문에 참새에게 상처를 입히는 잔인한 놀부나 탐욕스러운 구미호 같은 한국의 전통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단편집에서 가장 긴 작품인 “흉터” 역시 전설과 우화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독자에게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도록 초대하는 이 이야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인공이 왜 고통과 공포에 시달려왔는지를 알게 만든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신화적인 성격을 갖는데, 인물들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투한다. 이야기는 ‘고통을 겪는 처녀’라는 주제의 반전을 보여준다. 용감한 공주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싸움에 나서는 것이다. “안녕, 내 사랑”은 앞서 말한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사이언스 픽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포스트휴먼의 미래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천착하게 한다. 아시모프가 상기되는 부분들이 있고, 감정으로 격앙된 서사가 만들어내는 가슴 아픈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책에 실린 단편들의 장르와 주제가 다양하고 폭넓은 것 같지만 모든 단편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인간의 몸은 종종 부담되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속세의 번뇌를 담고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탐욕과 그에 따른 결과 역시 또 다른 공통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단순히 도덕적이지는 않다. 유령은 몇몇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자체가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차가운 손가락”은 예외다). 대신에 “저주 토끼”에서처럼 유령은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고, 이 연결점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 본질은 신체를 벗어난 후에도 남아 있다. 공포는 괴이하고 초자연적인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것, 즉 잘못된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 안에 내재한다. 정보라의 글은 이 자연적인 것에 거울을 갖다 대고 인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성의 가장 불안한 면모를 직면하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 전등을 끄고 나서도 소설을 통해 일견한 인간성의 면모가 어둠 속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차가운 사탕들(Cold Candies)』
이영주 작, 김재 번역, 86쪽, 16달러, 보스턴: 블랙 오션(2021)
삶의 조각들을 맞추다
『차가운 사탕들』은 이영주 시인이 20년간 쓴 작품들 중 선정된 시들로 처음 영어권에 소개됐다. 책에 실린 시는 서사와 서정의 경계에 걸쳐 있으면서 짧은 이야기나 이야기의 단편을 암시적인 언어로 요약한다. 책을 읽다 보면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인데, 쪼개진 생각과 기억, 그리고 감정이 빛이 통과하면 어슴푸레 빛나는 조각들이 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페인트를 가지고 그랬듯이 작가는 단어를 가지고 놀면서 답이 있는 해석에 대한 분명한 선 긋기를 거부한다. 단어들이 우리 머릿속을 흠뻑 적시면 그제야 이미지가 분명해진다. 하지만 역설적인 장면들에서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 주제가 있다. 죽음은 도처에 있고 자연스러운 결과인 부패와 함께한다. 그렇지만 부패의 달콤하고 퀴퀴한 냄새는 생명의 순환으로 이해된다.
액체들이 강처럼 시를 통과해 흐른다. 여러 형태를 띤 물, 눈물, 피, 오줌 같은 육체의 액체들. 몸은 그 자체가 고통의 원천이지만 무언가가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지이기도 하다. 한 소녀의 등에서 솟아나 초승달이 되는 뼈처럼, 또는 부패되어 신비롭고 서로 연결된 생명으로 꽃을 피우는 버섯들처럼. 시집의 끝에 다다르면 마지막 시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변용한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생각한 것의 결과이다. 『차가운 사탕들』은 실제로 ‘무엇 되기’로 갈 수 있는 많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공성계(World without Sound, 空聲界)』
임희윤(Lim Hee-yun 林熙潤)/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삐리뿌(BBIRIBBOO), EP 앨범, 멜론‧애플뮤직‧유튜브 등에서 무료 스트리밍, 서울: 카이오스(CAIOS) [2022]
소리를 비운 세계
앨범 제목 ‘공성계’는 소리를 비운 세계라는 뜻으로 국악 퓨전 그룹 삐리뿌가 만든 단어이다. 이들이 올해 초 낸 첫 번째 앨범은 가상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다. 네 개의 연주곡이 기승전결로 펼쳐지는 음악적 소설이다. 이 그룹은 권솔지(Kwon Sol-ji), 손새하(Son Sae-ha) 두 명의 피리 연주자와 베이시스트 겸 프로듀서인 히븐(Heven)으로 구성됐다. 여느 피리 연주자들처럼 이들도 곡에 따라 태평소나 생황을 연주한다.
첫 곡
는 앨범 전체의 백미이자 음악계에 삐리뿌의 등장을 알리는 출정가다. 조선 시대 군악대의 행진곡인
를 태평소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재해석했다. 시작은 다크 앰비언트(Dark Ambient) 장르를 연상케 하는 어둡고 축축한 전자음이 광막한 행성 간 공간을 먹붓처럼 까맣게 그려 낸다. 이어 로켓처럼 분출하는 두 대의 태평소 소리가 들린다. 긴박감 있는 하이햇과 베이스 비트가 채찍처럼 날뛴다. 태평소는 유니슨(unison)과 하모니를 오가며 UFO처럼 분화한다. 뒷부분에 등장하는 육성은 우주적 울림으로 변형돼 원곡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는 힐링 음악으로 재조명받는 앰비언트 음악의 자장 안에 있다. 장조의 영롱한 선율과 화성이 만들어 낸 고요한 심해의 물결 사이로 두 대의 피리 소리가 신비한 해파리처럼 유영한다.
는 조선 시대 궁중과 상류층에서 즐기던 모음곡
중 의 선율을 변주했다. 펑키한 베이스 라인과 비트가 어우러진 유일한 댄스곡이다. 전통 국악기 중 유일한 화성 악기인 생황이 중반에 등장해 음색의 매력을 뽐낸다. 마지막 곡 는 종묘제례악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대취타를 앞세워 호기롭게 출발한 긴 항해가 마침내 이상향의 평화로운 정경에 도달한다.
이 데뷔 앨범은 이들의 음악 여정에서 인상적인 서곡(序曲)이 될 것이다. 단, 앞으로 갈 길은 험난해 보인다. 이미 한국 전통 악기를 록과 헤비메탈에 접목한 잠비나이(Jambinai, 战必爱), 파리와 생황으로 우주적 사운드를 연주한 박지하(Park Ji-ha, 朴智夏), 종묘제례악과 가곡을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풀이한 얼리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 水母) 등의 뮤지션이 앞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대담하고 도전적인 시도가 필요한 이유다.
찰스 라 슈어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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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PRING
『레몬』
『레몬』
권여선 작, 자네트 홍 역, 147쪽, 20달러, 뉴욕: 아더 프레스(2021)
손에서 뗄 수 없는 추리 소설 그 이상의 소설
영어권에서의 데뷔작인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
은 조사실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곳에서 한만우는 아름다운 소녀인 반 친구 해언의 살해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은 해언의 여동생 다언의 머리속에서 시작한다. 다언은 2002년 경찰 조사실에서 일어났을 거라 믿는 일을 상상한다. 그녀는 만우가 좀 어둔한 걸 알고 있고 일관되지 못한 진술 때문에 경찰들이 그가 살인자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잣집 아이로 인기 많은 신정준이 또 다른 용의자였지만 알리바이가 인정되어 빠르게 혐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만우를 용의자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해서 “미모의 고등학생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케이스는 미궁에 빠졌다. 다언은 해결점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모든 디테일을 되살려 보느라 17년을 보냈다.
근데 이 짧은 시놉시스를 읽고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 소설은 범죄 소설이 아니다. 적어도 단순한 추리소설은 아니다. 누가 해언을 죽였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전체를 통해 탐색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은 다언이 첫 장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다. “과연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나.” 언니가 죽은 후 겪은 감정의 대혼란이 서서히 잦아들지만 다언은 여전히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다. 정신과 의사는 ‘생존자의 죄의식’이라 이름 붙일지도 모르지만 다언에게 죄의식은 좀 더 뿌리 깊다. 그녀가 언니를 사랑하기라도 했는지 의혹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엇보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건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상관없이 다시 되돌아 갈 수 없고 이미 결정된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책의 절반 부분이 다언의 시점에서 서술되지만 그녀의 시점이 유일한 건 아니다. 두 챕터씩 각각 해언의 반친구인 상희와 태림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상희는 해언과 가깝지 않았지만 다언과 친했기 때문에 독자에게 다언의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태림은 사건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녀는 해언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만우와 함께 있었고, 나중에 정준과 결혼한다. 독자는 여자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만 만우와 정준을 보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신비에 싸여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해언의 부재다. 이야기의 목적을 부여하는 희생자로서 해언은 주인공이긴 하지만 자신을 위해 발언하지 않으며 독자는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독자는 그녀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생각을 통해 그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해언은 이들이 자신의 꿈과 욕망,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는 하나의 암호이다.
작가는 유려한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조각들이 천천히, 하나씩 맞춰져 가는 동안 추리소설의 긴장을 유지시킨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되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상실과 비극과 슬픔을 다루는지가 진정한 미스터리임을 좀 더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시합이 한창이었던 여름 어느 날에 발생한 끔찍한 범죄를 잊지 않지만 매 챕터를 지나며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가 17년 후인 2019년에 끝날 때가 되면 우리는 미스터리의 어떤 ‘해결’도 생존자들에게는 아무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다언과 상희와 태림에게 이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그들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의 저편에서 해언과 재회할 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마지만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질문들은, 우리가 모두 찾아야 하는 해답들과 함께, 우리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호랑나비』
황규관 작, 전승희 역, 111쪽, 9500원, 파주: 도서출판 아시아(2021)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영혼을 위한 시
“어떻게 하면 시가 현실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라고 황규관은 그의 신작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단순히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 쓴다. 그는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으며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축복이 아니라 골칫거리라고 본다. 그의 시에서 자본주의는 특히 자연과 철저히 대조적이며 적대적이다. 예를 들어, “숲을 놓아주자”에서 시인은 숲에서 인간의 문명을 제거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숲을 “새로운 주인”, 우리 자신은 “아둔한 숲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위기에 처한 환경의 가장 다급한 이미지는 표제작의 첫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장마가 끝나지 않는다 바다는 끓고 / 빙하는 놀라 주저앉고 대륙은 탄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져 있기를 거부하며 대신 급진적 방법을 찾아 나아가고자 한다. 길에 대한 두 편의 시에서 하나는 프로스트의 유명하지만 종종 잘못 인용되는 시 제목을 따오고(“아직 가지 않은 길”), 또 하나는 “새로 가는 길”을 노래하면서(“동트는 쪽으로”) 이 여정에 대해 얘기한다. 황규관의 시들은 다층적이어서 비밀스러운 의미를 쉽게 노출하지 않지만 세심한 독자와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Seoul 4K Walker
(http://www.youtube.com/c/seoul4k)
완벽한 팬데믹 우울증 치료제
코로나 팬데믹이 이제 삼년 차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해외여행을 갈망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한국에 와 본적이 없지만 관심은 있을 것이다(이 잡지를 손에 들었다면 분명히!) 혹은 당신은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고 다시 또 오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어쩌면 이미 한국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이전처럼 전국을 마음대로 여행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유튜브 채널은 바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2020년에 시작된 이 유튜브는 당신의 팬데믹 우울증을 해소해 줄 완벽한 해독제다.
여기에 제공되는 대부분의 산보는 서울에서 이루어지는데 시청자는 혼잡한 대도시의 일상적 거리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만약 ‘강남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특별히 강남 편을 추천한다. 하지만 서울 바깥 모습을 찍은 비디오도 꽤 많다. 부산의 해운대, 여수 항구의 낭만적 밤거리, 전주의 전통 한옥 마을, 수원의 화성은 많은 하이라이트 중 몇 군데이다.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비디오는 4K 해상도로 만들었고 따라서 큰 스크린에서 보기에도 최적화되어 있다. 다채롭고 활기찬 서울과 한국의 곳곳을 체험해 보기 바란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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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WINTER
밤의 여행자들
“The Disaster Tourist”(원제: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작, 리지 뷸러(Lizzie Buehler) 역 186쪽, 8.99 파운드, 영국 Serpent's Tale 출판사, 2020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에코 스릴러
지난 일 년 반 동안 코로나 19가 가져온 팬데믹으로 꼼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뉴노멀로 돌아갔을 때 하게 될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가 열대 해안가나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라 최근에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거나 쓰나미로 덮쳐진 도시, 혹은 싱크홀에 빨려 들어간 곳이라면?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바로 이 상황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나는 재난여행 패키지 상품을 제공하는 여행사 ‘정글’에서 일한다.
도대체 누가 재난 지역을 여행하고 싶어 할까? 정글의 고객은 특별히 섬뜩함을 즐기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아니다. 한 대학생 고객처럼 초토화된 재난 지역을 돕는 ‘윤리적 관광’의 기회로 삼는 이들도 있고, 다섯 살 된 딸과 함께 여행하는 한 초등학교 교사처럼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또는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나가 알고 있는 것처럼 좀 더 내밀한 힘이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게 산산조각 난 장소에 있으면 재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실감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재확인한다. 자연 재난 피해자 추첨에서 뽑히지 않음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여행 직전 진해에 닥친 쓰나미를 경험한 여행자들에겐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들이 겪은 재난은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그 끔찍한 여파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살던 곳의 재난을 뒤로 하고 여행자들은 베트남 해안에서 떨어진 무이 섬 여행을 단행한다. 요나는 스스로 원해서 여행을 온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회사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사직서를 낸다. 하지만 놀랍게도 퇴사 대신 한 달 휴가를 받고 회사의 패키지투어에 동행하게 된다. 고객으로서가 아니라 패키지 상품을 지속할만한지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유나는 그렇게 다른 여행자들과 무이 섬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오래된 씽크홀과 그저 그런 화산, 그리고 부족 간에 일어난 대학살의 재연을 보게 된다. 그녀는 희생자 부족의 한 가정에 머문다.
요나가 예정대로 한국으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룹과 떨어지게 되고 베트남 시골 지역에 혼자 남겨진다. 또 한 번의 방심으로 그녀는 지갑과 여권을 소매치기 당한다. 평소 그토록 경멸하던 문제 많은 여행자가 된 것을 자책하며 그녀는 무이 섬을 다시 찾아 가고, 그 휴양지 섬에서 표면 아래 숨겨진 섬뜩한 현실을 마주한다.
소설은 긴장감과 반전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결합해 독자가 찜찜한 기분으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특히 휴가를 해외에서 보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진짜’를 경험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정교하게 꾸며진 외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입을 크게 벌린 싱크홀처럼 공동체 전체를 집어삼킬 듯 위협적인 산업에 온전히 의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야기는 여전히 심각성을 유지한 채 막판으로 치닫고 독자는 이야기를 겨우 따라갈 뿐이다.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소설과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강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Homo Maskus (원제: 호모 마스크스)
김수열 작, 브라더 앤소니 역 73쪽, 10달러, 서울, 아시아출판사, 2020
제주와 그 너머의 휴먼 프리즘
김수열 시인의 새 시를 모은 작은 시집이 영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이다. 이 사실은 처음엔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주는 늘 한국에서 특별한 곳으로 손꼽힌다. 한국의 일부이지만 주변에 위치해 있고 종종 가장자리로 밀려나기도 한다. 제주는 김수열 시인의 시 속에서 살아 있다. ‘조화’, ‘데칼코마니’, ‘달보다 먼 곳’과 같은 시들은 섬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
하지만 그의 시는 거시사를 넘어선다. 미시적 역사 렌즈를 통해 훨씬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1948년 제주 4.3 사건과 1980년 광주 항쟁 같은 비극적 사건을 조명한다. 시인의 세계는 또한 제주를 넘어 확장된다. ‘베를린의 아침’과 ‘코펜하겐의 하루’에 대해 쓰며 중국의 ‘고안촌에서’ 살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수열의 시는 분명 아주 한국적이면서 제주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노년이나 죽음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마지막 두 편은 표제작인 ‘호모 마스크스’를 포함하는데, 이는 분명 팬데믹을 견디며 분투하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반반 프로젝트, The Halfie Project
벡키 화이트와 반반 프로젝트 팀 www.thehalfieproject.com
하이브리드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고 탐색하다
창시자 벡키 화이트의 말에 따르면 ‘반반 프로젝트’는 예술 작업인 동시에 연구 프로젝트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연습장이면서,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들을 탐색한다. 구체적으로는 혼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혼혈 한국인들은 종종 묘한 위치에 처한다. 화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두 세계 모두에 속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다른 반쪽 문화에서는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으로 여겨지고, 한국에 오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반반 프로젝트는 이러한 공통된 경험과 의문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체성이나 소속감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한다. 프로젝트 팀의 웹사이트에서 ‘반반 프로젝트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 인스타그램을 만나볼 수 있다. 다른 혼혈 한국인들과의 인터뷰가 주 콘텐츠이지만 ‘눈치’, ‘한’과 같이 설명하기 힘든 한국적인 문화 개념을 정의해보기도 하고, 정신 건강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통찰력 있는 문화적 해석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이 혼혈 한국인이거나 - 프로젝트 팀은 혼혈인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한다 - 혹은 다문화적 정체성 이슈에 관심이 있다면 이 프로젝트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